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팔레스타인인들은 억세게 운이 나쁜 사람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처럼 인류 역사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복잡한 민족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유대인들의 고통스런 과거가 이들의 불의한 현재를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유럽인들이 저지른 유대인 핍박의 보상을 팔레스타인인들이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본문 중)

백종국(경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팔레스타인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한국인들의 여론조사를 보면 대체로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정복적 시온주의에는 비판적이다. 2014년 갤럽조사를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한국인들의 긍정적 인식은 29%로 일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선언에 대하여는 찬성이 9%로 바닥을 쳤다. 이러한 추세를 두고 볼 때, 일부 극우 기독교인들이 반정부 시위에서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모습은 좀 뜬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비극 :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 너무도 허약한 거주민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 허약한 거주민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팔레스타인 땅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대륙, 문명과 문명, 강대국과 강대국이 교차하는 통로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근처에서 일어난 강대국들이라면 누구든지 팔레스타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른 지역으로 뻗어 나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인구가 희박했던 청동기의 평화로운 시대 이후로 늘 강대국들의 침공 통로가 되었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통로에 위치하여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불평하는 한반도보다 훨씬 더 지독한 운명의 땅이라 할 수 있다.

 

 

만일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외적을 물리칠 힘을 길렀다면 도리어 팔레스타인은 강대국의 요람이 되었을 것이다. BC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왕국이 한동안 패권국가의 지위를 누렸던 전승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거주민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었던 시기는 극히 짧다. 위의 ‘도표 1’에서 보듯이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이슬람, 영국 등 막강한 세계적 강대국들이 번갈아 팔레스타인의 지배자로 등장했다. 1948년부터는 시온주의 이스라엘이 오랜 연고를 내세우면서 팔레스타인의 지배자로 자리를 잡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배를 둘러싼 경쟁 : 시온주의자와 팔레스타인인

 

오늘날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에는 새로운 정복자로서의 시온주의 이스라엘과 이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거주민 사이의 갈등이 있다. 팔레스타인 지배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새로운 정복자들과 거주민들 사이의 경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새로운 정복자의 승리로 기울고 있다. 1878년경 팔레스타인 인구 구성은 아랍인이 88%, 기독교인이 9%, 유대인이 3%였는데, 2021년 현재는 유대인이 74%, 아랍인이 21%, 기타가 5%이며,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팔레스타인 난민수가 550만 명이라는 통계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단순히 지배권 획득에 그치지 않고 인구 구성까지 바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유대인 공동체에서조차 소수파였던 이들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시온주의의 기원은 1880년대 테오도어 헤르츨이 주도했던 유대인 국가 건설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헤르츨은 당시 중부유럽을 휩쓸던 유대인 탄압에 대한 최종해법으로 유대인 국가 건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온주의란 시온산(예루살렘) 위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자는 이들의 구호에서 출발하였다. 당시 유대인 좌파 지식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착취와 제국주의의 폭압에 병든 유럽을 탈출하여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신천지를 개척하자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유대인 국가 건설 후보지로 터키, 시나이반도, 우간다, 아르헨티나 등이 검토되었고, 가장 선호도가 높은 곳은 당연히 시온 산이 있는 팔레스타인 땅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유대 국가 건설의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영국은 수에즈 운하의 안정적 운영, 오스만 터키 해체, 러시아 남하 저지, 중동 천연자원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당면 과제의 해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유대 국가 건설이 영국의 이익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설득했다. 이를 수용한 영국은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맡게 된 팔레스타인에 시온주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던 아랍의 하심가로 하여금 유대인 정착을 지지하도록 유도하였다. 1916년에서 1919년 사이에 진행된 맥마흔-후세인 서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발포어 선언, 파이잘-와이즈만 협정 등이 그러한 국제협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시온주의자들의 눈부신 활약에 비하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매우 산만하고 느리고 허약한 반응을 보였다. 팔레스타인의 지배자인 오스만 터키가 붕괴한 후 국제연맹이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권을 부여했을 때,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당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독립국가를 주도할 세력이나 기구를 꾸려내지 못했다. 주변의 아랍국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를 수수방관하거나 유대 시온주의자들과 타협했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형성의 국제적 조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자주적 생존권은 최근에서야 국제적 조명을 받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 진행된 지하드(자살테러)와 1980년 이후부터 발생한 인티파다(비무장봉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절망적 상황이 국제적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마치 의열단 활동과 삼일만세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증가한 사례와 유사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가 허용되었고, 2012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O)이 유엔 총회에서 국가에 준하는 ‘비회원국 옵서버 국가자격’(non-member observer state)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의 자주적 생존권 노력이 이번에는 영국이 아니라 초강대국인 미국에 의해 빈번히 봉쇄되고 있다.

