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암흑기에 접어들자 신채호는 정감록의 비결을 수용하고 무장투쟁의 길에 나섰다. 길선주는 타락의 시대에 요한계시록과 신문을 읽고 말세묵시의 비밀을 설교했다. 땅의 길과 하늘의 길은 어긋났다. 무정부주의와 기독교묵시주의는 다른 길을 갔다. 모두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원했지만 그들이 상상한 종말의 세계가 너무 달랐다. 지상천국은 올 것인가?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미국의 공간 확장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들은 유럽이라는 공간이 비싸지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을 점령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당겨지리라는 종말론의 영향도 컸다. 청교도들이 차지한 미국 동부의 공간을 넘어 서부 개척이 이루어지자, 복음과 문명을 전해야 할 명백한 운명을 믿은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와 필리핀마저 점령했다. 1851년 초판이 나온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광대한 대양을 개척해 나가는 미국 남성의 운명과의 싸움을 그렸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1952)가 나올 때까지 미국은 이후 백 년 동안 태평양으로 확장해 나가는 ‘백인의 짐’을 진다. 냉전으로 한반도를 반분한 이후 베트남이라는 공간을 잃어가던 1969년, 미국은 아폴로 11호를 통해 달이라는 공간에 ‘작은 첫 발’을 디뎠다. 우주 다음의 개척지는 무엇일까를 궁금해 하던 미국인에게 인터넷은 가상공간을 제공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비대면 가상공간 안으로 몰려갔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가상공간에서 소비자가 전자 직거래로 물건을 구매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세계 제1의 거부가 되었다. 지난 7월 21일 암스트롱이 달에 ‘인류를 위한 거대한 발자국’을 디딘 지 52주년의 날, 베이조스는 11분 간 우주 공간을 날고 지구로 귀환했다. 그동안 정부가 차지하던 우주 공간이 민간 대기업과 억만장자들에게 관광지로 개방되었다. 그들은 지구 행성을 돌보지 않고 새 공간을 점령하고자 한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에서 보듯이 공간의 신속한 점령은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을 동반한다. 자연 공간의 점령으로 바이러스의 역습을 받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새로운 공간을 선점하고, 그것을 선점하는 자가 부자가 된다.
사람들이 이런 외형 공간을 확장해 나갈 때, 19세기 후반부터 심리학은 인간 내면 공간을 탐구했다. 심리학자들은 다층 구조로 된 마음을 발견하고 표면 아래로 내려갔다. 프로이트는 거대한 무의식의 공간을 보여주었고, 20세기에 융은 개인 무의식 아래 집단 무의식의 공간을 분석했다. 21세기 뇌과학은 인간의 뇌라는 미지의 공간을 연구하면서 컴퓨터에 인간 뇌를 능가하는 인공 초지능을 심어 불멸의 존재를 추구한다. 인간 의식의 확장 속도가 공간 확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빈부 양극화가 진행되고, 자연은 파괴되고, 종교가 들어설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공간과 개신교의 발전
1884년 알렌,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헤론과 스크랜턴 등이 서울에 정착하고 미국 개신교가 한반도에 침투해 들어올 때,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에서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내려가면서 노예 문제를 다루었다. 미국의 인종 차별의 원죄를 안고 해외로 나온 20대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영적 식민지로 인식했다. 그러나 선교 공간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다른 선교지와 달리 한국은 일본이 점령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장로회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북진을 시작했고, 부산과 대구로 남진했다. 남장로회가 전라도를 차지하고, 호주장로회는 경남을, 캐나다장로회는 함경도를 차지했다. 북감리회는 서울과 평양 외에 황해도 해주, 강원도 원주, 평안도 영변, 충청도 공주로 진출했고, 남감리회는 서울, 개성, 철원, 춘천을 차지하는 선교지 분할(comity) 체제를 만들었다.
한국 개신교의 무게 중심은 서울(1884)→평양(1894)→선천(1901)→강계(1909)→서‧북간도와 시베리아로 이동해 나갔다. 고난 받는 민족과 함께 디아스포라 한인들 속으로 들어간 개신교는 함께 아파하면서 민족 해방의 꿈을 꾸었다. 해방 후에는 그 무게 중심이 서울로 다시 내려왔다. 1990년대부터는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으로 강남 아파트촌에서 대형교회들이 올라갔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 지난 1년 반 동안 가상공간이 새로운 영적 공간으로 분양되고 있다.
