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나 민족 안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선교사 파송과 같은 외부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부인 스스로 자치, 자립, 자전의 정신을 지닌 교회,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학화가 가능한 교회를 세우게 하는 일이다. (본문 중)

한철호(선교사, 미션파트너스 대표)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미군 철수와 이어진 탈레반의 재집권 과정을 보면서 선교와 관련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국제 정치와 종교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얽히고설켜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에 대해서는 쉽게 어떤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게 된 현 탈레반 정권이 빨리 안정을 찾고 아프가니스탄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국제 사회와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길을 찾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탈레반 정권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개혁을 모토로 시작된 세력이므로, 역사적으로 계속된 서방 세계와의 대립 구도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현재 탈레반 정권이 국가 재건과 정권 유지를 위해 서구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 유화 정책을 발표하지만, 실행 여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탈레반 정권은 국내적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실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종족인 파슈툰족 중심의 세력이다. 따라서 다른 수많은 부족과의 갈등이 내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공존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상적으로는 같은 무슬림 근본주의 방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향점에서 차이가 있는 IS나 알카에다와의 관계에도 풀어가야 할 과제가 많다. 무슬림 근본주의 운동의 부활을 위해 알카에다는 이를 방해하는 서방 세력과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고, IS는 무슬림 국가 중에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세력을 진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안에서의 무슬림 근본주의 정권 수립에 주된 관심이 있다.

이런 복잡한 문제들 가운데, 미국은 9· 11 사태를 일으킨 빈 라덴을 체포하기 위한 명분으로 1991년 구소련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던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고 친서방 정권을 세우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2001년 미국이 탈레반을 몰아낸 이후 지난 20년 동안 많은 돈을 투입하면서도 제대로 된 자치 정부를 세우지 못한 주원인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정권의 무능함이었다. 이런 일들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도 그런 사례다. 결국 건강한 민족 세력에 의한 자주적 정권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과 외부 지원이 있더라도 건강한 독립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다시 확인됐다.

이런 교훈은 선교의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외부에서 아무리 많은 선교 자원을 제공한다고 해도 건강한 내부 기독교인에 의해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으면, 외부 선교사로부터의 지원은 거의 무의미하다. 선교란 본질적으로 특정 문화 집단 안에 토착적이며 스스로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생적인 교회를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선교에서 건강한 내부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지게 돕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 나라나 민족 안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 선교사 파송과 같은 외부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부인 스스로 자치, 자립, 자전의 정신을 지닌 교회,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학화가 가능한 교회를 세우게 하는 일이다.1)

