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자신의 방침과 전략에 따라 여순사건의 실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피해 규모와 가해자에 대한 정보를 조작했다. 그 결과,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고 무고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도 심화하였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자그마치 70여 년이다. 따라서 이번에 통과된 특별법을 통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규명되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한이 풀리길 기대한다. (본문 중)
배덕만(기독연구원 느헤미야 교회사 교수)
여순사건 특별법 통과
2021년 6월 29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특별법에 따르면, 여순사건은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가 제주 4·3 진압을 거부한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를 해제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을 비롯해 전남·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충돌, 이의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다수가 희생당한 사건”이다. 지난 73년간,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왜곡·은폐된 가운데 희생자와 유족들은 억울한 누명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특별법이 통과됨으로써 이 사건의 진상 규명, 명예 회복, 피해 보상 등이 가능해졌으니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법을 토대로, 국가는 국무총리 소속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하고, 진상 규명과 진상 조사 보고서 작성, 희생자와 유족의 심사·결정, 사료관·묘역·위령탑 건립, 집단 학살지와 암매장지 발굴·조사, 의료·생활 지원금 지급 결정 등을 추진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임기 2년의 위원 15명(위원장: 총리, 부위원장: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구성되며, 조사 개시일부터 2년 동안 진상 규명 조사와 분석 등을 마치고, 이후 6개월 내에 진상조사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조사 기간이 3년에서 2년으로 축소되고, 희생자의 범위를 사망자, 행방 불명자, 후유 장애자, 수형자 등 피해 당사자로 한정하여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유족을 제외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여순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첫 공식 입장이었던 그의 발언이 『동아일보』(1948.10.22.)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전남 여수에는 국군 제14연대가 주둔하는데, 돌연 20일 오전 2시경 공산 계열의 오랫동안의 책동과 음모로써 반란이 발생하였다. 처음엔 약 40명가량의 사병이 무기 창고를 점령하고 있어서 교묘한 선동과 위협으로 일부 병사들을 선동시켜 가지고 밤중에 다른 병사들을 무기로 위협하고 장교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이처럼, 당시의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서 발생한 군인들의 봉기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또한 이 반란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과 음모의 결과이며, 반란의 주체는 40여 명의 군인이었고, 이들이 다수의 군인들을 살해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인식하에, 정부는 혁명의용군 사건과 여순사건을 연결 지어 오동기, 최능진 등을 반란의 수괴로 지목했으며, 얼마 후에는 여수여중 교장 송욱을, 최종적으로 지창수 중사를 반란군 총지휘자로 수정·발표했다. 하지만 이 모든 발표는 부정확하거나 조작된, 혹은 근거 없는 가짜뉴스였다.
사실, 여순사건은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민족과 군인의 사명’이란 측면에서 거부했던 일군의 군인들의 항명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 봉기를 주도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의 핵심내용이 『동아일보』(1948년 11월 30일)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를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국 즉시 철퇴
이들은 하루 만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며, 며칠 만에 광양,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14연대 소속 군인들 2000여 명과 여수와 순천의 좌익 세력들, 그리고 학생을 포함한 다수의 민중이 봉기군에 적극 호응했고, 이 지역에서 지방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친일 경찰과 우익 세력을 처단했다. 하지만 여수와 순천이 봉기군의 수중에 놓였던 기간은 각각 8일과 3일에 불과하며, 진압군에게 패한 봉기군은 이후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이동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봉기군이 장악했던 지역을 진압군이 재탈환한 이후에 발생했다. 기본적으로, 진압 작전은 미임시군사고문단원과 만주군 출신 장교들(김백일, 백선엽 등)이 주도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봉기군을 신속히 진압할 수 있었으며,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을 경험했던 진압군 장교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그리고 재탈환한 지역에서 진압군, 경찰, 우익 청년단원, 지방 우익 세력 등이 협력자 색출 작업에 나섰다. 이때, 봉기군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민간인들이 진압군에 의해 억울하고 잔혹하게 희생되었다.1)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자신의 방침과 전략에 따라 여순사건의 실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피해 규모와 가해자에 대한 정보를 조작했다. 그 결과,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고 무고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도 심화하였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자그마치 70여 년이다. 따라서 이번에 통과된 특별법을 통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이 규명되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한이 풀리길 기대한다.
여순사건의 진상규명과 더불어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억압과 우익 세력의 방해 속에도, 연구자 및 관련자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으로, 은폐·왜곡되었던 여순사건의 역사적 실체가 조금씩 드러났고, 마침내 특별법까지 제정되었다. 연구와 조사를 통해 밝혀졌듯이,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따라서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우리가 살피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먼저, 여순사건은 해방 공간에서 발생한 정치·경제적 상황을 배경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사건은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발생한 복잡하고 극단적인 갈등들, 즉 친일세력의 부활, 좌우 세력의 주도권 다툼, 인민위원회와 미군정의 대립, 이승만의 권력 장악,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미군정의 곡물 정책 실패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여순사건을 일부 남로당 소속 군인의 반란으로 규정·한정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사건을 ‘반란’이 아닌, ‘봉기’나 ‘항쟁’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여순사건은 1948년-1955년에 벌어진 과거의 사건으로 끝난 게 아니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를 반공 사회로 재구성함으로써,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즉, 이 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는 군대의 좌익을 제거하는 숙군 사업을 진행했고, 학생들을 반공의 전위대로 육성하기 위해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반정부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으며, 좌익 경력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보도연맹을 창설하여 3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서북청년단을 포함한 우익 청년 단체 회원들을 대거 군대와 경찰에 진출시켜, 핵심적 반공 세력으로 정착하게 했다. 이런 조치들은 단지 이승만 개인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반세기 이상 친일 반공 세력이 득세하여 이 땅에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셋째, 여순사건과 개신교의 관계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때문에 한국교회는 여순사건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왔다.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며, 한국교회와 공산주의의 불편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당시에 여수와 순천에서 좌우의 갈등은 극심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선 폭력을 동반한 충돌이 빈번했고, 기독교계 학생들은 대체로 반공적·극우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또한,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군이 종교적인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차별적으로 처형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진압군이 목사들과 교인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여순사건과 개신교의 관계도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재평가해야 한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면, 해방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해방과 독립보다 이념과 권력이 더 중요해지면서, 동족을 향해 서슴없이 총칼을 휘두르며 광란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진실은 왜곡되고 역사는 뒤틀렸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상생과 화해의 매개자 대신, 보복과 심판의 십자군 역할을 한 것 같아 참담하다. 부디, 여순사건 특별법 통과를 계기로, 한국교회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가 여순사건을 반성적으로 재조명하여,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발전적 미래를 모색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1) 주철희의 조사에 따르면, 여수, 순천, 광양, 고흥, 보성, 구례, 곡성 지역의 희생자 중 가해자가 확인된 피해자는 총 1,963명이며, 이들 중 반란군, 빨치산, 지방 좌익, 인민군에 의한 피해자는 214명(10.9%)이고, 군과 경찰에 의한 피해자는 1,666명(84.9%)이다.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 여순항쟁의 역사』(서울: 흐름, 2017),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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