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여자다움과 제자다움이 충돌하는 것일까? 왜 ‘여자도 제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 질문을 여자에 대해서는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여자들이 제2의 성으로 살아온 오랜 역사 때문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2001년에 여성학 석사 과정에 입학하고 나서 1990년대 중반에 라브리에서 발표한 내 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컴퓨터도 아니고 손으로 쓴 원고였는데, 제목이 ‘여자도 제자로 부름 받았는가?’였다. 추억에 잠겨 그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석사 과정 입학을 위해서 썼던 연구 계획서와 그 내용이 상당히 비슷해서 놀랐다. ‘여자’와 ‘제자’라는 범주가 서로 매끈하게 잘 맞는 범주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이미 경험으로 알았고, 여성학의 언어를 익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성별화’나 ‘젠더’ 같은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내 나름의 언어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 운동의 유행이 지나가고 이제 제자라는 말조차도 무슨 고어처럼 사라졌지만, 사실 기독교의 핵심은 제자도라고 달라스 윌라드도 말했고, 유진 피터슨도 ‘예수의 길’(the Jesus way)이라는 표현으로 같은 주장을 했다. ‘여자도 제자인가?’라는 질문은 기독교인에게 ‘여자도 인간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기독교는 인간이 인간 그대로 있으면 안 되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태어난 인간을 일컫는 용어가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이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여자도 제자인가?’라는 질문은 ‘여자도 그리스도인, 즉 새로운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러니까, 몇 가지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 여자도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여자도 인간인가?’라는 질문이다.

 

제자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와 관련하여 성경에 몇몇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중에서 ‘머리 둘 곳 없이 다니는 인자의 길’(마 8:20)이라는 묘사는 어쩐지 디폴트1)로 여자를 배제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 식 표현으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여자는 남자와는 달리 폭력을 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판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예수를 따르기를 포기한 적은 없다. 예수를 직접 따랐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전도 여행을 다녔고,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던 때에는 남자와 다름없이 순교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후 유행처럼 일던 예루살렘 순례에도 여자들이 같이 참여해 기행문을 남겼다. 물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이런 외형적인 일들만 일컫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여자다움과 제자다움이 충돌하는 것일까? 왜 ‘여자도 제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라는, 남자에 대해서는 하지 않는 질문을 여자에 대해서는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여자들이 제2의 성으로 살아온 오랜 역사 때문이다. 보부와르의 말대로, ‘그건 여자답지 않잖아’라는 말 한마디로 여자들은 ‘여자’라는 범주에 갇히게 되는데, 이 말은 여자는 자신의 여자됨을 부인하지 않고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여성성이나 여자는 열등한 성질을 지녔다고 여겨왔다.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여자는 남자에게서 파생된 부차적 존재로 대우받는다. 우리는 제자로의 부름이 세상의 이러한 관습과 문화를 초월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첫 번째 글에서 설명한 대로 그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소위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미국에서 한창이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여성들을 대상으로 30년간을 추적하여 그들의 정체성 발달을 연구한 루스엘른 조슬슨(Ruthellen Josselson)은 정체성의 범주를 네 가지로 나누어 각각 이름을 붙였다. 정체성은 결국 자기에 대한 이해인데,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됨을 따라 충실히 사는 사람은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간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길을 내는 사람’(pathmaker)이다. 반면에, 자신의 길을 내지 않고 주어진 가치대로 사는 사람은 그 가치를 지키는 ‘가디언’(guardian)이고, 중년이 되어서도 자신을 찾지 못해 계속 찾아다니는 사람은 ‘찾는 사람’(seeker), 아예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사는 사람은 ‘떠도는 사람’(drifter)이다.2)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미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길을 내는 ‘패스메이커’와 주어진 가치를 지키는 ‘가디언’이다.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주어진 가치를 지키는 가디언이 되는 것이 여성에게는 정체성의 완성이라는 착각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 겉으로 보기에 전통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것 같은 여성은 자기 길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쉽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여성은 자기로서의 완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길을 찾아 나서는 모험 없이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 대의 가치를 지키는 가디언의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문화적 각본 안에서 살았다. 심지어 사회는 그러한 여성을 칭찬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 칭찬을 마다하고 자기 길을 나설 이유를 찾는 게 더 힘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주어진 가치를 지키는 가디언이 되는 것이 여성에게는 정체성의 완성이라고 사회도, 여성 자신도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전통적 형태의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여성이 반드시 주어진 가치를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성은 자기 집안 여성들이 이혼해온 내력 때문에, 그 전통을 뒤집기 위해서 더 충실하게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여성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정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전통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한다고 해서 이 여성이 자기 나름의 길을 내는 패스메이커가 아니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역할을 자처하느냐보다는,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자기 길을 내는 방식은 다양하고, 제자로 사는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제자의 공식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하나의 고유한 사람(person)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를 쫓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을 쫓으며 산다. 그리고 자신이 쫓는 대상을 따라서 자기 이해와 삶의 가치를 구성한다. 기독교에서 자기 이해를 구성하는 대상으로서 다른 타자가 아닌 절대 타자를 상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남자 혹은 다른 여자를 대상으로 자기 이해를 구성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자기 이해를 구성하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무엇의 반작용으로서, 혹은 안티(anti)로서 자기 이해를 구성하지 말라는 뜻이다.

 

남자가 아닌 여자, 전통적 여성이 아닌 진보적 여성, 이런 식의 대립적 구조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여성 인간, 혹은 남성 인간인가를 아는 것이 제자로 사는 사람의 과제이다. 세상이 그것은 여자/남자답지 않다 해도, 심지어 그리스도인 여성/남성답지 않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상관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이것만큼은 마르틴 루터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확실하게 남긴 유산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유산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유산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으니, 특히 여성들은 주저하지 말고 자주 주장했으면 좋겠다.

 

작가는 평생 하나의 주제로 글을 쓴다는 말에 나는 동감한다. 작가는 같은 말을 여러 각도에서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연구자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실 박사 논문은 그 사람이 학자로서 던지는 기본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물음은 어느 정도 연구자 자신을 말해준다. 학문적 글쓰기는 종종 객관적 언어로 글쓴이를 감추지만, 따지고 보면 글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 쓴 사람을 말해준다. 그 글이 아무리 공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사적인 이유의 뿌리에 가닿게 된다. 여기에서 ‘사(私)적’이라는 말은 사소하거나 사회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개인’이라는 뜻이다. 사적인(personal) 것은 사람(person)에 대한 것이다.

 

나는 여성과 종교라는 주제로 다각도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지만, 내 연구 질문은 결국 사반세기 전에 던졌던 여성과 제자에 대한 질문의 연장이다. 그 질문은 내게 여자 사람(person)으로서 개인적인(personal) 질문이었고, 이처럼 나를 개인적으로 깊이 연루시키는 문제를 풀어가며 사람으로 계속 성장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은 영어로 ‘personal God’를 번역한 말이다. 하나님(God)과 사람(person)을 이어주는 이 인격적이고 사적인(personal) 것의 신비 안에 그리스도인 여성/남성의 정체성이 있다.

 


1) 프로그래밍에서 특별한 명령 입력이 없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값이나 조건(편집자 주).

2) Ruthellen Josselson, Paths to Fulfillment: Women’s Serach for Meaning and Ident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p. 23-25. ‘패스메이커’를 제자 담론의 관점에서 설명한 글로는 양혜원, “‘패스메이커’ 세대, 여성을 말하다”, 송인규 외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IVP, 2018), 85-1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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