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는 어린이도 즐겁게 볼 수 있지만, 어른들도 그 속에서 루이스 사상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걸작이다. 신앙인으로 모험과 전투와 여행과도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평생 곁에 두고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는 멋진 책이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너희들이 이 세계에서 나를 알도록 허락받은 것은 너희 세계로 돌아갔을 때 나를 더 잘 알도록 하기 위함이니라.” ―아슬란

 

영국 작가 C. S. 루이스의 판타지 <나니아 연대기>의 첫째 이야기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1950년 출간되었다. 1939년 9월, 런던에서 독일군의 공습을 피해 그의 집 킬른스로 와서 지내던 네 아이들을 보면서 떠올렸던 착상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이후 56년 『마지막 전투』에 이르기까지 매년 1권꼴로 총 7권의 <나니아 연대기>가 출간되었다.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가 상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동물이 말하며 사는 나라에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니아 연대기>의 주인공이자 나이아의 창조자인 아슬란을 통해 ‘길들일 수 없는 사자’로서 두렵고도 착한 존재라는 신적 이중성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이도 즐겁게 볼 수 있지만, 어른들도 그 속에서 루이스 사상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걸작이다. 신앙인으로 모험과 전투와 여행과도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평생 곁에 두고 힘과 격려를 얻을 수 있는 멋진 책이다. 나니아라는 세계의 창조부터 멸망에 이르는 장구한 이야기를 담아낸 이 시리즈로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아슬란에 대한 지식’에 집중해 보려 한다. 위에서 인용한 아슬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니아의 아슬란을 더 잘 알수록 우리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더 잘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길들지 않는 사자, 아슬란

 

사자 아슬란은 나니아의 창조자다. 나니아 연대기 1권 『마법사의 조카』에서 아슬란이 다양한 분위기와 곡조의 노래로 나니아에 별들이 나타나게 하고, 태양이 떠오르게 하고, 언덕이 생겨나고 물이 흐르게 하고, 식물과 동물들이 생겨나게 하는 장면은 <나니아 연대기>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명장면이다.

 

아슬란은 섭리적 주재자이기도 하다. 그의 통치 영역은 나니아에 그치지 않고 나니아의 인접국 아첸랜드, 대제국 칼로르멘까지 두루 뻗친다. 3권 『말과 소년』에서는 칼로르멘에 살던 어느 말과 소년의 삶을 아슬란이 어떻게 섭리적으로 이끌어 가는지가 그려지며, 그 과정 가운데 나니아 너머의 다른 나라들까지 다스리는 신적 주권자로서 아슬란의 면모가 드러난다.

 

아슬란의 별명은 ‘길들지 않는’ 사자다. 아슬란의 야성을 강조하는 이 별명은 그가 가진 자유와 주권을 부각시킨다.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고 자신의 때에 사라진다. 아슬란을 길들이거나 그와 협상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 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아슬란의 야성은 창조자로서도, 섭리자로서도 유감없이 드러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구원자로서의 면모로 가장 잘 드러난다.

 

아슬란의 야성적 사랑

 

구원자 아슬란의 면모는 <나니아 연대기> 일곱 권 전체에서 줄곧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2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얀 마녀의 마법 아래 100년 동안 크리스마스 없는 겨울이 이어진 나니아에 아슬란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돈다. 페번시 4남매 중 피터, 수잔, 루시는 ‘길들지 않는’ 사자 아슬란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지만, 셋째 에드먼드는 하얀 마녀를 먼저 만나 터키 젤리를 얻어먹은 후 배신자가 되고 만다.

 

아슬란이 나타나 에드먼드를 구출해 내지만, 하얀 마녀가 아슬란에게 찾아와 심오한 마법을 상기시킨다. 그 내용은 “모든 배신자는 하얀 마녀의 합법적 포로로서 마녀의 것이며, 죽일 권리도 마녀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아슬란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놓기로 하자 마녀는 에드먼드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 그날 밤, 마녀는 아슬란의 털을 모두 깎아 버리고 돌 탁자에 묶어놓는다.

 

마녀는 칼을 내리치기 직전에 허리를 굽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누가 이겼지? 얼간이 같은 놈. 네가 이런다고 그 배신자 놈을 구할 수 있을성 싶으냐? 이제 나는 계약대로 그놈 대신 널 죽일 것이고, 그리하여 심오한 마법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내가 그놈을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그다음에는 누가 내 손아귀에서 그놈을 구해 내겠느냐? 넌 내게 나니아를 영원히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 너는 네 목숨은 물론 그놈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게 된 거야. 그런 줄이나 알고 절망하면서 죽어라!”

