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당혹스러운 것은, 이 개념이 해외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게다가 기독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에 급속하게 부흥한 한국 교회가 기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소위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태도를 지닌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재빨리 관련 논의에 뛰어든 것은 처음이다. 벌써 메타버스와 교회 교육을 주제로 한 책이 출판되었고, 신학자들이 메타버스를 이용한 새로운 예배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본문 중)
손화철(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기술철학)
메타버스(Metaverse) 열풍이 뜨겁다. 메타버스란 ‘나중에’ 혹은 ‘무엇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메타(meta-)라는 라틴어 접두어와 ‘우주’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친 조어인데, 1992년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SF소설 『스노우 크래쉬』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라고 한다. 최근 인터넷과 가상현실 관련 기술이 발달하고 코로나19로 비대면 접촉이 많아지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메타버스는 간단히 말해 사람들이 물리적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가상의 세상이다. 메타버스 개념을 넓게 이해할 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사례는,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쇼핑, 그리고 최근 많이 사용하는 줌(Zoom)이나 웹엑스(WebEx) 같은 온라인 회의 시스템이다. 실제로는 어디에 있든지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 만나 대화하고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 전화를 사용하면 실제 공간에 가상의 존재나 설명이 더해지는 증강 현실이나, 자신의 일상을 SNS로 생중계하는 것도 일종의 메타버스다.
그런데 요즘 거론되는 메타버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본인의 아바타로 온라인 세상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아바타를 만나고, 그 세상에 모임 장소나 가게 같은 장소를 만들거나 방문할 수 있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있다. 20여 년 전에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라는 프로그램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온라인에서 ‘도토리’라는 자체 화폐를 이용해 자신의 방을 꾸미고 서로의 방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요즘 논의되는 메타버스는 이 미니홈피에 실시간 상호작용과 공간적 현실성을 더한 기술적 확장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이버에서 출시한 ‘제페토’와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로블록스’ 등이 전형적인 예이다. 인기 가수들이 이런 메타버스 공간에서 콘서트를 열고 팬들은 아바타로 그 콘서트에 참여하여 즐긴다든지, 대학교의 입학식이나 신입 사원 연수를 메타버스 공간에서 개최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약간 당혹스러운 것은, 이 개념이 해외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많이 언급되고, 게다가 기독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에 급속하게 부흥한 한국 교회가 기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소위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태도를 지닌 것이 사실이지만, 이번처럼 재빨리 관련 논의에 뛰어든 것은 처음이다. 벌써 메타버스와 교회 교육을 주제로 한 책이 출판되었고, 신학자들이 메타버스를 이용한 새로운 예배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려스럽다. 교회가 신기술을 도입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것은 중요한 사역이지만, 그 과정은 당연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가 코로나19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 최첨단 기술의 도입인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사람마다 서로 다른 현상이나 대상을 ‘메타버스’로 지칭하거나, 심지어 말할 때마다 다른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해서 혼란이 더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건설적인 논의를 방해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좀 진보된 메타버스, 즉, 가상 공간에서 사용자의 아바타가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메타버스를 중심으로 몇 가지 고려할 점을 나열해 본다.
첫째, 메타버스는 현재 게임의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고 향후 확장을 기대하는 기술이다. 게임은 원래 가상을 전제로 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현실과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사람들은 게임 안에서 일부러 스스로를 잊고 몰입하며, 정해진 규칙을 군말 없이 따른다. 또, 재미가 없으면 바로 그만두고 다른 게임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실제 일상에서는 이런 기준이나 행태가 용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메타버스가 게임이나 연예 분야에서 인기를 끈다고 해서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관심을 두는 예배나 교육 분야에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총을 쏘면 실제처럼 피가 튀는 게임 영상이 ‘사실적’이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그것이 사실이라 여기지 않는다. 메타버스에서 예수님과 함께 성찬을 하도록 구현하면 감동을 느낄 거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심각한 오해다.
둘째,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가 기업과 언론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기술의 특징 중 하나는 필요가 확인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개발하고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바타가 활동하는 수준의 메타버스는 아직 시험 단계에 있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몇몇 기업이나 대학이 메타버스 안에서 행사를 치른 것도 이러한 시도의 일부이고 일종의 일회적 홍보다. 따라서 명확한 필요가 확립되기 전에 그런 움직임에 반응하기보다, 그런 시도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이 먼저다. 단적으로, 지금 화상으로 드리고 있는 온라인 예배를 가상 공간에 만들어진 예배당에 아바타로 참석해서 드리면 더 실감이 나고 은혜로울까? 어떤 유튜버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오프라인에서 재미없는 곳에는 온라인에서도 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예배는 재미로 드리는 게 아닌데, 메타버스에는 재미가 필요하다.
셋째, 메타버스의 구현은 언제나 제 3자를 전제한다. 메타버스는 서울처럼 누구든 들어가면 되는 독립적 공간이 아니라, 특정 회사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카카오톡 계정을 가지고 페이스북에 들어갈 수 없듯이, 각각의 메타버스는 서로 독립적이다. 앞서 언급한 제페토 게임을 하려면 제페토 프로그램에 들어가 이미 정형화되어 있는 사람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모습을 조합해서 아바타를 만들어야 하고, 로블록스 게임을 하려면 그 게임의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 각 메타버스에는 고유의 규칙이 있고 작동방식이 있다. 메타버스 안에 우리 교회를 만들려면 제페토, 로블록스와 수많은 다른 메타버스에 모두 만들거나, 아니면 한 메타버스에만 만들고 교인들은 모두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해야 한다. 교회가 자체적으로 메타버스를 만들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결국 교회는 누군가의 고객이 되어야 한다.
넷째, 메타버스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10대라고 하는데, 정작 10대는 별 말이 없고 어른들만 관심이 뜨겁다. 누군가는 아주 냉소적으로 메타버스가 아니라 ‘중년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미 다 하고 있대”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메타버스 담론은 성공 가능성이 낮다. 메타버스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다음 세대와 소통이 되는 것이 아니다. 본인에게 실감이 날 때까지 알아보고 물어봐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흐름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유행을 따르는 것은 앞서 말한 기업과 언론의 조작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쯤 되면 메타버스가 꼭 그렇게 아바타까지 동원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카카오톡도 온라인 상품권도 메타버스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고려사항은 “왜 굳이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쓰는가?”이다. 온라인 예배라 할 수도 있고, 단톡방 성경공부라 할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가장 유행하는 단어를 써야 하는가? 기업에게는 최첨단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홍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그래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여섯째, 메타버스보다 그것이 대체할 것으로 기대하는 예배와 교회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동일한 형식과 내용의 활동을 메타버스로 대치하면 갑자기 부흥이 일어날 것인가?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가 약화된 것이 단지 예배당에 몸으로 오지 못한 것 때문인가? 코로나19를 관성적으로 이어온 예배와 교회 교육, 개교회의 공동체성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일곱째, 한국 교회는 얼리어답터가 되기보다 교회 안팎의 기술 격차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메타버스를 활용하지 않아서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지만, 메타버스에 집중하면 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떠날 것이다. 교회가 메타버스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원이 들어간다. 과연 그런 투입이 정당한지 물을 필요가 있다. 코로나19는 온라인 예배를 제공하지 못하는 작은 교회들이나 학교들에게 치명타가 되었지만, 이들을 돕기 위한 시도는 미미했다. 기술의 영역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 고민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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