 

ⓒ www.flickr.com/photos/10948116@N08/21901766021)

 

미국이 시온주의 이스라엘을 적극 보호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존재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자는 미국 내의 유대인 로비 세력을 중요한 요소로 손꼽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좀 다르다.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시온주의 운동이 미국 내에서 새로운 인종주의적 갈등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직전까지 미국은 그야말로 이스라엘에 인도주의적 지원만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6일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국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동맹국이 될 역량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 후에야 미국은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주는 세 가지 교훈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칙이다. 팔레스타인 땅의 지배를 둘러싼 시온주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경쟁에서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된 이유이다.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전쟁 과정을 보면 이 교훈의 중요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군사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치단결하여 ‘박물관에 게시된 대포를 떼어다 쓸 정도로’ 필사적인 투쟁을 벌였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부패하고 내분에 휩싸인 아랍연맹군에게 그들의 운명을 맡겼고,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나섰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체제의 차이가 국력의 차이를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팔레스타인 땅의 지배를 두고 경쟁하는 두 개의 체제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체제의 종교적 정당화, 지리적 연고권 강조, 외부세력 의존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양 체제는 체제의 민주성, 합리성, 개방성 등에서 차이가 크다. 예컨대 양 체제는 특정 종교를 체제의 정당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헤르츨이나 헤스, 카츠넬슨, 벤구리온, 메이어, 다얀 등 초기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이상적 민주주의를 꿈꾸는 사회주의자들로서 유대교 신앙은 그야말로 국가건설의 수단이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들은 험난한 독립 투쟁 과정에서 더욱더 강한 배타적 아랍민족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도 점차 유대교 근본주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으나 아직은 서구 민주주의 체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체제의 차이는 국내적 갈등의 조정, 서구 강대국들과의 동맹 결성, 국민적 지지, 군사적 효율성, 이데올로기적 유연성 등 제반 국력 분야에서 커다란 격차를 만들어 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교훈은 성공이 실패의 원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온주의 이스라엘은 짧은 시간 안에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점령했고 국가 수립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공에 도취하여 국내외적으로 점차 교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다. 초기의 실용주의적인 시오니즘에서 근본주의적 유대교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 운용에서 극우적 자본주의 체제 운용으로, 인종 차별의 심화와 경제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내외 갈등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모순적이지만, 박해받는 자에서 박해하는 자로, 디아스포라를 겪는 자에서 디아스포라를 만드는 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모순을 완화하려 하기보다는 극우적 레토릭으로 정당화하려 애쓰고 있다. 성공했다고 자만하는 바로 그 순간 이스라엘은 국가적 생존의 위기를 겪을지도 모른다.

사실 팔레스타인인들은 억세게 운이 나쁜 사람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처럼 인류 역사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복잡한 민족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유대인들의 고통스런 과거가 이들의 불의한 현재를 정당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유럽인들이 저지른 유대인 핍박의 보상을 팔레스타인인들이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유럽인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는 유럽 땅에서 유럽인들이 치르는 게 옳다. 왜 이 죄를 팔레스타인인들이 감당해야 하는가? 혹자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을 몰살하고 그 땅을 강점한 것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땅 점령은 역사적 명분이라도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한다. 만일 이처럼 불의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속히 돌이키는 게 좋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전능하신 신이 그 사람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1)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이 된 소년 :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알-아크사 인티파다’에서 이스라엘군 탱크에 맞서 단신으로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파리스 오데흐(Faris Odeh, 1985.12~2000.11). AP통신 사진기자가 촬영한 이 유명한 사진은 이스라엘 점령에 대한 팔레스타인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이 사진 촬영 열흘 뒤인 11월 9일, 오데흐는 목에 이스라엘군의 총탄을 맞고 16세의 나이로 숨졌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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