 

마녀는 아슬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도록 철저히 ‘이기심에 길들여진’ 마녀로서는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던지는 아슬란의 ‘야성적 사랑’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길들지 않는 사자 아슬란은 자신이 창조한 나니아를 위해, 배신자 에드먼드를 위해 고통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마녀는 거기에 ‘태초 이전의 더욱 심오한 마법’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결백한 자가 반역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돌 탁자는 깨지고 죽음 그 자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하여 아슬란은 부활하고 강력한 힘으로 마녀를 무찌르고 나니아를 구원한다. 구원자 아슬란의 이 희생적 사랑, 야성적 사랑은 이후 ‘길들지 않는’ 사자 아슬란에 대한 지식의 원형이 된다. 나니아의 말하는 동물들이 아슬란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섬기고 그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지킬 수 있는 초석이 된다.

 

돌아온 아슬란의 소문과 함께 찾아온 시험

 

‘길들지 않는’ 사자 아슬란은 창조주, 구원자, 주권적 섭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직접 나타나 캐릭터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고 잘못을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기도 하지만, 사건의 배후에서 활동하며 일을 캐릭터들에게 맡기고 내버려 두는 경우가 더 많다. 캐릭터들이 아슬란의 존재 여부를 의심할 정도로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그 오랜 부재의 기간에 캐릭터들은 아슬란이 나타났을 때 보여준 능력과 성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여러 캐릭터들이 각종 위기 가운데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위기가 펼쳐지는 책은 7권 『마지막 전투』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위기는 오히려 아슬란이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찾아온다.

 

잠시 우리가 나니아의 말하는 동물이라고 상상해 보자. 유모에게 들은 이야기, 역사책, 옛날얘기 속에서 접하고 아슬란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게 되었다. 그는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했고 자기희생을 통해 배신자와 나니아를 구원했으며, 착하면서도 무서운 신적 존재이자 길들지 않는 사자이다. 하지만 아슬란이 직접 나타난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슬란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돈다. 나니아의 창조자요 구원자 아슬란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그런데 아슬란이 오고 나서 세상이 더 안 좋아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아슬란이 말하는 동물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오신 아슬란은 시프트라는 원숭이를 선지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서만 말씀하신다. 어두울 때 멀찍이서 잠깐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아무 말씀도 해 주시지 않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시프트가 전하는 아슬란의 명령이다. 동물들을 칼로르멘 사람들의 노예로 넘기는 것이다. 나니아의 초대 왕에게 “누구도 다른 이들을 지배하거나 모질게 다루지 않도록 하겠느냐?”라고 다짐을 받았던 아슬란은 어디 가고, 이제 나니아의 말하는 동물들에게 강제 노역을 명령하는 아슬란이라니.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는 아슬란의 뜻은 어디로 갔는가?

 

 

계몽된 자들과 환멸에 빠진 자들

 

여기에 대해 시프트는 아슬란이 ‘길들지 않는’ 사자라는 사실을 꺼내 든다. 그분이 어떻게 행하실지 너희가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으며, 길들일 수 없다는 말을 선악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폭군이라는 의미로 곡해한다. 여기다가 가장 충격적인 선언을 덧붙인다. 칼로르멘 사람들이 믿는 신 타슈, 팔이 네 개에 머리는 독수리 모양이고 신전에서 인간 제물을 요구하는 타슈 신과 나니아인들이 섬기는 아슬란이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다. 급기야 ‘타슐란’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한다. 이 엄청난 소식에 말하는 동물들은 완전히 풀이 죽고 만다. 그러나 딱 한 마리만은 달랐다. 진저라는 고양이는 그것을 엄청난 해방의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진저는 시프트와 칼로르멘 장교가 종교를 빙자해 벌이는 사기 행각의 실체를 알게 되자, 자기도 ‘속이는 자’들의 무리에 끼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사기꾼이 있다고 해서 모든 상거래가 속임수라는 뜻은 아니듯, 시프트와 칼로르멘 장교처럼 아슬란 신앙을 이용하여 자기들 뜻을 관철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아슬란 신앙이 통째로 거짓이라는 결론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진저와 칼로르멘 장교는 자신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로 자신들의 탐욕과 성정에 맞추어 무턱대고 부정했던 초자연적 세계의 실체를 만나고 기겁을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환멸에 빠져 다시는 아무도 안 믿겠다고, 자기와 자기 집단만 믿고 자기 집단의 이익에만 충실하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아슬란으로 선전되던 것이 실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라는 사실을 (나니아의 마지막 왕) 티리언 왕을 중심으로 하는 주인공들이 폭로하자 난쟁이들이 바로 그런 선택을 한다. 아슬란이니 뭐니 하는 건 다 속임수라고, 더 이상 그런 사기극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지 않으려고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전략은 안전해 보이지만, 결국 그것 자체가 하나의 올무가 되어버린다. 결국 진짜 아슬란이 나타났을 때, 난쟁이들은 아슬란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그의 우렁찬 포효도 듣지 못하고, 아슬란이 차려주는 진수성찬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되어 버린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심약한 자들과 지식이 있는 자들

