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악을 다루시는 계획에는 사람이 아무리 깊이 묵상한다고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악과의 싸움에서 제자들은, 먼저 추론으로써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단순히 실천하면서 성령님이 어떻게 악의 문제를 다루시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38너희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9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때리면, 돌려서 그에게 다른 쪽도 대 주어라. 40그리고 너를 고소하여 외투를 빼앗으려 하는 사람에게 셔츠도 주어버려라. 41그리고 누구든지 너에게 천 걸음까지 짐을 나르도록 요구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거라.1) 42너에게 달라고 요구하는 자에게 주어라. 그리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마라. (마태복음 5:38-42)

 

구약성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 21:24; 레 24:20; 신 19:21)라는 법은 피해를 준 그만큼 공평하게 배상하라는 법이었습니다.2) 아무래도 오늘날보다 고대 사회에서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부자가 낮은 신분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이 당한 피해에 대해 과도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심하게 보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법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피해에 대한 공평한 배상을 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악을 제어하고, 궁극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법은 악인의 악에 대해 동일한 수준의 악으로 응징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학자들도 이 법의 취지가 ‘보복’ 규칙을 정하는 데 있다고 보아 ‘보복법’(lex talionis)이라는 부적절한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 법의 원래 취지가 “악한 자에게 맞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석해 주십니다. 즉, 악인에 대한 보복이 이 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놀랍게도, 제자 공동체에서 보복 자체를 완전히 금지하십니다.

 

한편, “악인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을 무제한 방조하라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명령의 취지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내용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17누구에게든 악에 대해 악으로 돌려주지 말고, 모든 사람들 앞에 선한 것들이 무엇인지 먼저 고려하십시오. 18여러분의 상황에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추구하십시오.3) 19자신을 위한 보복을 스스로 실행하지 마십시오, 사랑받는 이들이여. 오히려 진노에게 자리를 주십시오. 왜냐하면, “보복은 나에게 속한 일이다. 내가 되갚아줄 것이다”(신 32:35)라고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20당신의 원수가 배고프면 오히려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이것이 불타는 숯을 그의 머리 위에 쌓는 일입니다.4) 21악에 정복당하지 말고, 선한 것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로마서 12:17-20)

 

이 말씀에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옵니다. 첫째로,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이며, 제자들의 일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함께 평화를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에 대해 사적인 복수를 하게 되면 사적인 악의 연쇄 반응에 휘말리게 됩니다. 복수하면 그 악이 또 다시 복수로 돌아옵니다. 싸움이 나면 처음에 잘못한 쪽은 있겠지만, 악이 악을 낳아서 결국에는 양쪽이 다 피해를 입고, 서로 상대방이 행한 악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됩니다. 이러한 사적 복수와 원한의 연쇄 반응을 끊어내는 방법은, 한쪽이 먼저 자기의 복수를 공의롭게 심판하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은, ”진노에게 자리를 주라”(19절)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악인과 악을 무책임하게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실행을 위해 권위를 위임받은 그 사회의 사법 제도에게 악인의 처벌을 맡기는 것을 포함합니다(롬 13:4). 물론 지상의 사법 제도는, 우리가 존중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공평하거나 전능하지 않으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악인의 악에 대해 공의롭게 심판하셔야만 합니다.

 

둘째로, 악에게 이기는 방법은 악을 더 강력하게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악을 응징하기 위해 악인을 악한 수단으로 고문하면, 이 우주에는 악의 총량이 더 늘어날 뿐입니다. 악을 응징한다고 해서 선이 증가하지 않습니다. 악을 억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악의 뿌리를 떠내어 근원적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악의 문제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심오한 수준이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도 심오합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과 함께 악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악과 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그 방법은 바로,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의 연쇄 반응을 가로막고 우주에 선의 총량이 증가하게 만드는 심오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수준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악과의 싸움은 악인에게 악을 퍼부어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을 다루시는 계획에는 사람이 아무리 깊이 묵상한다고 해도 헤아릴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악과의 싸움에서 제자들은, 먼저 추론으로써 많은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단순히 실천하면서 성령님이 어떻게 악의 문제를 다루시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악인이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돌려대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성령님께 상황에 맞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지혜를 구하고, 떠오르는 것을 실제로 실천해 봄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이 악을 이기시는지를 몸으로 배워야 합니다.

 


1) 로마 군인은 평민에게 천 걸음(=1 로마 마일) 거리 안에서 짐을 나르게 할 수 있었습니다.

2) 구약성경 율법은 배상의 경우 단순히 1:1이 아니라 피해보다 더 많은 양(1.2-5배)을 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피해가 배상 가능한 것은 아니며, 한번 당한 피해는 온전히 배상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3) 평화(히, 샬롬)는 단순히 싸움이 없는 누그러진 상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번성하는 상태입니다.

4) 이 표현은 정확한 의미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심판의 숯불이 때가 되면 언제든지 쏟아질 수 있는 위태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머리 위에 금방 쏟아질 진노의 숯불을 이고도 깨닫지 못하고 웃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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