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을 때가 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도움 받을 데가 없음)이 바로 내 얘기 같을 때가 있다.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순간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외로움과 막막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를 모셔왔다. 그가 누구인가. 무인도에서 수십 년, 정확히 말하면 28년 두 달 19일을 살았고, 그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살아남은 사람. 혼자 살기의 달인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 긴 세월을 혼자 살아남은 비법을 배워볼까 한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을 때가 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도움 받을 데가 없음)이 바로 내 얘기 같을 때가 있다.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순간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외로움과 막막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를 모셔왔다. 그가 누구인가. 무인도에서 수십 년, 정확히 말하면 28년 두 달 19일을 살았고, 그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살아남은 사람. 혼자 살기의 달인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 긴 세월을 혼자 살아남은 비법을 배워볼까 한다.

 

1. 자신이 가진 것, 받은 것을 생각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보트를 타고 선원들과 함께 탈출하지만, 홀로 살아남아 섬에 오른다. 뭐가 사는지,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면 누군들 막막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로빈슨은 얼마 후, 자기가 탔던 배가 그리 멀지 않은 바다 모래 턱에 걸려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러 날에 걸쳐 열 번도 넘게 오가며 거기 있는 물건을 잔뜩 가져온다.

비스킷 등의 먹을 것과 술, 약간의 곡물, 총, 화약, 옷가지, 도끼 등의 온갖 작업 도구, 많은 쇠붙이, 천으로 쓸 만한 돛, 다량의 밧줄 등등. 한마디로, 홀로 무인도에 던져진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물자가 주어진 것이다. 물론 그가 처한 조건을 생각할 때, 로빈슨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로빈슨은 오락가락한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했다가, 그래도 ‘이게 뭔가, 혼자서 어쩌라는 말인가’ 하고 불평했다가, ‘그래도 이렇게 많은 것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물자가 다 떨어질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한다. 그러다 자신의 처지를 나쁜 점과 좋은 점으로 나눠서 따져본다. 이런 객관적 상황 분석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근거를 제공한다.

 

나쁜 점

– 무섭고 외로운 섬에 홀로 표류. 구출 희망 없음.

– 불행한 상태로 홀로 살아남았다.

– 외톨이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자다.

– 몸을 덮을 옷가지조차 없다.

– 맹수나 사람이 공격할 경우 방어나 저항 수단이 없다.

– 이야기를 나누거나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좋은 점

– 다른 선원이 모두 빠져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

– 나만 홀로 죽음을 면했다. 나를 구하신 신께서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

– 굶거나 가진 것 없이 죽어가는 것은 아니다.

– 더운 곳에 있으니 옷이 필요 없을 것이다.

– 맹수가 없다.

– 배를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보내주셨다. 필요한 물건을 잔뜩 챙길 수 있었다.

 

좋기만 한 일도 없지만, 나쁘기만 한 일도 드물다. 자신에게 있는 것, 자신이 받은 것을 돌아볼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 생활이 안정된 후, 자체 제작 카누를 타고 섬을 둘러보다가 조류에 휘말려 먼 바다로 밀려나 다시는 섬으로 못 돌아올 뻔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이전까지 감옥이라 부르던 섬을 ‘사랑스러운 섬’이라고 부르고, 그리로 돌아가려고 사력을 다한다. 섬과 거기 담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서야 로빈슨은 자신이 누렸던 것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잃기 전에 그 가치를 알아본다면, 세상이 훨씬 밝게 보일 것이다.

 

2. 기록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배에서 가져온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본다는 것. 글을 쓰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상황을 좀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다. 더욱이 혼자 있으면 맴돌기 쉬운 반복되는 생각들을 잡아내어 패턴화할 수 있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많이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반응에 반복되는 어떤 경향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을 때는 뭔가 대단한 것 같았는데, 막상 적어보면 실체가 없는 구름 잡는 생각들로 드러날 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들, 그와 관련된 생각과 문구들을 적어 놓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일, 뜻깊은 일이라 해도 적어두지 않으면 인간은 잊어버리고, 기억이 희미해져 버리면 그 사건이 가져다준 교훈과 기쁨, 감격도 덩달아 희미해져 버리기 쉽다. 혼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을 상기시켜 줄 문자화된 기록이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일기가 꽤 긴 분량으로 소개되어 있다. 자기에게 몰입하고 한없이 빠져드는 타입의 사람만 아니라면, 기록하여 자신의 내외적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3. 반려동물을 둔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을 감옥이라고 부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왕국이라고도 부른다.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는 게 맞겠다. 어쨌든, 그는 섬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안정된 시점에서 자기 왕국의 신민들을 소개하는 대목을 보자. 그는 그들의 목숨이 자신의 손끝에 달려 있다고 으스댄다.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혼자 제왕처럼 만찬을 즐기는 내 모습을 보자. 유일하게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앵무새 폴은 가장 총애 받는 신하처럼 보였다. 개는 함께 후세를 남길 동족을 찾지 못한 채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정신마저 오락가락했으며, 늘 내 오른편을 지켰다. 고양이 두 마리는 각각 탁자 양쪽에서 내가 특별히 예뻐한다는 표시로 건네줄지도 모르는 먹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앵무새에게는 로빈슨 크루소가 열심히 말을 가르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개는 배에 있던 녀석을 로빈슨이 구해낸 것이었으며, 고양이는 섬에 야생하던 것을 길들인 것이었다. 반려동물들을 돌보고 키우는 수고는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에 해당하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은 로빈슨 크루소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동료를 선택한다. 그 유명한 윌슨이다. 그는 어딜 가든 윌슨과 함께 하고 윌슨에게 말을 걸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화가 나서 윌슨을 차버렸다가, 곧 후회하고 윌슨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던 장면은 도무지 잊을 수 없다. 영화를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윌슨은 배구공이다. 혼자는 안 된다.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이라도,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윌슨이라도 곁에 둘 일이다.

