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옛 가요 가사에 보면 ‘전쟁 같은 사랑’이라는 표현이 있다. 사랑이 전쟁 같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데도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공감해 버린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이건 완전 전쟁이야’라는 표현도 있다. 생존이 벅찬 팍팍한 일상을 일컫는 말로 주로 쓰이는데, 이 말도 듣는 순간, ‘그래’라는 공감을 자아낸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요즘도 교회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나의 청년 시절에는 제법 자주 불렀던 복음 성가인데, 2021년 마지막 달에 들어 이 노래 가사가 머리를 맴돈다. 아마도 ‘코시국’을 지나며 하루하루가 전쟁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전쟁은 이제 멀리서 들려오는 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묘사하는 은유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생명의 대표적 활동인 ‘육아’에도 살육의 대명사인 전쟁이라는 말을 붙여 육아 전쟁이라고까지 한다. 이런 일상에서 평화를 소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며 올 한 해를 돌아보니 전쟁과 평화는 이항대립이기보다는, 그러니까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가 없고 평화가 있는 곳에 전쟁이 없다기보다는, 서로 역설적 관계로 공존하는 것 같다. 마침 교회는 지난 주일(11월 28일)부터 대림절을 지키고 있으니, 평화를 완성하시려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이 절기에 이 역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도 좋겠다.

 

먼저 내 삶을 되짚어 보자면, 타지인 미국과 일본에서 보낸 6년 반보다 내 나라로 돌아와서 보낸 지난 2년이 훨씬 더 피곤했다. 왜 그럴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불안 그리고 불편은 타지살이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피로감의 원인이다. 일본에 가서 한동안은 장을 보는 일 하나에도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한참 번역기를 돌리고 나서야 내가 보는 물건이 무엇이고 성분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살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었으니, 30분이면 끝날 장보기가 처음에는 2시간도 걸렸고, 그렇게 장을 보고 나면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진이 빠졌다. 관공서 일 처리, 은행 일 처리,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에 반해 방문자 신분의 이방인이기에 면제받는 피로감도 있다. 현지 사회의 여러 문제를 둘러싼 논란과 논쟁에서 오는 피로감이다.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 대로 일종의 축복받은 무지의 상태로 지낼 수 있고, 알아듣는다고 해도 한 발 빼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참여의 피로감이 면제된다. 말하자면, 생활의 다른 면에서 얻는 피로감과의 트레이드오프(trade off)인 셈이다. 하지만 그 대신에 치르는 대가가 있다. 바로 고립감이다.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you don’t belong here’)이 끊임없이 환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논란과 논쟁의 장에서 오는 피로를 고스란히 겪는 동시에 고립감도 느낀다면? 참여의 피로만큼 고립감도 크다면? 지난 2년간 경험한 역설의 한 축은 아마도 그것이었던 것 같다. 참여의 피로감을 트레이드오프해 주는 소속감이 아닌, 그 대가로서의 고립감. 귀국하자마자 팬데믹 정국에 들어섰으니 고립감은 코로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럴까? 좋은 일 하자고 모여 놓고도, 아니 어쩌면 좋은 일 하자고 모인 사람일수록 관행 같이 일어나는 편 가르기와 배제는 코로나와는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일상 깊이 침투한 전쟁의 메타포와 연관된 것 아닐까.

 

우선, 옛 가요 가사에 보면 ‘전쟁 같은 사랑’이라는 표현이 있다. 사랑이 전쟁 같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닌데도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공감해 버린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이건 완전 전쟁이야’라는 표현도 있다. 생존이 벅찬 팍팍한 일상을 일컫는 말로 주로 쓰이는데, 이 말도 듣는 순간, ‘그래’라는 공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우리 사회가 경험하는 전쟁으로 일명 ‘문화 전쟁’(culture war)이 있다. 이것은 특정 가치, 신념, 실천을 둘러싸고 그룹 간에 벌이는 싸움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낙태, 동성 결혼, 이민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이다. 한국의 경우 이 용어를 잘 쓰지는 않지만, 그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의 팍팍함을 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한국 전쟁의 유산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여유롭지는 않아도 크게 무리 없이 연금으로 살아가시는 아버지는 지금도 먹고살 걱정을 하신다. 아무래도 한국 전쟁 난민으로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그날그날의 빵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시절의 트라우마를 여전히 간직하신 듯하다. 이런 어른들의 정서가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일상의 어려움을 쉽게 전쟁이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 것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생존을 위한 생계의 세계를 전쟁처럼 경험하는 동시에, 신념을 둘러싼 갈등으로 문화적 상징과 감정의 영역에서 또 한 차례 전쟁을 겪는, 그야말로 총체적 전쟁 상태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일상이 전쟁처럼 느껴질 때, 역설적으로 따라오는 게 고립감이다. 전쟁에서 선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한 가지 예상 밖의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전우애(camaraderie)이다. 미국의 경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무엇보다 힘들어 하는 것 하나가 목적의식과 단단한 우정의 상실로 인한 고립감이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옹호할 일은 결코 아니지만, 하다못해 전쟁터에서도 생긴다는 우애를 전쟁처럼 일상을 사는 지금 우리는 경험하기 힘들다면, 그 역설의 의미를 한 번쯤은 곱씹어 봄 직하다.

