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볼 때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 미덕은 결론 자체보다도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 그 근거가 된 종교인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와 그에 대한 분석에 있다. 길키는 공동체에 윤리적인 사람이 필요하고 삶에서 도덕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설 길을 종교에서 찾고자 한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있던 연합군 측 국적의 시민들이 일본에 의해 모두 산둥 수용소로 집단 수용된다. 그곳은 전쟁 포로의 수용소가 아니다. 안네 프랑크 같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 같은 ‘죽음의 수용소’도 아니다. 강제 노동도 없다. 수용자들을 한 구역에 몰아넣고 최소한의 부식을 제공하고 대체로 알아서 살게 할 뿐이다.

사업가, 선교사, 교사, 의사 등 각종 직업의 사람들이 부실한 시설에서 일본 측에서 제공하는 부족한 물자를 가지고 자체 노동력과 기술만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마치 문명을 새로 만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이런 독특한 상황이기에 저자는 이것을 하나의 실험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수용자들만의 작은 문명을 건설할 만큼은 안전하고 편안했으나 생존의 경계를 오갈 정도로 엄청난 억압과 긴장을 견디며 살아야 했기에 ‘인간 사회의 근본적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생존에 절실한 직업이나 일의 가치가 더없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사, 간호사, 제빵사, 목수 등의 일이 그렇다. 당장의 생존과 직결된 ‘실제적인’ 문제의 중요성과 의미가 실감 나게 와 닿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인 랭던 길키는 종교가 현실적 삶을 위해 하는 역할에 의문을 품게 된다. “종교에 ‘세속적인’ 기능이 있을까? 즉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종교는 어떤 쓸모가 있을까? 기술과 용기, 이상주의를 수반하는 세속주의가 종교 없이도 인간의 모든 삶을 다 창출해 낼 수 있는 마당에, 종교는 무용지물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여러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그중 대표적인 한 사건을 살펴보자.

 

적십자사 구호물자

 

수용소에 들어온 초기만 해도 바깥에서 먹던 음식에 비해서 거칠기는 했지만 음식의 양은 충분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배급은 부족해지고 나중에는 늘 배고픈 상태로 지내야 했다. 이런 힘겨운 시기에 미국 적십자사에서 미국인 수용자들에게 보낸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200명의 미국인들은 다들 자신들의 구호물자를 다른 나라 사람들과 기분 좋게 나누었다.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구호물자가 다 떨어지고 다시 배고픈 상태로 지내야 하던 어느 날, 1450명의 수용소 인원 모두에게 하나씩 돌리고도 100개나 남는 엄청난 양의 미국 적십자사 구호물자가 새로 도착한다. 일본인 수용소 소장은 모두에게 구호물자를 하나씩 돌리고 남는 100개는 미국인들이 나눠 가지라고 지시한다. 수용소에는 기대와 설렘이 넘친다.

그러나 미국인들 중 일부가 수용소장을 찾아가 미국 적십자사가 보낸 구호 물품이니까 미국인들 소유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호 물품을 받은 다음에 나눠 줄지 말지는 자기들이 정할 테니까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미국인들이 7개 반씩 받겠다는 거였다.

수용소장은 당황하여 일본 정부에 문의하고,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는 며칠간 수용소 마당에 쌓여 있게 된다. 길키가 여러 미국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협력하며 지내던 수용소에 반목과 미움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 긴장과 갈등이 얼마나 컸던지 수용소를 지키는 일본인 경비들의 총을 수용자들이 다행스럽게 느낄 정도였다. 결국 일본 정부에서는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남는 100개는 다른 수용소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배급만으로도 어쨌든 살아왔는데, 엄청난 양의 구호물자가 도착하자 오히려 불안해진 것이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이 불확실한 상황을 대비하자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7개 반을 독차지해도 부족할 게 뻔했다. 아무리 가져도 불안한, 오히려 가질수록 더 불안해하는 인간의 모습과 이기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원죄 교리가 드러낸 딜레마

 

