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공평하게 시험에 응시하고 시험 결과에 따라서 줄을 세워서 그 순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청년들이 원하는 공정일까. 이미 청년들은 그러한 줄 세우기 식의 공정, “출발점이 어떻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게임”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절망적인지를 체감하고 있다. (본문 중)

신하영(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기윤실 청년위원)

 

연일 공정 이슈가 뜨겁다.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최대 야당의 지도자가 된 정치인은 불공정에 실망한 대중을 향해 공정을 위해 할당제, 호혜적 조치 같은 힘들게 쌓아 올린 공존과 상생의 제도들을 철폐하자고 외친다. 그리고 이에 뜨겁게 열광하는 대중들이 있고, 그 중심에는 공정함이 간절한 청년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공정은 조금 이상하다. 지금까지 인권과 다양성,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수십 년 동안 투쟁하고 싸워 온 할당제, 소외계층 배려 제도가 모두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럴까.

최근의 공정과 관련한 말들이 쏟아지면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공정과 차별, 평등과 정의로움 등인데, 그 맥락과 함의가 많이 왜곡되는 지점이 있다. 차별은 정의로움의 반대말이 될 수 있지만, 과연 차별과 공정함은 반대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공정은 곧 정의로움일까? 지금의 청년들, 지도층의 ‘내로남불’ 식의 부정과 부패, 비리(특히 입시, 채용, 선발의 비리 등)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공정이라는 수단보다, 정의가 실현되는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정의로움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정과 균형의 장치들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고, 이를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청년들이 정의로움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상상하지 못하고, 도구이자 절차로서의 공정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이 공정은 대부분 공정한 결과보다는 공정한 시험, 공정한 선발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은,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하되 결과의 불평등을 조정하는 각종 장치를 제거하는 것이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정말 그럴까. 모두가 공평하게 시험에 응시하고 시험 결과에 따라서 줄을 세워서 그 순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청년들이 원하는 공정일까. 이미 청년들은 그러한 줄 세우기 식의 공정, “출발점이 어떻든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게임”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절망적인지를 체감하고 있다.

한국인, 특히 경쟁과 선발에 공기처럼 둘러싸인 청년들 사이에서 부상한 ‘수저론’이 그 증거다. 수저론이 무엇인가. 개인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것들 중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수저, 즉, 세습 지위가 가장 중요하다는 전근대적인 논리인데, 그 논리가 곧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은수저’(silver spoon)라는 말은, 근대 이전 유럽에서 귀족 아이가 태어나면 은수저를 선물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흙수저‘는 자수성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예전이라면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처럼 누구든 용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겠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도 개천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한탄하며, 자기비하적으로 만들어낸 신조어다. ‘금수저‘는 ‘은수저‘의 극대화된 표현이고, ‘흙수저‘의 반대말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공정은, 수저론으로 보면 이미 패색이 짙은 자신의 인생에 기회의 창을 열어줄 ‘정의로운’ 공정이어야 한다. 금수저와 은수저, 흙수저가 모두 함께 땅을 파고 나서, 파낸 땅의 깊이만큼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게임은, 땅을 파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공정해 보이겠지만 결과는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 더 나아가 그런 게임을 기획하는 의도부터가 불순한 것이다. 소위 ‘초특급 엘리트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역량보다는 정치인 입문 이전의 이력으로 더 주목을 받았던 현 야당의 대표는 자신이 얼마나 ‘공정하게’ 게임의 승자가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는 서울 목동에서 자랐습니다. 친구들 대부분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어요. 같은 학원에 다녔고, 똑같이 교육열이 대단했어요. 저를 포함해 중학생 아이들 700명이 등수를 다퉜어요. 좀 잔인한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그 시절의 공부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과학고에 진학했고, 졸업 후 미국 하버드대학에 합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었지요.1)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우리 시대 청년들을 절망케 하는 수저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발언의 화자는 어떤 색의 수저를 들고 있는 것일까? (참고로, 서울의 목동 아파트 평균 시세는 2021년 기준으로 17억 7천만 원이다.) 우리는 어쩌면 승자가 이야기하는 역사, 승자의 자기 보호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정의로움은 적어도 승자가 만들어 놓은 게임의 법칙에서 소외되는 이들을 낙오자로 낙인찍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조금 더 들어가서, 기독교인, 신앙이 있는 청년 입장에서는 작금의 공정 이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과연 공정한 분이셨을까? 지금 한국의 일부 청년들, 그리고 야당 대표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어서 공개 사과하고 사임하셔야 할” 지도자셨다. 예수님은 ‘노오력’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자. 성경은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라고 전한다(눅 10장). 그리고 마르다는 결국,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에피소드에서 이상하게도 마르다와 나를 동일시하곤 했는데, 마르다는 ‘노오력’을 하고 예수님을 잘 대접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적절하고 합당한 절차’를 거쳐서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참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나에게 예수님은, 내가 성장하며 세상의 원칙과 전략을 습득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모습투성이인 분이었다. 정말로 예수님은 마르다의 노력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분이셨을까? 예수님이 마르다의 노력을 몰랐다고 보긴 어렵다. 아마도 마르다의 함정은 “멋이 중헌지” 몰랐던 점일 것이다. 예수님은 (요즘 말로 하자면, “공정하게 하자구요, 쫌!”이라고 외치는) 마르다를 향해,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응답하셨다. 예수님은 방향이 잘못된 노력,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힘을 빼는 마르다가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몇 가지만, 아니면 한 가지만 챙겨도 되는데, 마르다는 그게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매우 억울할 것 같은 ‘하늘의 비밀’을 공유하자면, 구원과 축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가는’ 천국에는 심지어 믿는 순서대로 상이 예비된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자(마 20장). 믿는 자 사이에서 순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은혜가 그렇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의 노력은 선물과 상관이 없다. 체조를 엄청나게 열심히 연습하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고 해도, 그가 피아노 연주회를 먼저 열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실제로는 공평함과 거리가 먼, 시험 점수 처리가 투명하고, 점수라는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받는 공정함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좇는 복음의 원리는 공정 게임보다는 하나님의 진리, 하늘의 정의로움을 가르친다. 땅에서의 수저론과 극명히 대비되는 최후의 정의로움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늘의 정의로움을 바라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고? 그렇다고 지금 이야기되는 정의로움이 사라진 공정, 무분별한 경쟁만 강조하는 것이 과연 지금 청년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미래일까? 오히려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정의로운 생활 공간일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공정함을 외치는 사람들은 소위 은수저, 금수저들이 아니다.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의 말도 안 되는 주거 환경으로 내몰리고, ‘삼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 ‘오포 세대’(인간관계, 내 집 마련까지도 포기)로서 무언가를 자꾸 포기해야만 하는 청년들에게는 공정함보다는 정의로움이 진정한 희망이 될 것이다.

 


1) “이준석의 능력주의와 이탄희의 공정경쟁” 한겨레신문, 202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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