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통해 미국 교회가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눈에 띄었다. 사람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들도 우리도 모두 무지하고, 주저하며, 꺼린다. 반면 시스템이 달랐다. 한번 폭로되면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과 법적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따른다.(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듣기 어려운 이야기

 

여성 문제에 있어 나 자신을 꽤 앞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견해를 즐겨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과 같지 않다. 지난 10여 년 사이 우리 사회에는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이 크게 확장되었고, 이전의 내 생각도 재고해 보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불평등에 아파하고 무식한 성폭력에 신음하는 여성들을 위해 높였던 내 목소리는 기득권자의 지위를 누린 한 남성의 동정 정도로 여겨졌다. 여성이 아니면서 여성의 고통을 아는 척한다는 날 선 비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의 서평 의뢰를 수락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편치는 않았다.

 

영화 <도가니>를 응원하고 지지했지만 정작 나는 이 영화 보기를 거부했다. 어린 소녀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겪는 스토리 자체가 소름이 끼치도록 싫어서 이런 주제를 담은 작품은 어떤 영화든 거의 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알기를 거부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나를 향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질책했다. “악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행동하지 않음 가운데 거한다. 그들은 이런 자들이다.…정의를 추구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를 추구할 때의 수고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p. 121).

 

하기 어려운 말

 

책 표지 안쪽에 있는 저자 소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펼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저자 루스 에버하트는 두 차례 성폭력을 당했다. 한번은 보수적인 기독교 대학의 여대생이었을 때, 총을 들이댄 강도로부터였다. 그 고통을 감당하고자 신학을 수학한 후 목회자가 되어 첫 교회에 부임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로부터 두 번째 상처를 입는다. 표지 글만으로도 내 마음은 구겨져 버렸다.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히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끔찍한 경험은 성스러운 소명이 되었다. “성폭력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인생의 수년을 보내게 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다른 많은 고통스러운 주제가 그렇듯 이 주제가 나를 택했다”(p. 26). 아내의 음란으로 고통받았던 호세아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음란이 사역 주제였던 것과 같다. 마치 루스 에버하트는 예언자 같았다. “이 주제에 관해서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문화의 변화이며, 이는 침묵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p. 161).

 

서로 나누어야 할 책임

 

“기독교한국침례회가 9월 16일 대전 디딤돌교회에서 제111회 총회를 열고, 그루밍 성폭력을 저지른 춘천 D교회 S목사와 대전 ㅂ교회 이 아무개 목사를 각각 제명·면직했다.…이번 안건과 관련해 몇몇 대의원이 발언권을 요청했지만, 박문수 총회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기침 총회, ‘그루밍 성폭력’ 춘천 D교회 S목사 ‘제명’…대전 ㅂ교회 이 목사 ‘면직’”, 「뉴스앤조이」, 2021년 9월 16일). 오랜만에 사이다 뉴스라며 내가 속한 교단의 목사들이 손뼉을 쳤다. 이 책의 서평을 맡고 얼마 후 있었던 일이다.

 

학교 교수로 있다 보니 종종 제보를 받는다. 제보는 아니어도 그런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학생들도 있다. 도움을 주고 싶으나, 경험상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해결되는 문제는 거의 없었다. 피해자는 자신들의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 일단 사건이 폭로되면 사람들은 고통보다는 누구인지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표지, ⓒIVP.

 

 

이 책을 통해 미국 교회가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눈에 띄었다. 사람은 별반 다름이 없다. 그들도 우리도 모두 무지하고, 주저하며, 꺼린다. 반면 시스템이 달랐다. 한번 폭로되면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과 법적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따른다. 그리고 성추행 사건이 벌어진 교회가 큰 법적 책임을 지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보통 한국 교회에서는 개인 간의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던가? 그러다 보니 교회가 책임감을 느끼고 교회 안 성폭력 문제를 관리하는 데 소홀했다.

 

이 책에 기록된 어느 사건을 보면, 법원의 명령에 따라 교회는 상담 기금을 조성했고 피해자에게 향후 45년간 혜택을 받도록 보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들(부모와 형제)에게도 10년간 상담받을 수 있도록 기금을 조성해야 했다(p. 224). 이는 교회의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 법원의 명령이었다. 사실 이런 조치는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들 최소한의 신앙적 신의가 무엇인지는 잘 전달한 듯싶다.

 

루스 에버하트의 힘

 

그녀는 자신과 다른 피해자들의 성폭력 경험을 진술하며 그 사이사이에 다말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복음서와 시편 등 여러 성서 본문을 해설한다. 서로가 서로를 조명하는 방식이다. 저자 자신이 성서를 주해하는 목회자이긴 하지만, 전적인 동의를 얻기 어려운 해석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성서 본문은 그 해석을 향해 매우 다원적으로 열려 있다. 성서는 해석자들의 다양한 실존적 정황을 바탕으로 깨우치고 경고하며 위로하는 영감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서 해석 방법론들이 그저 이론적 유희 차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루스 에버하트의 해석은 정의를 올바르게 세우고 상처를 치유한다는 고귀한 정황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 점에서 그녀의 성서 해석은 정당하고 힘이 있다. 그저 현학이 아니라 치유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격성도 누군가에게 때로 불편할 것이다. 성범죄는 그 민감한 사안과 성격에 따라 더 다원적이고 복잡할 것 같은데, 그녀 앞에서는 단호하게 ‘폭력’으로 정의된다. 남성 독자들은 상황에 따른 어려움이나 곤란함, 애매함을 변명하고 싶은 지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루스가 다룬 사건들의 성격은 그런 여지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책임 있는 위치에 선 자들이 저지른 만행이 대부분이며, 루스가 말한 대로 그 성폭력들은 “권력의 남용”이었다(p. 38).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공격성도 정당하다. 험한 말을 자주 내뱉던 아모스의 공격성도, 힘 있는 자들로 인해 유린당하는 약자들의 고통 앞에서는 정당할 수 있듯이 말이다.

 

교회가 받을 선물

 

서평을 쓸 무렵 연이어 이런 성격의 문제들을 주변 사람들과 자주 나누게 되었다. 관련 이야기를 깊이 나누던 학생으로부터 신학교 안에서 목격한 사건을, 다른 학생으로부터는 자기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종교 교사가 성추행 문제에 연루된 일을 들었다. 나와도 잘 아는 어느 목사가 비슷한 문제로 잠적해 버린 이야기도 누군가와 나누었다. 아쉬웠던 점은 이 많은 이야기 가운데 피해자들의 이야기나 사후 회복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극도로 노출되기를 꺼린다는 점은 아직도 우리 교회와 학교, 가정 안에 고압적인 가부장적 성 의식이 편재함을 방증한다. 그래서 더더욱 목소리를 높인 루스 에버하트의 용기를 칭송한다.

 

그녀는 “#미투가 교회에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p. 40). 그 선물 상자 안에 루스 에버하트의 이 저서 『우리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가 담겨 있다. 목회자들과 신학도들이 이 선물을 겸허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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