한국인과 예언적 시간관
구약의 히브리인, 신약의 그리스도인, 한국인은 공간적 약자들이었다. 그들은 공간보다 시간을 기다리고 새로운 시간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유대인이 50년을 주기로 공간을 회복하는 희년을 기다렸다면, 한국인은 60갑자를 사이클로 신천신지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시간적 민족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용의 해 무진(戊辰)년과 뱀의 해 기사(己巳)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무기성인출”(戊己聖人出) 다섯 글자가 천기누설의 비결(秘決)로 이용되면서 시대 변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궁예(弓裔, 689-918)는 무진년 908년에 철원에서 후고구려를 세우고 후삼국시대의 새 시대를 창도할 성인으로 자처했으나, 동일한 무진년에 송악(개성) 태수가 된 왕건이 ‘무진성인출’을 내세우며 고려를 창건하고 용이 되었다. 400여 년 세월이 흘러 쇠퇴한 고려에 몽고 간섭기가 지속되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무기성인출’ 노래를 불렀다. 불승 신돈(辛旽, 1323-1371)은 무진년 생을 자처하고 역모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고려 우왕 14년(1388) 무진년에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李成桂)는 ‘무기성인출’과 ‘목자득국’(木子得國)의 파자(破字) 예언으로 여론을 만들어 조선왕조를 창건하고 용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928년 무진년에 조선일보에 신년 칼럼 “예언가가 본 무진”을 발표했다.1) 그는 무기성인출은 무진년과 기사년에 성인이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신운명을 개척하는 인물과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사실 그 글은 자신이 그 해에 혁명을 일으켜 일제를 패망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 1925-27년 세계의 여러 예언자들이 가까운 장래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전을 예견했다. 신채호는 김규식(金奎植)의 의견을 따라 1928년 세계대전설은 일축하고, 10년 정도 가까운 장래에 대전이 발생한다는 설은 수용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혁명투쟁을 추구하던 신채호는 무진년이 되자 정감록을 배척하면서도, 점성술이 말한 무기성인출 설을 수용하고 참서(讖書)인 『용과 용의 대격전』을 집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참살하고 상제를 하늘에서 추방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세상을 상상했다. 그는 일본의 반종교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기독말살론(基督抹殺論)』(北京, 1924)의 영향을 받아, “기독 말살”의 주문을 외면서 1928년 4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했다. 그러나 폭탄 제조를 위해 대만에 여행을 갔다가 체포되었고, 1929년부터 여순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에 사망했다. 그가 예언한 상제(일본 천황)와 기독(조선 총독)을 파멸시키는 ‘드래곤’은 오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병마와 싸우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길선주(吉善宙, 1869-1935)는 청일전쟁 때 피난하고 천주교 프랑스 신부에게 집을 잃은 경험 후에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장로교회에 가입했다.2) 선도(仙道)를 추구하던 도심(道心)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복음의 도사가 되었고, 1907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땅을 군용지로 몰수당하고, 1911년 장남 진형이 총독암살 음모사건으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이후 1917년에 병사하자 반일 감정은 깊어졌다. 기미(己未)년 3월 1일 독립운동 선언서 서명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2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요한계시록을 수백 회 읽은 길선주는 1921년 석방된 후 전국 순회 부흥회에서 말세론을 강의했는데, 전천년왕국설 중 세대주의 종말론을 가르치며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다.
길선주는 1920년대에 말세가 왔다는 시대의 징조와 증거를 수집했다.3) 사실 1910년대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종말 예언이 유행했다. 영국 목사 23인은 종말에 대한 계시를 받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루에 75,000통의 전보를 타전했는데, 황해도 재령에 거주하던 화이팅(Harry Whiting) 목사도 전보를 받고 1주일간 새벽기도회를 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대정(大正) 사회는 불안해졌고 1926년 소화(昭和) 시대가 시작되면서 군국주의 강경파가 세력을 확장했다. 1924년 이상룡(李祥龍)은 수운 최제우가 죽지 않고 계룡산에 102세로 은거하다가 자신으로 성육신하여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가 수운교(水雲敎)를 창시하고 갑자년(1924년) 조선 독립을 예언하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미국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을 예언했고, 1926년 3월 「동아일보」는 일본 열도가 함몰된다는 호주 예언가의 말을 보도했다.4) 이를 사경회 설교 때 인용한 길선주는 경찰법 처벌규칙 위반으로 경북 안동경찰서에 구류 29일을 당했다.5)
1930년 『아빙돈단권성경주석』이 나오자 길선주는 자유주의 신학의 침투를 말세의 한 징조로 보았다. 1931년 만보산 사건6)이 발생하고 평양에서도 한국인들의 공격으로 다수의 중국인이 살해되고 상점이 불타는 소요가 발생하자, 이를 인간성이 상실된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길선주는 만주국이 세워지고, 무신론이 팽배하고, 타락한 교회를 보면서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고, 배교의 시대에 깨어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공중에서 영접하고 함께 다스릴 지상 천년왕국을 상상했다. 그는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 적그리스도의 도성 바빌론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교회에서 새벽에 사경회를 인도한 후 쓰러졌다가 필담으로 “不入平壤”을 남기고 66세로 별세했다. 자신은 평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도 되고, 멸망할 평양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로도 해석되었다. 어느 쪽이든지 길선주는 평양, 나아가 한반도와 만주의 공간이 전쟁과 고통과 배교의 땅이 될 것을 내다보았다. 대신 그는 새로운 시공간이 펼쳐지는 평화의 천년왕국과 그 너머에 있는 영원무궁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의 꿈은 일제가 제시한 대동아공영권의 제국의 시공간과 병립할 수 없었다. 일본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는 바빌론제국에 불과했다.