 

4.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일단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배에서 가져온 먹을 것이 좀 있기는 해도, 그것은 언젠가는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아껴먹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섬에서 나는 포도를 따먹고, 포도를 말려서 저장성을 높여야 한다. 거북이를 잡아먹는다. 염소를 사냥하고 나중에는 사육한다. 배에서 가져온 곡식은 대부분 쥐가 먹어버린 상태였지만, 다행히 그 중 몇 개가 ‘기적처럼’ 살아남아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결국은 농사까지 짓게 된다.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또 어떤가.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인간이나 야생 동물의 침입을 막아줄 집을 마련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안전한 거처는 먹을 것과 마찬가지로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빠른 시일 안에 사력을 다해서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배에서 가져온 옷이 다 떨어지고 나서는 입을 옷을 만들어야 하고, 몸이 젖지 않게 해줄 비옷과 우산까지 필요했다. 섬을 둘러볼 수 있는 카누까지. 그는 정말이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고,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고 마련하는 과정에 집중하다 보면 정말 하루가 짧았다.

일이 있으면 외로움을 더는 데 도움이 된다. 열심히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은 몸과 마음 모두에 활력을 준다. 꼭 해야 할 일, 또는 굳이 안 해도 될 일까지 만들어서라도 바쁘게 살아가면 외로움을 상당히 덜 수 있다.

 

 

 

 

5.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안 통할 때가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먹고 사는 일에 힘을 다하고, 흥미를 끄는 일에 열을 내다보면 외로울 새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다 건강할 때 이야기다. 몸이 아프고 드러누우면 답이 없다. 자신의 실존, 고립무원의 처지에 대한 자각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로빈슨도 그러했다. 그는 좀처럼 낙담할 줄 모르는 굳은 의지의 사나이다. 한때 노예 신세가 되었을 때도 꿋꿋하게 견디다 탈출했고, 브라질에서 농장주로 성공했던 사람이다. 혼자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물자를 구하고 거처를 마련한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혼자 살기에 적응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비를 맞은 탓인지 몸져눕는다. 지금까지 통했던 방법을 하나도 쓸 수 없는 진정한 한계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렇게 외쳐댄다. “신이시여, 굽어 살펴주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러다 잠든 그의 꿈에 환한 불꽃에 싸인 어떤 남자가 창 같은 긴 무기를 들고 나타나서 말한다.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너는 참회할 줄 모르는구나. 이제 너를 죽여야겠다.”

꿈에서 깬 로빈슨 크루소는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아버지의 간곡한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살다가 결국 이런 자리에 이른 것이 마음에 쓰인다. 이전까지의 부도덕한 생활도 돌아보게 된다. 이전에 노예였다가 탈출을 위한 위험한 항해를 할 때도, “스스로 미래에 어떻게 될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쪽 길로 가야 할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길 바라지도 않았다.” “하나님이나 심판 따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무인도에서 꼼짝 못하고 병들어 누운 절대적으로 무력한 자리에서, 로빈슨은 인생이 원래 그렇게 허약한 것이었음을, 언제라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음을 직시하게 된다.

