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절정은 낮 12시이고 일 년의 절정은 7월 2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절정(반 고비 혹은 한 가운데)은 언제일까? 80년을 산다면 40세이고 백 년을 산다면 50세이다. 그러나 김연수 작가는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말한다. 그는 ‘노을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다’는 문장을 쓰기 위해서 노을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본 사람이니,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여기서 ‘반 고비’는 영어로는 ‘midway in our life’s journey’라고 표현하고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말을 빌리면 ‘생의 한 가운데’ 혹은 ‘삶의 한 가운데’가 될 것이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는 단테가 35세가 되던 해, 1300년을 가리킨다. 단테는 인간의 수명이 70세(시편 90:10)라는 시편의 판단을 받아들인 것 같다. 14세기 초, 70세까지 산 사람은 인구 중 5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1300년은 단테 인생의 최절정기였다. 당시 그는 도시 피렌체를 다스리는 최고위원 6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절정은 내리막길의 시작이기도 하다. 2년 후 추방되면서 『신곡』을 쓰게 된다.

 

하루의 절정은 낮 12시이고 일 년의 절정은 7월 2일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절정(반 고비 혹은 한 가운데)은 언제일까? 80년을 산다면 40세이고 백 년을 산다면 50세이다. 그러나 김연수 작가는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고 말한다. 그는 ‘노을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다’는 문장을 쓰기 위해서 노을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본 사람이니,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있다. 마가렛 미쳴(Margaret Mitchell)이 썼다. 소설은 조금 읽었고 영화(1939)는 여러 번 보았다. 엔딩 씬은 기억난다. 스칼렛 오하라(배우 비비안 리)는 철없는 아가씨였다. 그가 남북전쟁으로 삶이 뭔지 배고픔이 뭔지 알게 된다. 형편없는 양배추로 배고픈 입들을 먹인다. 그가 메마른 땅을 일구다 노을을 바라보면서 분노하듯 외친다. “신께 맹세컨대, 다시는 굶지 않을 거야.”

 

나는 이 순간이 스칼렛 인생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있다. 1955년에 태어나 2011년에 별세했다. 그는 겨우 56년을 살며 또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인생에서 절정은 2007년, 52세 때였을 것이다. 바로 아이폰을 처음 발표한 때. 이렇게 본다면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 인생의 절정도 이해가 된다. 그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쳤을 때일 것 같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는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와 맺은 계약 조건이었다. 이 말을 하지 않는 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영원히 종으로 부리며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 절세 미녀와 결혼할 수도 있고 원하는 쾌락을 다 누릴 수 있었다. 그도 초반엔 쾌락에 휘둘렸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이 있었다. 그는 결국 고결한 이상을 추구한다.

 

끝부분에 가면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은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어 한다. 그러자 기쁨이 용솟음치고 그는 그걸 주체하지 못해 외친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이 외침이 주는 느낌은 꼭 에스더서에서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 4:16)를 읽었을 때 느꼈던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느껴지고 이전과 달리 ‘새로운 시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신곡』의 말은 밋밋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나 스칼렛의 말은 다르다. 에스더 왕후의 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가 신앙을 ‘새롭게 보는 방식’(a new way of seeing)이라고 설명한 걸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나도 파우스트나 김연수 작가가 느꼈을 그런 느낌을 살짝 경험한 적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이 있다. 그 소설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진정한 배움이란, 우리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야. (밑줄 필자)

 

‘알 수 있었던 것’이란 구절에 밑줄이 쳐져 있다. 나에겐 특별하다. 이 구절을 만났을 때 도리스 레싱이 배움을 ‘평생 알고 있었던 걸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는 것’으로 설명한 문장이 떠올렸다. 두 문장이 겹쳐지면서 ‘양파 한 뿌리’도 생각났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일화이다. 지옥에 떨어진 그 노파도 양파 한 뿌리가 구원의 기회였다는 걸 알아챌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엔 그걸 깨닫지 못하고 만다.

 

이런 느낌들이 겹쳐지면서 나는 『장미의 이름』을 힘들게 읽은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에코의 문장을 다시 읽었는데, 그 느낌이 꼭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듯한 문장을 만난 기분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소설과 이 문장을 준비시켰다고까지 생각했다. 나는 이런 느낌을 『주홍 글자』와 『순교자』와 『침묵』을 읽다가 받은 적이 있다. 책을 읽다 어떤 강렬한 느낌을 경험하면 그 이후 삶을 살아가는 시각이 달라진다.

 

여러분이 알아챘는지 모르지만 내가 괴테, 단테, 레싱, 김연수, 린저, 미첼의 작품을 읽은 시기는 제각각이다. 한데 여섯 작가가 하나의 지점에서 겹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뭔가를 깨닫는 것이다. 나는 이 작가들이 겹칠 것이란 걸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머릿속에서 겹쳐질 때 느껴졌다. 독창성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시각에서 나온다는 게 놀랍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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