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립’(Talib)이라는 말은 ‘학생’ 혹은 ‘구도자’라는 뜻이고, 복수형 어미인 ‘안’을 붙인 ‘탈레반’은 ‘학생들’ 혹은 ‘구도자들’이란 뜻이다. 주로 오랜 전쟁으로 고아가 되어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탈레반의 주된 구성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지도자는 물라 오마르였는데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다. (본문 중)

권성찬(선교사, GMF 대표)

 

혼란의 시작과 소련의 침공

 

1970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이 근대화되어 현대식 교육이 진행되었고, 기독교 사역자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안에는 약 50여 개의 언어가 있고 성경 번역과 문해 교육이 필요한 여러 종족들이 있다. 그러나 1973년에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쟁이 시작된다. 당시 자히르 샤 왕이 신병 치료차 이탈리아에 가 있었는데 총리를 맡고 있던 왕의 사촌 다우드가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을 세우겠다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독립 전에 영국과 갈등이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소련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여러 젊은이들이 소련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다 보니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았다. 다우드의 공화정은 결국 사회주의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하지만 사회주의 세력과 손잡고 다우드 정권을 물리친 전통 이슬람 세력은 다라키 대통령이 소련과 너무 친밀해지는 것에 반대하며 갈등을 일으켰다. 소련은 늘 부동항을 찾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고,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이슬람 세력이 득세하면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이슬람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하여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이 침략은 미국을 중심으로 많은 서방국가들이 1980년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원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도 그 해의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의 침공은 당시 선교의 주요 세력인 서구 선교사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낳았다. 그 이후로는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회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기독교 구호 기관들이 세워져 기독교 사역자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합류하여 조심스럽게 사역을 이어갔다.

 

소련과 맞선 무자헤딘

 

소련이 침공하자 수많은 이슬람 전사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을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들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무자헤딘은 주로 종족별, 정파별, 지역별로 일어났다. 소련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각 무자헤딘 그룹의 리더들은 대부분 주변 국가로 망명하여 그룹을 지도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가들이 만주 등으로 옮겨간 것과 비슷하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그 나라 안에서 끝까지 싸운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soud) 장군이다. 마수드 장군의 고향은 ‘다섯 마리의 사자’라는 이름을 가진 ‘판지시르’(Panjsher, 현지인들은 ‘빠인쉐르’라고 발음한다) 지역인데 그는 그 지역을 중심으로 소련에 끝까지 저항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탈레반의 등장

 

많은 대가를 치르고 소련은 결국 1989년에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하였고 불과 2년 뒤인 1991년에 붕괴하기에 이른다. 소련이 물러가자 무자헤딘 그룹들 간에 권력을 잡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전투가 수도 카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카불은 그야말로 황폐한 도시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구가 2,000만 명일 때 지뢰가 1,000만 개가 묻혀 있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혼란의 시대가 되었다. 우리 가정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나라 안에 경제적 생산이 없다 보니 각 무자헤딘 그룹들이 지역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권을 차지하고 국민들을 못살게 하였다. 심지어 아이를 납치해서 돈을 빼앗기도 했다. 제대로 된 정권도 아니었지만 정권의 말기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탈레반이 급속도로 나라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무자헤딘 그룹의 부패였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구호, 개발, 의료 사역 등을 통해 사람들을 도왔다.

‘탈립’(Talib)이라는 말은 ‘학생’ 혹은 ‘구도자’라는 뜻이고, 복수형 어미인 ‘안’을 붙인 ‘탈레반’은 ‘학생들’ 혹은 ‘구도자들’이란 뜻이다. 주로 오랜 전쟁으로 고아가 되어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탈레반의 주된 구성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지도자는 물라 오마르였는데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 탈레반이 정복한 수도 카불에는 이인자를 보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본거지인 칸다하르에 남아 실제적인 통치를 했다. 1996년 9월 카불이 탈레반에게 함락되었다. 그때도 마수드 장군은 고향 판지시르를 지키고 있었다. 탈레반이 정권을 잡자 나라의 보안은 이전보다 좋아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엄격한 율법을 강요받는 어려운 생활이 되었다. 여학교는 폐쇄되었고, 교육을 장려하지 않으니 남학교도 크게 기능을 하지 못했다. 기도 시간이 되면 길에서 채찍으로 때리며 모스크에 가도록 했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을 길러야 했으며 이를 어기면 탈레반 요원들이 길에서 붙잡아 가곤 했다.

우리는 탈레반 정권하에서 구호와 개발 사역은 물론 교육 사역도 진행하였다. 사역을 위해 종족이 있는 산지까지 가는 길에 여러 개의 탈레반 검문소가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한번은 탈레반 서열 3위쯤 되는 도지사를 만나 사역을 설명하고 어려움을 이야기했더니 간단한 증명서를 하나 써 주었다. 이후로는 검문소마다 그것을 보여주며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기간은 아주 조심스럽게 사역을 하던 기간이라 기독교 구호 기관을 중심으로 교육, 보건, 의료, 장애우, 임업, 지역사회 개발 등의 사역을 통해 현지인들을 섬겼다.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역에서 삶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주 종족인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는 소수 민족은 하자라족이다. 하자라족은 파슈툰족에 의해 무시당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징기즈칸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남게 된 몽골족의 후손이며 하자라족은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카불에서 가까운 바미안에 많이 살고 있지만 카불에도 많이 살고 있다. 카불에는 하자라족이 운영하는 식당들이 있는데 가끔 카불에 가면 그런 식당에 가서 ‘만투’라는 음식을 먹곤 했다. 왕만두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위에 요구르트를 뿌려주는 음식이다. 언젠가 다시 ‘만투’를 먹을 수 있는 좋은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탈레반 시절의 파슈툰족과 하자라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최초로 쓴 영어 소설인 할레드 후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가 있다. 후세이니는 탈레반 통치 시절에 아프가니스탄에 살지도 않았는데, 그 기간을 온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산 나보다 훨씬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때의 모습을 그렸다.

