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념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지금의 보수적 교회처럼 신앙과 이념을 동일시하는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본문 중)

장동민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코로나 시대의 한국 기독교와 이념

 

일반적으로 현재 보수와 진보 양대 이념의 주류를 이루는 정파들의 시작을 1990년 ‘삼당 합당’으로 보고 있다. 약 30여 년 동안 엎치락뒤치락 정권 교체를 거치며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정치 세력들이다. 두 이념의 대립은 우리 사회 각 분야를 보수와 진보로 양분하였다.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으며,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일상화되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삼당 합당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결성됨으로써, 진보적 기독교 연합기구인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대립적 구도를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2002년 참여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한국 교회 내의 신학적 보수 진보 대립이 정치적 보수 진보 대립과 맞물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 운동이라는 시민운동 형식으로 시작된 보수적 기독교의 정치 참여가 점차 확대, 심화되었다. 2003년 3월 1일, 뉴라이트 단체들이 주최하고 수만 명이 참여한 “반핵반김 자유통일 삼일절 국민대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 정책을 비판하고, 한미 간 전시작전통제권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였다. 신학적 보수와 정치적 보수가 맞물린 기독교 보수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최초의 집회였다. 이 대회를 시점으로, 기독교와 태극기 그리고 가끔 성조기도 함께 등장하는 소위 ‘태극기 집회’가 시작되었다.

뉴라이트는 2007년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후,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보수적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각 교단과 기독교 단체들을 통하여 더욱 확대되어 갔다. 한기총 등 기독교 단체들이 중심축을 이루는 태극기 집회, 선거 때마다 이름을 달리하며 등장하는 기독교 정당들, 박근혜 정권 말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매년 8·15에 반복되는 건국절 논쟁 등에서 뉴라이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보수적 기독교는 동성애, 이슬람, 세월호, 촛불 혁명, 검찰 개혁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개입하여 보수적 의견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2020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코로나19 시대는 한국 교회가 이념적으로 우(右)편향되었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더욱 고착되는 시기였다. 마침 4·15 총선과 시기적으로 일치하여 보수적 기독교와 보수적 정당이 연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2020 총선이 자유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친미냐 친중이냐 등 대한민국의 체제를 결정할 중요한 선거라 주장하며 반공주의 정서를 자극하였다.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 전광훈 목사가 있었다. 정치에서 방역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극우적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방역에 불만을 품고 비상식적 행동을 하였고, 그 결과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발생하였으며, 급기야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 발 대유행이 일어났다. 방역 당국은 기독교 집회를 철저히 봉쇄하였고, 진보적 언론에서는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온상이라는 식의 대대적 보도가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회주의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기 위하여 코로나를 이용한다는 등의 가짜 뉴스가 퍼졌다. 기독교는 국민적 지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 신뢰도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와 이념의 긴장 관계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이념과 완전히 결별하고 오직 신앙만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까? 기독교 신앙과 이념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그 이념을 구현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인데, 그 방식이 바로 기독교가 정치 이념을 하위 개념으로 두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항상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한말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을 때 기독교는 개화파와 같은 길을 걸었으며, 일제 강점기 삼일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기반에는 민족주의와 융합한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이 있었다. 해방 후에도 북한에서는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치를 하려 하였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을 주장하였다. 군사 정권이 들어선 후 기독교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반공주의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기독교는 진보 정치의 지분도 상당히 가지고 있어서, 민주화 운동 시절, 많은 진보적 기독교인들과 천주교 사제와 평신도들이, 인권 운동, 노동조합 운동,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념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지금의 보수적 교회처럼 신앙과 이념을 동일시하는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의 미래에 미치는 악영향

 

우선 교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해 보자. TV 뉴스나 신문을 보면 개신교인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그중 적지 않은 숫자가 전광훈 목사와 같은 극우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통계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이념 지형은 일반 국민의 정치 지형과 비슷하거나 진보층이 약간 많고, 고연령층이나 교회의 지도자층은(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매스컴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보다는 개신교인 가운데 진보층이 두텁다.

이러한 교회 내 이념 분포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교회 안에 보수, 중도, 진보가 고루 존재하기 때문에 교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다수의 교회에서 목회자를 비롯한 주류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못하는 샤이 진보의 숫자가 상당하다. 이들은 신앙과 보수적 이념을 일치시키는 목사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예 설교 자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지도 모른다. 교회 내에서 주로 보수파가 강한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고 샤이 진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다.

더 나쁜 경우는, 어떤 교회에는 보수적인 사람들만 그득하고 어떤 교회에는 진보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이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을 초월하려 하였던 신약 교회의 이상에 비추어볼 때, 교회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상대를 저주한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라고 하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골이 너무 깊다. 이렇게 교회는 신약의 이상으로부터, 그 본질적 가치로부터 멀어져 간다.