 

심약한 자들도 있다. 우유부단한 자들이다. 믿었다가 속고 나니, 이제 믿는 것 자체가 무서워진 자들이다. 이 말도 의심스럽고 저 말도 진짜인가 싶다. 그래서 믿지도 안 믿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다. 하지만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 주저앉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고, 그야말로 맥 빠지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게 티리언 왕이 외친다. “여기, 나니아의 왕 티리언이 왔다. 아슬란 님의 이름과 내 목을 걸고 맹세하노라. 타슈는 사악한 악마이고, 원숭이는 반역자이며, 이 칼로르멘 병사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다. 진실한 나니아 국민들은 내 편에 서라. 새로운 지배자가 너희들을 하나씩 다 죽일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텐가?”

 

티리언 왕의 이 부름에 여러 동물들이 호응하고 달려오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동물들이 훨씬 많았다. 티리언 왕이 그들에게 겁쟁이가 되었느냐고 묻자, 그들은 타슐란님으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한다. 아, 그러나 타슐란이라는 사악한 혼합주의 종교에서 벗어날 길, 그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보호받을 길은 이미 티리언 왕이 선포했으니, 티리언 왕과 함께 진실의 편, 아슬란 신앙의 편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길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티리언 왕에게 달려간 소수의 말하는 동물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도 한때 가짜 아슬란을 동원하여 아슬란에 대한 거짓 지식을 퍼뜨리는 시프트와 칼로르멘 군인들에게 휘둘렸다. 누군가 아슬란 행세를 한다거나 가짜 아슬란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사기극을 겪고도 아슬란에 대한 그들의 신앙 자체는 흔들림이 없었고, 티리언 왕의 호소에 부응하여 티리언 왕의 편에 선뜻 나섰다. 이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티리언 왕은 성급한 판단으로 칼로르멘 군인들의 포로가 된 후, 타슈와 아슬란이 하나라는 시프트의 말을 나니아의 말하는 동물들이 곧이곧대로 믿고 절망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그 말이 거짓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말하려고 했고, 만약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자기 백성의 피를 먹고 사는 그 무시무시한 타슈 신이, 어떻게 모든 나니아 백성들을 자신의 피로 구한 선량한 사자와 같을 수 있느냐?” 티리언 왕이 명심하고 있었고, 말하는 동물들 대다수는 망각하고 있었던 아슬란에 대한 이 지식을 붙잡는 것이 관건이었던 것이다. 아슬란에 대한 참 지식, 이 소수의 동물들에게는 그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자기편에 서라는 티리언 왕의 부름에서 그 지식의 메아리를, 그 지식을 환기하는 진실의 호소를 들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배신자 에드먼드를 위한 희생적 죽음. 자기 목숨을 버려 한 사람뿐 아니라 나니아를 구원한 아슬란의 야성적 사랑. 이 역사적 사건이 아슬란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반석과도 같았다. 그 사건이 알려 주는 아슬란에 대한 지식을 붙드는 것이 가짜 아슬란, ‘적(適)아슬란’이 등장하는 묵시록적 세상에서 아슬란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핵심 요소였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아슬란에 대한 지식을 깊이 생각할수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이와 동일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 담긴 의미를 제대로 알고 내 삶에, 역사와 세상에 적용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사뭇 달라지겠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은 그런 사람들이었겠구나, 하는 인식이었다.

 

그것과 너무도 다른 내 모습을 보며, 복음서에서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와 제자들의 무력함만 확인한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막 9:14-29)가 떠올랐다. 그는 예수님께 아들을 가리키며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 요청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분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을까? 아마도 담담했으리라. 그분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진술하시는 것이었을 테니.

 

여기서 아버지는 딜레마에 놓인다. 도무지 자기가 어쩔 수 없는 벽 앞에 선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온 분이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으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니 믿기는 믿어야 하겠는데, 어떻게든 믿고 싶은데,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믿음은 지어낼 수 있는 것도, 우긴다고 될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기막힌 요청이 나온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다시 한 번 나니아 이야기를 덮는 지금, 나도 같은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다. 수십 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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