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리아드가 있을 것이다. 남이 볼 때 그것이 시시해 보이고 좁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 길리아드가 전부인 줄 알고 버티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처럼 알만한 것은 다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확신에서 그 자리를 지킨다면,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귀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람과, 덤으로 주어지는 뜻밖의 축복을 『길리아드』는 아름답게 그려낸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메릴린 로빈슨의 소설 『길리아드』의 무대는 미국 아이오와주의 길리아드다. 76세의 존 에임스 목사는 심장이 좋지 않다. 늘그막에 결혼해 얻은 7살 아들이 크는 모습을 오래 지켜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컸을 때 읽으라는 뜻으로 긴 편지를 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아들이 알았으면 하지만 당장에는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수많은 기억과 사건과 개념들에 관해 말한다. 편지에는 그가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그의 형 에드워드와 아버지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자.

 

형과 아버지

 

형 에드워드는 존 에임스 목사보다 열 살가량 많다. 부모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린 사무엘”을 주셨다고 믿으며 그를 키웠고, 그가 훌륭한 목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 성도들은 돈을 모아 그를 독일로 유학 보냈다.

 

몇 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첫날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가 식사 기도를 하라고 했을 때, 형은 “양심상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버지가 가장의 권위로 누르려고 하자 그는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으로 대답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는 ‘유치한’ 신앙을 버린 ‘장성한’ 무신론자였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충격에 빠진 부모를 두고 집 밖으로 따라 나온 동생에게 말한다. “존, 너도 언젠가는 배우게 될 사실이니까 지금 아는 게 나을 것 같다. 이건 침체야. 너도 벌써 인식하고 있을 테지만, 이곳을 떠나는 것은 미몽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아.”

 

에드워드는 동생의 “비판력 없는 신앙심에 충격을 줄 요량”으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선물한다. 그러나 형이 기대했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존 에임스는 목사가 되었고, 그러면서도 포이어바흐의 책을 좋게 보고 어린 아들을 위해 남겨두겠다고 한다. 언젠가는 읽으면 좋겠다며. 놀랄 내용도 없다면서. 그리고 존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이렇게 쓴다. “하지만 난 여기서 형이 말렸던 삶을 끝까지 살아왔고, 전반적으로 볼 때 아주 만족스럽단다.”

 

형과 충돌했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큰아들 에드워드가 관절염이 심한 어머니를 위해 해안 동네에 땅을 사서 부모와 함께 살 집을 지었다. 원래 존의 부모는 일 년간 그곳에서 지낸 후 길리아드로 돌아와서 살다가 날씨가 나쁜 겨울에만 그곳에서 보낼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존 에임스 목사가 첫해에 설교를 맡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존의 부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두 번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존이 첫 아내를 잃었을 때 한번, 거기를 떠나자고 존을 설득하기 위해 또 한 번. 두 번째 왔을 때 존은 아버지에게 설교를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한다. 설교자는 설교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니, 아버지의 신앙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 목회의 대타로 잠시 머물 생각이었던 존 에임스 목사는, 아버지가 형이 마련한 집에 주저앉으면서 길리아드에 ‘발이 묶인’ 셈이었다. 적어도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존에게 그를 “이곳에 묶여 있게 만들 뜻이 없었”다고 굳이 말한다. 놀랍게도 여기서부터 아버지와 형은 한목소리를 낸다. 큰 세상에 나가 “더 넓은 경험”을 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더 “큰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에드워드처럼 아버지도 “넓은 세상의 경이로움”을 말한다. 아버지가 볼 때 길리아드는 “시대에 뒤떨어진 곳”, 좁고 편협한 곳이다. 아버지는 존 에임스 목사를 그런 길리아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한다. 그는 자신이 믿고 설교했던 신앙이 “낡고 지방색이 강한 편협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며, 존에게는 그런 신앙을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존 에임스 목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거기 남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 때문에 발이 묶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신앙과 마음에 충실하게 주님을, 성도를 섬기고자 거기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무지해서 길리아드에 머물러 있다는 아버지의 판단에 분개한다. “난 에드워드는 아니었지만 바보도 아니었지. 하마터면 그 말을 입 밖에 뱉을 뻔했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존 에임스 목사는 “떠난 적도 없는 곳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충실하려는 대상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인 듯이 말하”는 아버지에게 그는 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처음 경험하는 지독한 한파가 밀어닥친 것 같았고, 그 바람은 여러 해 동안 불어댔”다. 그것은 그가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의지하고 전하는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어서다. “아버지는 나를 나 자신에게, 주님에게로 떠밀었어. 그러니 아쉬울 것도 없단다. 큰 슬픔을 느껴야 했지만, 거기서 배운 게 있으니까.”