둘째, 이념적 갈등을 견디다 못하여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도 상당수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한쪽의 정치적 성향과 정확히 일치하게 될 때, 반대쪽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이가 젊을수록 진보적 성향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념적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 이 역시 한국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더욱이 교회 세습, 후계 다툼, 법정 투쟁 등의 흉한 모습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더욱 급속도로 교회를 이탈한다. 교회의 이런 스캔들은 젊은이들이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적 가치와 전근대적인 관습이 결합되어 나타난 괴이한 현상이다. 후기 근대적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수적 이념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은 추문은, 전통적 기독교마저 혐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기독교 신앙과 이념의 영합은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도 크나큰 악영향을 미친다. 세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이념과 정치 제도를 비판할 수 있는 잣대가 없어진다. 기독교 신앙의 장점은 이 세상의 모든 이념과 제도와 정치 세력을 상대적으로 보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를 초월하신 절대자 하나님은 이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전적 타자(他者)이시다. 기독교는 현실 정치가 기독교로부터 제공받은 가치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기성 정치로 제도화되면서 권력을 남용하지는 않는지, 내부적 타락이 있지 않은지를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으며 또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이 이념과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이념을 비판하기 어렵다. 비판받지 않은 이념, 기독교 신앙과 밀착된 이념은 자칫 가장 악한 체제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권력은 타락하고 그 권력이 절대적일수록 절대적으로 타락하는 법인데, 신앙과 정치를 결합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전체주의 체제가 순수하게 유지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 체제가 무서운 것은 절대적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종교적 헌신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앙과 이념을 결합시킨 목사들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에 가까운 막말을 퍼붓는 것을 목격하였다. 방역을 방해하고 경제적인 손해를 입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들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정치 이념을 상상하고 제공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산업의 발전에 따라, 혹은 사회적 위기를 맞이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현실 정치를 알면서도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또한 늘 고통당하는 자들의 자리에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왜곡된 구조를 개혁함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꿈을 꾸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이후 더욱 어려운 현실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사회적 분열과 갈등, 민족주의적 고립의 심화, 기후 위기 등이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문제들에 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답을 가지고 있다. 아니,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길만이 올바른 길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동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철 지난 이념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함으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대에 역행하는 반동 세력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만일 한국 기독교가 지금과 같이 과거 이념에 매몰되어 미래의 문제에 눈 감는다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소망을 찾으란 말인가.

셋째, 극단의 이념 대결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념들을 상대화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는 이념에 의하여 왜곡되고 기울어진 공론장(公論場, public sphere)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객관성과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내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할 수 있는 지혜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이념 간 중재 조정 역할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현재 한국 교회는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향된 이념과 기독교가 동일시되어 국론 분열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사회 통합의 방해물이 된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현세보다 내세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의 가치들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혐오의 대명사가 되었고, 내려놓고 포기해야 하는데 그악스럽게 기득권을 수호하며, 이 땅의 제국을 금세 시들어버릴 풀꽃으로 여겨야 하건만 사대(事大)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낙관적 전망이다.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검찰 개혁과 코로나19 사태 등을 겪으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에 대하여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카르텔이 무척 공고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위한 큰 틀에서의 국민적 합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여곡절은 있겠으나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 세력이 집권함으로 결국 역사적으로 올바른 대답을 내어놓을 것이다.

비관적 전망도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고 경제가 다시 제자리를 잡고 사회가 안정되더라도, 이미 반으로 분열된 보수와 진보 세력이 더욱더 극단으로 치닫는 것이다. 야당은 (그게 어느 정당이든지) 작은 문제를 키우고 없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면서 정권 교체를 추구하고, 여당은 강성 지지자들에 떠밀려 강 대 강 대응을 함으로 분열이 심화되는 것이다. 마침내는 내부적 결속을 위하여 외부에 적을 만들고(북한, 일본, 중국 등 외부의 적은 널려 있다) 타 문명과의 대결로 나아간다.

두 길 가운데 어느 길로 갈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념 대결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사태를 볼 수 있는 지혜와 용기다. 어느 한 이념, 어느 한 정파를 진리로 알고 다른 쪽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는, 그것이 보수든 진보든,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기 위해서는 정치와 이념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 삶의 여러 국면, 여러 영역을 고루 봄으로써 정치에 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정치 과잉의 사회다. 정치의 한계를 알게 해 주는 것, 이것 또한 바로 우리 시대 기독교가 사회를 위하여 해야 할 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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