 

 

9‧11과 아프가니스탄의 봄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머물 당시에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살고 있던 작은 도시 변두리에 그들의 캠프가 있었다. 알카에다 요원들은 우리가 사는 읍내에 장을 보러 와서는 우리 단체의 사역자들, 특히 서양 사역자들을 위협하곤 했다. 그럴 즈음인 2001년 7월에 우리 가정은 국내 사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그런데 8월부터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한 기독교 구호 기관 소속 단기 사역자들이 ‘예수 영화’를 카불에서 상영하다 탈레반에게 발각되어 잡혀 들어갔다. 여러 명이 감금되었는데 특히 미국과 호주에서 온 두 여성 사역자가 핵심 인물로서 형식적인 재판 과정 중에 있었고, 미국과 호주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가 예상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만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사역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는 위기였다.

9월에는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마수드 장군이 버티는 판지시르를 정복할 수 없자 알카에다가 나섰다. 인터뷰로 가장하고 폭탄이 설치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들어온 요원이 자폭함으로써 마수드 장군을 살해하였다. 2001년 9월 9이었다. 탈레반이 나라 전체를 장악할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만일 그때 탈레반의 지배가 확립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탈레반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청년 세대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틀 뒤 알카에다의 9‧11 테러가 발생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했고 알카에다를 지원했던 탈레반은 정권을 상실했다.1)

 

20년 후,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기도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온 지 수년 후에 카불과 내가 사역했던 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9‧11 이후 새롭게 들어온 기독교 사역자들의 사역 형태는 탈레반 정권 아래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방식이었다. 이후 한국교회는 안타까운 일을 경험했고,2)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도 한국 여권으로는 입국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사역자들이 들어가 많은 씨앗을 뿌렸다. 최숙희 선교사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한동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뒤늦게 성경번역선교회(GBT)에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나에게 사역지를 추천해 달라고 해서 아프가니스탄을 추천했더니 정말 그곳으로 갔다. 몇 년이 지나고 카불을 방문했을 때 최 선교사가 가르치고 있던 카불교육대학 강의실을 방문했다. 탈레반 정권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강의실에 아프가니스탄 남녀 대학생들이 함께 앉아 있고 최 선교사가 그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런 기적을 내 생애에 볼 줄은 몰랐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최 선교사는 암을 얻어 몇 년의 투병 끝에 먼저 소천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을 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에 떠오르는 분이다. 최 선교사가 투병 중에 남긴 말이 기억난다. 여성 사역자로 혼자 살면서 늘 ‘나다움’을 가치로 여기고 씩씩하게 살아야만 했는데,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의 몸을, 심지어 남에게 맡기기 싫은 일까지도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나다움’이 아닌 ‘나됨’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의 나다운 것’이 아니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는 말씀을 새롭게 깨닫는다고 했다.

이런 수고와 헌신에 의해 지난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은 변해갔고, 특히 카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있었다. 탈레반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가진 잠재력은 놀랍다. 이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당연히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카불 외 지역은 좀 더디겠지만, 모든 것이 응집된 카불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가능했다. 이제 안타깝게도 다시 위기가 왔다. 1979년 소련 침공 때 그러했고, 1996년 탈레반의 점령 때 그러했고, 2001년 탈레반이 잠시 철수했을 때도 그러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을 위한 사역에 잠시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때에도 그러셨듯이 계속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분의 일들을 진행하실 것이다.

이번 사태로 흩어진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새로운 환경을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일부가 온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이 상황을 차분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후에도 다른 형식(예를 들어 난민, 불법체류자 등)으로 사람들이 더 들어올 수 있다. 이들 모두를 공평하게 섬겨야 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 중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계속 기도가 필요하다. 특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상황이다. 탈레반이 1996년과 같지 않기를 기도한다. 한번 물러갔던 경험이 있으니 이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특히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는 율법 학자이다. 그가 율법을 유연하게 해석한다면 사회에 바로 적용될 수 있다. 이제 차분히 기도로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할 때이다. 윌리엄 밀러가 그 땅에서 가져온 풀들이 수많은 사람들로 변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땅에 자신의 삶을 바친 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특별히 지난 20년간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바친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역자와 현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깊이 고개를 숙인다. 샬롬.

 


1) 위에서 사형 위기에 처했던 사역자들은 탈레반에 의해 끌려다니다가 11월에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편집자 주).

2)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 선교 활동을 하던 개신교인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결국 두 명이 살해당한 사건(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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