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민주적 다양성의 확보’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diakonia)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그 몸의 지체로서 다양성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운다(고전 12:25). (본문 중)

박성철(“정치신학연구소 교회와사회” 대표)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실 인식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아래 고통받았다. 그 암울했던 시간 동안 한국 교회 내에서 정치 이야기는 금기시되었고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은 주류로 자리 잡았다. 외적으로 엄격한 정교분리를 외치면서도 실질적으로 개발 독재 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던 근본주의 교회들은 억압의 시대가 지속될수록 더욱 극우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가 급속하게 민주화되어 가는 중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2020년 팬데믹 시대를 맞아 한국 교회가 극우 기독교 세력의 온상으로 각인된 데에는 이러한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는 공적인 가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종교 집단이 권위주의적 정치 세력에 쉽게 동조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성서 속 정치적인 것

 

성서는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 않다. 구약은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신약도 당시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종종 다루고 있다. 복음서만 하더라도 세금으로 대표되는 세속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는 문제(마 22:17-21; 막 12:14-17; 눅 20:22-25), 세속 권세와 갈등하는 복음의 문제(막 13:9; 눅 12:11) 등을 비롯하여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담고 있는 다양한 말씀들을 포함하고 있다. 신약의 다른 책들도 당시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 없이 해석하다가는 문자주의의 왜곡에 빠진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로마의 일치를 위해 정치적 통합뿐 아니라 종교적 안정을 원했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313년)이 선포되면서 정치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은 보다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신학적 측면에서 중세의 기반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지상의 도성에서 공동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로 대표되는 중세 스콜라 철학은 교회와 국가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중세의 다양한 신학적 담론들은 인간을 국가와 같은 정치 체제가 필요한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였고, 국가의 기능을 사회 구성원들의 협력을 통해 공공선을 증진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마틴 루터와 장 칼뱅

 

이러한 중세적 흐름과 달리 종교개혁 시대에는 먼저 교회와 국가의 독자적인 역할을 강조한 후 양자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참된 신자들의 영혼을 다스리며 신자들의 경건을 성숙시키는 데 목적이 있고, 세속의 왕국은 불신자들을 법과 공적 권위에 복종시킴으로 악행과 불법을 제어하고 평화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처럼 루터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속의 왕국의 독자적인 역할을 강조하였지만, 두 왕국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세속 정부는 평화와 사회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영적 정부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영적 사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공적 권위를 존중하며 세속 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세속 정부의 권위에 대한 오해를 불러왔고, 독일의 루터 교회가 나치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장 칼뱅(Jean Calvin)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삶의 영역 전반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칼뱅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와 세속적인 통치 질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속 정부는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는 일을 못 하도록 막아주고, 신앙을 거스르는 그 밖의 공적인 범죄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생기거나 퍼지지 않게 함으로써 공적인 평화를 혼란으로부터 지켜 준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칼 바르트

 

20세기에는 파시즘(Fascism)과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등장으로 인해 민주주의 체제를 위한 교회의 공적 책임을 강조하는 신학 담론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영역 주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삶이 공공 영역 속에서도 실천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카이퍼에 따르면, 모든 주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주권은 정치적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으로 흘러가기에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카이퍼는 독재나 절대 권력은 국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혁명당’의 당수로서 카이퍼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영역 주권론’이 1901년 그를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도록 이끌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정치적 예배’(Politischer Gottesdienst)라는 개념을 통해 파시즘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민주적 다양성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강조하였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정치적 영역을 예배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사명, 즉 법치, 평화 그리고 자유를 돌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영역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국가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에 종속되어 있기에 절대적일 수 없으며, 독재나 전체주의와 같이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저항해야 한다. 교회가 법치 국가와 긍정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바르트의 주장은 독일의 ‘고백교회’(Die Bekennende Kirche)가 나치 정권에 저항하도록 이끌었다.

 

민주적 다양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

 

현대적 의미의 정교분리는 미국의 수정 헌법 1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교’(state religion)를 거부한다는 의미이지,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를 금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바르트의 주장과 같이 정치적 영역에서 특정한 정당이 기독교적 가치를 독점하거나 대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가치란 모든 정치 운동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냉전 시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참여에 대해 분명한 방향과 한계선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민주적 다양성의 확보’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diakonia)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그 몸의 지체로서 다양성을 통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운다(고전 12:25).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신앙적 다양성이 정치적 영역에서 민주적 다양성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정치적 영역이 획일화될 때 가장 고통을 받는 이들이 바로 사회적 약자이며, “섬기는 자”(눅 22:26)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를 섬겨야 한다’(마 10:26-27; 요 13:15)고 가르치셨음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민주적 다양성을 위한 참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민주적 다양성과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저항해야 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박성철.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 새물결플러스.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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