길선주의 예언대로 장로교회는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지원했다. 토마스순교기념회를 이용해 출세한 오문환(吳文煥, 1903-1962)은 순교신앙 대신 친일사상으로 신사에 참배하고 군인들을 위문했다. 1939년 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1941년 1월 평북노회는 주일성수를 없앴다. 30%의 교인이 줄었다. 1942년 1월에는 싱가포르 점령을 기념하며 평남 560개 교회가 552개의 교회 종을 영미 군인을 죽일 총알과 포탄 제작용으로 헌납했다. 1943년에는 한 주간 중 예배는 일요일 새벽기도만 1회 드렸으며, 1944년에는 교회 절반이 문을 닫았고, 1945년에는 예배당이 거의 모두 전쟁용 사물실, 공장, 노동자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계시록을 성경에서 찢어서 버렸고 ‘미소기하라이’(신도 침례의식)7)에 참여했다. 다만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을 비롯한 소수의 교인들이 전멸(全滅)을 면하고 참 교회로 생존하거나 순교했다. 천황과 총독과 친일파들이 다스리는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 종말이 왔다.
팬데믹 시대, 한국교회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2021년, 생존이 화두가 되었다. 역사에는 반복이 없지만 유사한 일들이 사이클을 그리며 오고 간다. 공간도 변하고 시간도 변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것은 ‘온유한 자’(하나님을 신뢰하는 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야심차게 공간을 차지하고 건물을 올리고 세습하여 사람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뜻이 아니다. 조작이나 강제가 아니라, 새싹이 자라듯이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자라는 생명력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개입된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구원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았던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광야에서 유리 방랑하고,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당했던가? 한국교회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 세상의 저울로는 도무지 그 무게를 달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없어서 전멸하고 있다. 백 년 전에는 교회를 멸절시키기 위해서 드래곤을 요청하거나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이제는 교회가 세상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 상태이므로, 세상은 아군이 된 함량 미달의 가짜 교회에 대해 전쟁을 하거나 핍박을 할 필요가 없다.
역사가 암흑기에 접어들자 신채호는 정감록의 비결을 수용하고 무장투쟁의 길에 나섰다. 길선주는 타락의 시대에 요한계시록과 신문을 읽고 말세묵시의 비밀을 설교했다. 땅의 길과 하늘의 길은 어긋났다. 무정부주의와 기독교묵시주의는 다른 길을 갔다. 모두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원했지만 그들이 상상한 종말의 세계가 너무 달랐다. 지상천국은 올 것인가?
오늘 한국교회 앞에 오문환의 출세지향의 길과 주기철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 놓여 있다. 종말의 시간을 상실하고 땅에 코를 박고 있으면 오문환의 길을 가게 된다. 그는 역사를 연구했으나 역사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한국교회사에서 멸절되었다. 한국교회여, 생존과 영존의 길을 사모하자.
1) 신채호, “豫言家가 본 戊辰,” 「朝鮮日報」, 1928년 1월 1일.
2)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새물결플러스, 2020), 634-638. 길선주의 개종 동기에는 프랑스 천주교 신부에게 집터를 빼앗긴 문제가 있었다.
3) 길선주, “一千九百二十年間의 事,” 『眞理要覽』(수필본, 1929년 경, 장로회신학대학 도서관 소장)
4) “今後 六年 內로 日本이 陷沒된다,” 東亞日報, 1926년 3월 6일.
5) “현대의 예언자, 원로 목사 길선주,” 中外日報, 1928년 6월 5일.
6) 일제가 중국 만보산 일대 개간 공사에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을 동원하고 토착 중국 농민들의 반발은 무시함으로써 한중 양국민의 충돌과 감정대립을 조장한 사건(편집자 주).
7) 일본 토착종교인 신도의 침례의식(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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