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실용 외교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한국 외교의 애로 중 하나는, 아래 ‘한국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 표에서 보듯이, 한미 간에 집권당의 성향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긴밀한 동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성향이 엇갈리는 집권 세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각종 갈등이 야기되었다. 박정희와 카터, 김대중과 부시, 박근혜와 오바마 경우가 그러했고, 문재인과 트럼프 경우도 상당한 갈등이 예상되었다. (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외교 활동의 치명적 오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의 미국 순방에 이어 6월에는 G7 정상 회담 참가를 겸한 유럽 순방을 다녀왔다. 이러한 순방 외교에 대해 다양한 논평이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특히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력 쟁탈을 꿈꾸는 반지배연합은 이념 외교적 전제와 악의적인 가짜 뉴스들을 통해 문재인 외교의 올바른 이해를 저해하고 있다. 불행히도 적지 않은 언론 매체들이 ‘공정 언론’의 대의를 저버리고 이러한 이념적 권력 투쟁에 깊이 종사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외교 활동이 당파적 이익의 싸움으로 오염되고 있는 현 상황이 크게 우려스럽다.
외교가 국내 권력 투쟁으로 오염되면 그 국가는 존망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당파 싸움으로 인한 외교 혼란으로 국가가 망할 뻔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1590년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서인(西人)인 정사 황윤길이 왜국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하자, 동인(東人)인 부사 김성일은 당파적 시기심으로 전혀 그럴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에 동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황윤길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운 거짓 보고로 말미암아 조선이 어떤 위기를 겪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실용 외교
일반적으로 실용주의란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반형이상학적인 철학 사상을 말한다. 실용주의자들은 이념보다 행동을 중시하며 관념은 실험적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 타당성을 보여야만 진리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국제 정치에서 이 실용주의는 국가 이익의 보호를 강조하는 현실주의 외교 정책과 일맥상통하며, 자유로운 검증과 다양한 가치관의 존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다원주의의 이론적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용 외교에서는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 정세하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냐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한국은 외교에서 실용적 태도를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냉전적 대립의 산물로 출발하였으며 이후로도 국가 생존을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 외교를 표방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사대 외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강력한 이념적 세뇌와 탄압이 군부 통치의 권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념을 상대화하는 실용의 주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말로는 창조적 실용 외교를 표방하였으나 외교의 실제에서는 기존의 이념 외교를 벗어나지 못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역사와 대조해보면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는 나름 건실한 실용 외교라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에 국익과 국민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실사구시의 실용 외교를 그의 외교적 비전으로 선언한 바 있다. 방법론으로서는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을 계승하였지만, 이론적 논쟁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검증으로 초점을 전환함으로써 이념적 논쟁의 고리에서 벗어났다. 남북 정상 회담과 북미 정상 회담, 한중 정상 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 긴장 완화와 경제 외교로의 전환을 유도하였다. K-pop과 K-방역의 성과를 활용하여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증진했고 미사일 거리 제한 해제와 같은 하드파워 증진도 달성하였다. 무엇보다 꾸준히 국방력을 강화하여 임기 동안 군사력 수준이 급상승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글로벌파이어파워>의 추계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 세계 순위는 2016년 11위에서 2021년 6위로 상승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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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실용 외교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한국 외교의 애로 중 하나는, 아래 ‘한국과 미국의 역대 대통령’ 표에서 보듯이, 한미 간에 집권당의 성향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긴밀한 동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성향이 엇갈리는 집권 세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각종 갈등이 야기되었다. 박정희와 카터, 김대중과 부시, 박근혜와 오바마 경우가 그러했고, 문재인과 트럼프 경우도 상당한 갈등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도리어 트럼프 대통령의 기호를 적극적으로 관리함으로써 파격적 북미 관계 개선을 유도할 수 있었다.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으셔야 하고, 우린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는 식의 실용적 접근은 미국의 <타임>지가 표현했듯이 “협상가”(negotiator)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실용 외교를 위한 상식
문재인 정부의 외교가 역사적으로 가장 실용 외교에 근접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애로에 봉착 해 있다. 첫째로, 이념적 오염으로 인한 갈등이다. 실용 외교의 대중적 기반은 넓지만, 실용 외교의 전복을 노리는 극좌와 극우의 이념적 오염 활동에 직면해 있다. 둘째로, 반지배연합의 도전이다. 특히, 극우 집단은 2017년 박근혜 탄핵을 통해 다수 대중의 폭력으로 권력을 강탈당했다고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저항과 도전을 하고 있다. 셋째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어려움이다. 특히 미중 갈등이 점차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실용 외교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애로를 돌파하는 창조적 리더십의 유지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창조적 리더십으로 많은 구조적 장애를 돌파할 수 있으나 빈번히 안정성을 추구하는 관료적 장애에 봉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애로를 극복하고 실용 외교가 튼튼히 지속되려면 실용 외교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와 동의가 중요하다. 그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에서는 외교에 관한 상식으로서 매개의 변증법, 국제적 무정부성, 합종연횡, 원교근공, 다원적 외교 등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매개의 변증법1):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직업 외교관 집단의 조직이기주의를 극복하기 힘들다. 외교 관료들은 원래 국가 이익을 위한 봉사자로 직위와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국가 이익을 희생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관료 태업과 관료 포획2) 혹은 도덕적 해이는 실용 외교 실행에 심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들은 또한 조직 이기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념 외교 지향의 반지배연합 세력과 연합을 추진하기도 한다.