 

 

적군과 아군이 분명한 물리적 전쟁의 가시적 전선은, 아군의 응집을 도모하고 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지만, 또 한편으로 전쟁 영웅들은 적군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기개와 전략과 리더십은 (이를 갈면서라도) 인정한다. 말하자면, 그들만의 리그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쟁과 전쟁 이후(post conflict)의 경계도 모호하다. 많은 나라가 공식적인 정전 상태에 있으나 현지의 상황은 여전히 전쟁을 방불하며, 그래서 전쟁의 재발도 많다. 특히, 페미니스트 평화 전문가들은 여성에게 전쟁과 평화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도 말한다. 여성들의 안보(security)를 위협하는 성폭력은 전쟁 중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전선은 국경도, 지역 간도, 정치 진영도 아닌, 우리가 친밀함을 갈구하는 몸과 몸 사이에 그어지는 셈이다. 이렇게 가장 사적인 영역까지 전쟁터가 되고 나면, 자신을 내어 맡기고 무장 해제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 관계를 상실한 채, 우리는 각자 떠다니는 섬이 될 수밖에 없다. 고립감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평화를 정말로 원해야 평화가 있기 시작할 것 같다. 가끔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저 사람은 정말로 평화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평화라는 의제로 또 다른 전쟁을 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가는 경우가 있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평화보다 전운의 긴장을 느낀다면, 이 또한 역설이다. 인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인간은 좋은 것을 원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존재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재차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네가 정말로 선한 것을 원하느냐고 물으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평화는 먼저 평화를 정말로 원하는지 확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확인되었다면, 그다음에는 이 고립의 섬들이 다시 안전하게 만날 수 있게 생각의 전환이 좀 필요할 것 같다.

 

그 전환을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신성함(sacred)이다. 여기에서 신성함이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면 죽는 신성함이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흔들린다고 섣불리 건드렸다가 죽은 웃사처럼 말이다(삼하 6:6-8).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기고 누구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인데, 왜 기껏 허물어진 경계를 다시 세우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 말은, 자격에 따라 누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구분하던 건물로서의 성전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이제 그리스도인 각 개인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누구도 함부로 침해할(violate) 수 없는 존엄성(거룩함)을 갖추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고립을 당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도 하는 이유는, 함부로 선을 넘어 나의 거룩한 공간을 침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함부로 상대의 신성함을 침해하면 죽는다’라는 구약 성경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유지하는 게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안전하게 만나기 시작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는 비단 그리스도인끼리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자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넘지 말아야 할 신성함의 선을 넘거나, 아니면 엉뚱한 곳에 신성함의 선을 긋고 의인을 자처한다. 역시나 사랑을 전쟁처럼 배워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개인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역설할 때마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한다는 비판이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개인은 바로 이러한 신성한 개인들, 각자 자신의 거룩한 공간(sacred space), 즉, 성전이 된 몸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가진 개인들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오히려 개인이 개인되게, 즉, 내가 나일 수 있게, 내가 나대로 살아갈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인 사회이다. 나의 양해 없이 나의 거룩한 공간을 침해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 뭉친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이 침해는 침해(violation)를 넘어 폭력(violence)이 된다. 폭력을 규탄하는 사람의 폭력은 역설 중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모여서 무엇을 도모하기 전에, 아니 도모하는 도중에도 계속, 넘지 말아야 할 상대의 거룩한 공간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이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거룩한 공간, 거룩한 몸들에 대한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교회는 세상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교회 안팎으로 교회의 시대적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그 논리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결국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을 따라갈 이유가 없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기준, 더 높은 기준을 요구받는 무리이고, 그 더 높은 기준을 바라보며 살아온 믿음의 선조들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가 왜 세상과 같지 아니하냐’라고 하는 구절을 본 적이 없건만, 왜 그렇게 세상의 인정과 칭찬을 갈망하는지 모르겠다. 다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일까.

 

원래 대림절은 현현절에 세례를 받을 사람들이 40일간 회개하고 금식하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세례는 세상과 구별되는 표시이다. 교회의 구별됨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무엇으로 구별될 것인가를 묵상하기에 좋은 절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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