 

아이오와주에 위치한 개울 ⓒpixabay.

 

설교와 목회

 

길리아드에서 존 에임스 목사가 보낸 충실한 삶의 가시적 증거가 그의 집 다락에 보관되어 있다. 45년간 1년에 55회씩 했던 2,250편의 설교문들이다. 설교문 한 편이 평균 30쪽이라면 67,500쪽. 책 한 권이 300쪽이라면 225권. 설교 횟수보다도 설교에 대한 본인의 평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깊은 소망과 믿음 속에서 모든 글을 썼고, 진실한 것을 말하려 애썼다. 멋진 일이었단다.”

 

전시에도 평시에도 한결같이 성도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했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었으며, 많은 이들의 결혼 주례를 맡고 수많은 이들의 임종을 지켰다. 그는 목사가 감당해야 할 일을 성실히 감당했고, 그리하여 교인들의 큰 존경과 깊은 사랑을 함께 받게 된다. 그것은 그가 형과 아버지의 뜻과 달리 길리아드에 남아 감당한 목회 사역이 안겨다 준 보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뜻깊은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로웠다. 젊은 아내와 아이를 출산 과정에서 한 번에 잃고 홀로 되어 목회한 수십 년 기간은, 목회에 충실했던 기간인 동시에 가정적으로는 “어두운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겨울이든 봄이든 매양 같은 겨울, 같은 봄 같았던 시절. 야구와 함께했던 시절. 라디오 중계로 듣다 수신에 문제가 생겨 잡음만 들려올 때면 경기 상황을 상상하며 보내던 숱한 시간들.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지킨 존 에임스 목사의 노년에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이제 그들 이야기를 해보자.

 

아내와 아들

 

존 에임스 목사가 노인이 된 지 오래였던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 기도하는 중 ‘그녀’가 쏟아지는 비를 피해 교회로 들어온다. 설교하는 존 목사가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그녀는 너무나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주 내내 그는 그녀가 다시 예배에 참석하기를 기대했고, 교회 문을 나설 때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자책했다. 그녀는 다음 주에 교회에 나왔고, 이후로도 계속 나왔다. 그리고 6개월 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다른 부인들과 함께 목사관을 찾아와 봉사하다가 혼자 와서 정원을 손보기 시작하더니 정원을 멋지고 풍요롭게 바꿔놓았다. 어느 저녁, 정원의 장미꽃 옆에 선 그녀를 보고 그는 말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을까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어. “저랑 결혼하시면 돼요.”

 

그녀가 그런 말을 하자 어찌나 놀랐던지 1분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단다. 그녀가 가버렸고, 나는 큰길로 쫓아 나가야 했지. 그녀의 옷소매를 잡을 용기는 없었지만 “당신 말이 맞소. 그러겠소”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그녀는 “그럼 내일 만나요”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가버렸지, 평생 그렇게 스릴 넘치는 순간은 처음이었어.

 

소설 전체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늘그막에 찾아온 이 뜻밖의 선물, 꿈같은 선물을 떠올리며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재혼할 수도 있었겠지. 성도들은 목사가 기혼자이기를 바라고, 나도 인근 100마일 안에 사는 온갖 집안 처자들을 소개받았지. 되돌아보면 뭐가 걸려서 그랬는지 그때 결혼하지 않고 네 어머니가 올 때까지 독신으로 지낸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돌이켜볼 때, 깊은 어둠 속에서 기적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 그 기간을 축복의 시간으로, 나는 믿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억할 만도 하지. 뭘 기다리는지는 나도 몰랐다만.

 

그가 길리아드를 떠났더라면, 그리고 그때까지 홀로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오랜 시간, 깊은 어둠의 시간을 견뎌낸 과거의 자신이 고맙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도 얻게 된다. 아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이자 기적, 아니 기적 이상의 존재”였다.

 

한 대목에서 그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아이의 머리칼을 묘사한다. 짙은 갈색 직모. 하얀 살결. 보기 좋은 얼굴에 가냘프고 깔끔하고 행동이 바른 아이.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이의 속성일 뿐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그런 속성들을 가진 실체, 아들 자체다.

 

다 좋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네 존재야. 내게 있어 ‘존재’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비범한 것이란다.

 

그러나 길리아드를 지킨 존 에임스 목사에게 찾아온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만이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사나이가 나타나 존 목사의 잔잔한 노년을 흔들어 놓는다. 덕분에 이 소설은 노인의 느긋하고 나른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 삶의 기록이자 고백이 된다.

 

아이오와주 옥수수 농장 풍경, ⓒpixabay.