자치, 자립, 자전의 교회 개척 원리가 가장 잘 적용된 성공 사례가 과거 한국 교회의 선교였다. 한국에 온 초창기 서구 선교사들은 자치, 자립, 자전의 원리에 따라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지 100여 년 만에 외국 선교사들이 대부분 철수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스스로 한민족의 복음화를 이루었다. 한 선교학자는 선교사의 목표는 ‘선교사의 안락사다’라고 말했다. 즉, 선교의 목표는 교회가 없는 곳에 그들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기에, 스스로 생존하고 배가할 수 있는 교회가 만들어지면 선교사는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선교는 아주 성공적인 예다. 물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가 자신학화의 길로 가기까지 돕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아무튼, 이렇게 자립 선교에 의해 성장한 한국 교회에서 파송된 한국 선교사들이 정작 선교지에 가서는 자립 교회보다는 선교사에게 심각하게 의존하는 교회를 세우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 선교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일반적으로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에, 일방적이고 독단적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많이 있다. 선교지 교회를 통제하고 본인이 원하는 방식과 한국 교회의 스타일을 강조한다. 또한, 선교사들이 서로 연합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많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갈 때, 보통 교회가 없는 나라에 교회를 세우러 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를 교회 개척 사역(Church Planting)이라고 한다. 선교사가 교회를 세우고 첫 담임 목사가 되어서 현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현지 리더를 세워 장차 교회를 물려주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제 교회를 세우는 일은 선교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현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해야 한다. 선교사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심는(Gospel Planting) 사역자로 존재해야 한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현지인이 첫 담임 목사가 되어야 장차 그들 스스로 배가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외부인 선교사가 선교지 교회의 첫 담임 목사가 되면, 그 교회는 선교사의 교회가 된다. 그러면 현지 내부인이 주도하는 그들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물론 한국 선교 초기에도 선교사가 첫 담임 목사가 된 경우가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한국 교회는 한국 교회 리더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운영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한국 교회 선교는 입구 전략, 즉,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가에 주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여전히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지인에 의한 건강한 자립 교회가 세워지도록 돕고, 교회가 세워지면 선교사는 최대한 빨리 철수하는 출구 전략이다. 이번 코로나19 초기에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돌아오지 못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모든 교통수단이 단절되어 철수할 수 없었던 경우다. 또 다른 경우는, 선교사가 갑자기 철수하면 진행하던 모든 사역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지를 지킨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선교사가 철수하면 선교지의 모든 사역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자립 교회를 세우는 방식으로 선교하지 않은 결과이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지난 짧은 1~2년 사이에도 선교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앞으로 더 큰 변화가 오게 될 것이다. 세계 상황과 선교지 상황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가장 큰 흐름은 탈세계화 현상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이 무분별한 세계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와, 세상이 너무 가까워지고 서로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세계화 현상이 급속히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국가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외부 세력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선교사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슬람권을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시아, 중국, 인도 등 주요 선교지에서 선교사 추방이 시작되었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어 선교 최전방 지역에 선교사 접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한편, 탈세계화 현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역화의 강화로도 볼 수 있다. 이제까지 무분별한 세계화(Global)에 치우쳤던 상황에서 지역화(Local)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세계화와 지역화가 균형을 이룬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화(Glocal) 시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런 흐름이 선교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으로는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역할보다 내부인의 리더십과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선교는 내부인들을 잘 세우고 그들이 스스로 지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잘 구비시켜주는 일이 중심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앞으로 선교 계획을 수립할 때 이 점을 잘 고려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교회의 엄청난 성장이 한국 선교를 이끌었고, 그 관성에 따라 한국 교회 선교의 원리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반추 없이 선교지에 더 많은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중점 선교 전략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 교회는 더는 성장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선교에 투입할 자원과 인력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이미 2016년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파송되는 선교사의 수가 더는 증가하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선교도 이제까지 성장 위주의 입구 전략, 즉,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으로부터, 이후로는 선교지의 내부자를 효율적으로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립하고 배가하는 토착적 교회를 세우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단지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방식이 부딪히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정작 선교가 필요한 국가들이 더는 선교사 비자를 주지 않는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 불법적인 방법으로 신분을 속인 선교사를 대거 보내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진리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는 것은 언행일치라는 성경적 가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선교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다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작 선교 자체를 훼손한다.

게다가 과거 서구 열강의 지배 아래에 있던 식민지국에서 서구 선교사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선교하던 시절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종교를 전파하는 외부 선교사에게 비자를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예를 들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중국으로 간 영국 선교사가 비자 문제로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단지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이라는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선교하는 것이 힘들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영국이 중국에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사 비자를 발행하지 않는 중국 정부가 불법적인 선교사의 입국을 거부하는 것에 대하여 영국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선교사들이 갈 수 있는 선교지는 더욱더 좁아지고 있다. 세계는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국경을 더욱 개방하지만, 선교를 위해서는 국경을 닫고 있다.

대안은 삶 속에서 복음의 진리와 가치를 드러냄으로써 복음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없이 이동하고 직업과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는 보통의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missionary)보다는 선교인(missioner)으로서 선교적 삶을 살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18세기 식민지 팽창과 함께 일어난 서구 교회의 선교 운동의 주 실행자였던 선교사라는 정체성은, 이제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새로운 선교의 주 실행자는 선발된 몇몇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전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참모습이다.

 


1) ‘자전’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것, ‘자신학화’는 선교지의 교회가 스스로 신학적 사유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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