병이 난 지 3일 째. 기도 비슷한 말이 튀어나온다. 응답이 될 거라는 “소망이 담은 기도”는 아니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주여 도와주소서. 저는 괴로움에 빠졌나이다.” 그리고 몸이 좀 나았을 때 “생전 처음으로” 식사 기도를 한다. 이상한 말이다. 독실한 그리스도인 부모 슬하에서 자란 그가 이전에 식사 기도를 안 했을 리 없다. 그러나 의례적인 기도, 습관적인 기도, 문화의 일부로서의 기도 말고, 생명의 주인이시며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식사 기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 대목에서 “은총의 도움을 욕망하는 것이 은총의 시작”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떠올릴 만하다.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그의 책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박세혁 역, 비아토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능력의 한계에 직면하여 어느새 초월적인 은총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은총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한다. “계속 요청하라. 믿지 않아도 요청할 수 있다. 이를 기억하라. 당신은 믿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도움을 원하는 것 자체가 신뢰의 첫 단계다. 은총을 갈구하는 것이 첫 번째 은총이다. 자기 충족성의 종말에 이르는 것이 첫 번째 계시다.”

로빈슨 크루소의 절박한 외침은 배에서 건진 궤짝 속 성경에서 찾은 다음 구절에 힘입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2). 이전까지 그의 ‘기도’가 자신의 절박함에서 나온, 그래서 응답을 기대할 근거가 없는 외침이었다면, 이제 이 구절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다른 가능성을 엿본다. 그날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힘든 날에 그분을 찾으면 구해주시리라 하신 약속을 지켜달라고 빌었다.”

꿈에서 들었던 참회의 촉구는 로빈슨 크루소를 계속 괴롭혔다. 그리고 참회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성경구절 하나.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이 말씀에 힘입어 그는 이렇게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시여! 임금과 구주이신 예수님이시여, 절 참회케 하소서.” 그리고 ‘처음으로’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한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제대로 기도를 올린 게 그날인 것 같다. 그때 했던 기도야말로 내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은 용기를 바탕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을 품고 진정으로 올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혼자 있으면서도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상륙 기념일에는 금식도 하면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이어지는 온갖 모험과 힘든 결정 가운데도 신앙은 그를 붙들어주는 힘이요 이끌어주는 나침반이 된다. 나중에 그는 섬에 오른 지 22년째 되는 해에 식인종들의 손에 섬으로 끌려와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던 프라이데이의 목숨을 구해줄 뿐 아니라, 그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기까지 한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몸져누웠을 때 바닥을 쳤던 무력하고 막막한 무인도 생활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처한 본질적 상황, 구원자가 필요한 무력한 존재인 인간의 실존을 깨우쳐 준 순간이었다.

혼자 살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혼자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절망감과 무력감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고독의 무인도에서 신을 만나고 소망과 위로와 확신을 찾은 로빈슨 크루소의 경험을 눈여겨볼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회심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감옥에 갇혀 독방에서 신앙적 각성을 경험했던 저자 대니얼 디포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가며: 로빈슨 크루소의 빵 만들기가 말해주는 것

 

로빈슨 크루소에서 더 재미있는 부분은 전반부, 그것도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가는 대목이다. 그 절정은 빵 만들기. 십 쪽이 넘는 아주 긴 분량에 걸쳐서 소개된다. 우선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 얘기를 했지만, 야생 동물과 새들로부터 곡식을 지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울타리를 세우고 총을 쏘아야 했다. 밭을 갈아엎을 삽을 나무로 만들어 써야 했다. 곡물을 심어서 거두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곡식을 빻기 위해 절구와 절굿공이를 만들어야 했다. 빻은 가루에서 겨를 걸러낼 체를 마련해야 했다. 굽는 단계에서는 오븐도 만들어야 하고, 반죽을 담을 그릇도 필요하다.

빵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다. 빵을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로빈슨 크루소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빵은 평소에 우리가 돈만 주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이라, 빵 하나가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필요한 수많은 도구와 사람들의 수고를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 빵뿐이겠는가.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도 노동을 하는 당사자가 내가 아닐 뿐, 다시 말해, 그 수고를 ‘내가 안할 뿐’ 수많은 누군가에 의해 똑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언택트 시대다. 앱만 사용하면 뭐든지 주문할 수 있으니까, 마치 혼자 살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모든 앱과 배달 시스템은 물론이고, 그 시스템을 통해 편리하게 전달되고 우리 손에 간편하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수고와 노력의 산물이다. 나는 오롯이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기대어 사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사실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돈만 내면 거의 모든 것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로 자신을 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돈 몇 푼만 내면 구할 수 있는 ‘얼마짜리’ 상품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처절한 노동이 바로 이런 얄팍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치료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것 하나조차 처음부터 다 만들어내야 하는 그의 수고를 보노라면, 내가 하는 일 하나만 열심히 해서 수입을 거두기만 하면 수많은 다른 것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지금의 환경에 대한 한없는 감사가 밀려온다.

문득문득 혼자인 것처럼 외롭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의 생존 자체가 수많은 이들의 네트워크에 철저히 기대고 있으며, 내가 접하고 배우는 모든 것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에 가능한 것임은 더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로빈슨 크루소는 그 당연한 사실을 극적이고 신선하게 드러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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