구호물자 분배를 둘러싼 갈등을 포함한 수많은 갈등 사례를 겪으며 길키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우리 내면의 어떤 힘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 우리는 자발적인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자기 사랑에 붙들려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키는 자신이 발견한 인간의 모습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이기심과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원죄 교리를 재발견한 데 이어 길키는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기술과 법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과 청렴함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뒤로 갈수록 물자가 부족해짐에 따라 연료나 음식 같은 공동 물품들을 훔쳐 가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공동체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뿐 아니라 이웃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 인간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웃에 책임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런 딜레마를 풀기 위해 길키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성품이 변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자아가 자신의 건강과 안전뿐 아니라 이웃과의 창조적인 관계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중심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딜레마의 해답도 따라올 거라고 본 것이다. 과연 인간은 이 새로운 중심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은 모두 종교적

 

길키가 찾은 답을 말하려면 종교의 가치와 유용성을 묻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길키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성 또는 비도덕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심오한 영적 중심에서 나온다.” 그는 폴 틸리히를 인용해 이런 가장 깊은 중심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은 이 영적 중심을 통해 삶의 안전성과 의미를 얻고, 그것에다 궁극적 사랑과 헌신을 바친다.” 이런 인간의 궁극적 관심과 경배는 곧 종교이고,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종교는 무용지물이 아닐까?’, ‘어떤 실제적인 기능이 있을까?’ 하는 질문은 인간이 가진 종교적 성격을 간과한 질문이 된다.

흔히 말하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를 갖고 있다. 문제는 결국,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어떤 ’종교‘를 따르는가가 된다. “잘못된 대상(가족, 자신의 그룹, 민족 등)을 경배할 때 인간의 헌신은 수많은 불의와 교만, 이기심의 뿌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종교성’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궁극적인 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보잘것없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이기심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복지를 잊고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복지가 중요해진다. 이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길키가 결론에 이른 과정을 건너뛰고 위의 결론에만 주목한다면 기독교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승리주의적’ 선언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례, 즉, 길키가 말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기독교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모습에서 그런 이상적인 종교인과 다른 면모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길키는 오히려 이렇게 못 박는다. “누군가가 종교를 통해 자신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미덕을 얻었다고 너무 깊이 확신하게 된다면, 그가 자신의 안위를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에서 찾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시점부터 그의 인생은 기독교의 옷으로 갈아입고도 계속해서 자기 숭배의 죄를 재연하는 것에 불과해진다.”

 

이기심의 굴레를 벗을 수 있는 가능성

 

내가 볼 때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 미덕은 결론 자체보다도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 그 근거가 된 종교인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와 그에 대한 분석에 있다. 길키는 공동체에 윤리적인 사람이 필요하고 삶에서 도덕적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설 길을 종교에서 찾고자 한다. 그것을 그는 이런 질문으로 표현했다. ‘정말로 기독교인은 선하고, 종교적 경건은 공동체의 미덕에 필수적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가?’ 그리고 여러 종교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꼼꼼히 살펴본다.

길키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종교인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이다. 그들에 대한 길키의 평가는 양면적이다. 보수주의 선교사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결점은 ‘율법주의’였다. 그가 말하는 율법주의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엄격하게 규정된 (대개는 사소한) ‘행동규범’으로 판단하려는 태도”다. 그들에게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일은 흡연, 도박, 음주, 욕설, 카드놀이, 춤추기, 영화 관람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수용소에서도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을 ‘담배를 피우고 거친 말을 한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헐뜯는 교만에 빠졌다. 그들은 “현실 속 사람들의 진짜 삶을 벗어난 곳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 중에서 교만이나 율법주의에 매이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교파나 개인적인 신앙 규범은 달라도 하나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건한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이들은 “자신의 행동 규범을 타인의 삶에 들이대려 하지 않았으며, 타인이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그들을 도우려 했다.”

길키는 수용소에서 기독교 세계를 대변하는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모습과 실망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본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에 귀의한다고 해서, 선교사처럼 자신의 삶을 바쳐 종교에 헌신한다 해도,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길키가 내리는 결론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망을 담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궁극적인 전투지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 종교는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투 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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