국제적 무정부성: 아무리 세계화를 부르짖어도 국제적 무정부성은 여전하고 자력갱생의 필요성도 불가피하다. 아래 ‘한반도 주변국의 군사력 현황’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은 세계군사력 순위의 1, 2, 3, 5위의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의 국가 이익을 무시하는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같은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 조정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제적 무정부성으로 인해 개인 윤리와 집단 윤리의 간극이 크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예컨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지만,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침략자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것은 선한 행위로 간주된다.
합종연횡: 근대 국제 정치에 있어서 생존을 위한 동맹은 필수적이다. 어떤 국가도 혼자서 여타 국가들의 동맹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예컨대, 2020년에 북한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남한을 침공한다면, 그들은 17,300대의 전차와 1,698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어서 남한 혼자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이에 대항하는 방안으로 남한이 미국과 동맹한다면 7,819대의 전차와 1,793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고, 중국과 동맹한다면 7,980대의 전차와 1.309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다. 물론 당연히 동맹국의 조합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어떤 동맹이든 각자의 냉정한 이해타산에 기초하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원교근공: 먼 국가와 동맹하여 가까운 국가를 공격한다는 원칙이다. 영토를 맞대고 있는 인접 국가들 사이에는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함을 일깨우는 지정학적 지혜이다. 국제연합의 질서 하에서도 동북아에서는 영토 갈등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물론 19세기의 영국이나 20세기의 미국과 같은 패권 국가들의 영역은 범세계적이어서 원교근공 개념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중소 국가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원교근공의 지혜를 잘 활용해야 한다.
다원적 외교: 국제화 시대에는 국력의 요소가 다원적이다. 예컨대 군사력과 경제력, 동맹 체제, 문화 예술, 종교적 신념, 공공 의료와 기술 혁신 등과 같은 요소들이 특정한 시기와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국력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정부와 관료들만 담당했던 외교의 행위자 역할도 오늘날 다양한 비정부 기구와 기업과 개인들이 다원적으로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교 관료들이 외교를 독점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실용 외교의 정착을 위하여
근대의 세계 역사를 보면 실용 외교의 국가들이 이념 외교의 국가들을 압도해 왔다. 이제 막 맹아기에 접어든 한국의 실용 외교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실용 외교의 정착 여부는 국민들 손에 달려 있다. 대표적으로 선거라는 선택 행위를 통해 국민들이 실용 외교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 유권자들이 이념 외교를 주장하는 정당보다 실용 외교를 주장하는 정당을 택한다면, 실용 외교는 지속될 수 있다. 물론 선거 국면에 들어가면 거의 모든 정당들과 후보들이 실용 외교를 공약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유권자들은 스스로 실용 외교의 진실성 여부를 판별해야 한다. 이 글이 제공하는 실용 외교의 상식이 유권자들의 판단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1) 인간은 그들의 삶을 향상하기 위해 국가나 관료 체제와 같은 매개(mediator)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런 매개들은 그들의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보다도 우선 그 자체의 존속을 강화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이러한 매개들의 자기 강화는 매개의 본래 목표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며 결국 자기 파괴라는 모순으로 귀결된다. 이런 과정을 매개의 변증법이라고 한다. 매개들의 자기 강화, 본질로부터의 소외, 자기 파괴라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런 경향에 저항하기 위한 지속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2) 관료 집단을 규제해야 할 권력 기관이 관료에게 포획(captured)되어 공익에 반하여 관료의 이익을 보호하게 되는 현상(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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