 

존 에임스 보턴

 

존 에임스 보턴이라는 이름은 소설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거듭거듭 등장한다. 존 보턴은 존 에임스 목사의 오랜 친구인 보턴 목사의 아픈 손가락과 같은 아들이다. 보턴 목사가 친구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존 에임스 목사가 기억하는 존 보턴은 어딘가 늘 미심쩍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저질렀던 숱한 장난들도 그랬지만, 특히 그가 길리아드를 떠나기 전에 저지른 일은 존 목사로서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보턴 목사는 사랑하는 아들의 귀향을 간절히 기다리고 돌아오자 그저 기뻐할 뿐이지만, 존 에임스 목사는 존 보턴의 귀향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런데 존 보턴은 자꾸만 에임스 목사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야구를 가르치고 아내의 호의를 얻는다.

 

존 에임스 목사는 자신을 괴롭히는 막연한 불편함의 정체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열해 보이고 속을 알 수 없는 존 보턴은 과연 무슨 속셈으로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그리고 무슨 꿍꿍이로 자꾸만 이렇게 다가오는 걸까. 왜 우리 가족에게 접근하는 걸까? 너무 늦기 전에 아내에게 경고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존 보턴은 몇 번이나 존 에임스 목사를 찾아와 대화를 시도한다. 그중 한번은 예정론에 대해 질문한다. “목사님, 예정론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그 질문을 받고 존 목사에게 떠오른 생각은 ‘그래, 예정론 따위를 꺼낼 줄 알았지’였다. 그리고 목사가 복잡한 이슈라고 답변을 회피하자 존 보턴은 이렇게 바꿔 묻는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할 길 없이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존 에임스 목사는 이 질문이 자기를 골리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고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존 보턴의 동기를 의심하고 어떻게든 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존 에임스 목사와 달리, 목사의 아내는 동일한 문제의식이 담긴 질문으로 대화에 끼어든다. “구원받는 것은 어떤가요? 사람이 변할 수 없다면, 구원에는 큰 목적이 있을 것 같지 않네요.”

 

사변적이고 신학적인 트집 잡기로 보였던 이 질문이 인생이 꼬이고 막혀버린 ‘존 보턴이라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묻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는 이 질문을 통로로 삼아 존 에임스 목사에게 손을 내밀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번번이 겉돌다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마침내 존 보턴은 자신의 가장 깊은 사정을 털어놓는다.

 

에임스 목사는 존 보턴을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지만,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는 그로서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존 보턴은 길리아드를 떠나기로 하는데, 에임스 목사는 정류장으로 가는 그를 따라가 축복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존 에임스 보턴은 모자를 벗어 무릎에 놓더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목사는 민수기 6장 25-26절의 말씀으로 전심으로 그를 축복한다. 그리고 상대가 “눈을 뜨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자” 이렇게 덧붙여 축복한다. “주님. 이 사랑받는 아들이자 형제요 남편이며 아버지인 존 에임스 보턴을 축복하소서.”

 

그러자 존 보턴은 꿈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존 목사를 쳐다보고는 말한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존 보턴의 말투에서 목사는 이런 걱정을 하게 된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사랑받는 아들, 형제, 남편, 아버지로 여기지 않아서 그런 축복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는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그 말뜻 그대로 진심을 담아 축복한 것이었다. 그는 존에게 그를 축복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다음 그는 아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사실 그 한순간을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 온 셈이지.”

 

사람마다 인생의 절정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내 인생에 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은 때 말이다. 존 에임스 목사는 큰 어려움과 낙심 가운데 있는 존 보턴을 축복하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자신이 신학교를 다니고 그 오랜 세월 목회자로 살아온 것이었다고 말한다. 대단한 일을 이룬 것 같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한 사람을 위로하고 축복하는 것은 그 가치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이라고, 이 노목사는 아들 앞에서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의 길리아드, 나의 분깃

 

길리아드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존 에임스 목사도 아들이 장성하여 그곳을 떠날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길리아드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임을 확신했고, 큰 슬픔과 깊은 외로움 가운데도 그 자리를 신실하게 지켰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교인들을 섬기고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축복까지 덤으로 누렸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축복도 해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리아드가 있을 것이다. 남이 볼 때 그것이 시시해 보이고 좁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고 편협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라 길리아드가 전부인 줄 알고 버티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처럼 알만한 것은 다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확신에서 그 자리를 지킨다면,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귀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람과, 덤으로 주어지는 뜻밖의 축복을 『길리아드』는 아름답게 그려낸다. 올해 나는 내가 이미 나름의 길리아드에 있으며, 그것을 성경에서는 ‘분깃’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어느 분의 도움으로 되새기게 되었다. 우리의 길리아드, 우리의 분깃이 우리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축복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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