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목적은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담자가 자신의 내면과 주변 환경을 들여다보고 직면하는 과정을 통해 통찰하는 힘을 키우고 성장하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한 사람이 잘 서기 위해 상담자는 내담자의 마음을 듣고 내담자는 자신의 마음을 듣는 데 집중한다. ‘Heart’(마음)라는 단어에는 듣는(hear) 기술(art)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본문 중)
곽은진(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상담학 교수, 기윤실청년상담센터WITH 공동소장)
“선생님, 제가 이번에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는데 앞에 나가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번에 대표 기도를 했는데 머리가 하얘지고 말이 안 나와서 정말 어찌할 바를 몰라 크게 당황했습니다. 불안한 제 모습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스피치 학원에 가서 교육도 받고 담력 훈련도 받았는데 효과가 그다지 없어요. 예전에 한번 선생님을 뵈었던 적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정말 많이 좋아졌는데, 교회 전도사님이 한번 상담을 받아보라고 해서 연락드렸어요. 십여 년 넘게 이 기도 제목으로 밤마다 철야하고 새벽 기도하고 했는데…쉽사리 바뀌지 않고 늘 반복되는 모습에 저도 애도 지쳐가네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거예요. 전도사님도 상담을 받으셨다고 저도 한번 받아보라고 하셔서요.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하시니까 한번 받아보려고요.”
“정말 부끄럽고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실은 교회 권사님 아이가 아니고 제 아이 이야기입니다. 목회자 자식이 이런 문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고…제 주변 목사님들도 이런 문제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평생 안고 가야 할지….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고민했지만 자식 일이라 앞뒤 보지 않고 연락드렸습니다.”
기독교 상담자인 내게 이런저런 이유로 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간절함을 지니고 있다. 평신도든 교역자든 목회자든 예외가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과 지위에 상관없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온전함에서 벗어나 있다는 위기감이 이들을 상담으로 이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치유받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였고, 강건한 신앙의 힘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이들이 상담을 의뢰한 것은 말씀이 이들에게 무력해서도 아니요, 하나님을 의심해서도 아니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상담 또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택하였을 뿐이다,
25년 동안 상담자로 지내면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요즈음처럼 상담에 대한 수용적 태도나 개방된 인식이 널리 공유된 때를 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상담을 공부하기 시작할 무렵을 떠올려 보면, 이러한 변화는 참으로 놀랍다. 당시에는 교회 내에서 상담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비성경적이고 비신앙적인 태도로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상담의 필요성을 언급하면, ‘말씀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치유의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성경보다 하나님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 교회 내에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아닌 일반 심리학적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접근인가?’ 등의 질문을 받곤 했다.
이 당시에는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기도나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우울과 불안의 증상을 보이는 것은 마귀의 장난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전능자이며 치유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이 인간이 만든 방법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등의 인식이 만연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 내 교인들에게서 보이거나 호소되는 정서적 증상은 존재했고 도움은 필요했지만, 기도나 신앙적 방법 외에는 다른 해결 방법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과적 치료나 상담은 치유의 한 방법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담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인본주의적 접근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선입견도 상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강화했다. 그 결과 고통은 오롯이 아픈 자들의 몫이 되었다. 기도원 등을 전전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 만성화된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기독교 내에 상담이 수용되는 변화 안에는 이런 혼란과 아픔의 시간이 존재한다.
『내면으로부터의 치유』를 쓴 탐 마샬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드러나는 어려움은, 교회 내 양육과 말씀에서 ‘관계’를 강조하지만 정작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간과해 왔기에, 많은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이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또, 감정을 드러낼 대상이나 장소도 없어서, 오히려 세상이나 마귀의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말씀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관계의 토대인 마음이라는 정서적 측면의 경험으로 형성된다. 관계는 내면에서 느껴지는 서로에 대한 생명력이다. 생명은 죽기 전까지는 살아 움직인다는 특징을 갖는다. 인간이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기에, 우리가 억압하거나 과도하게 분출하거나 또는 무감각하게 만든 감정을 가진 채로는 관계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상담과 관련된 교회 내의 지금 이 변화는, 한편에서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서적 어려움의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내적 정서적 영역을 이제 보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사람을 기능 중심으로, ‘충성된 일꾼’으로 헌신했는가 하는 관점에서만 보았다면, 이제 사람의 존재 자체, 즉,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까지도 어떤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외부에만 집중되었던 관심이 내부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상담에 대해 수용적 태도를 갖게 되고, 상담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일으킨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담자가 자신의 내면과 주변 환경을 들여다보고 직면하는 과정을 통해 통찰하는 힘을 키우고 성장하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한 사람이 잘 서기 위해 상담자는 내담자의 마음을 듣고 내담자는 자신의 마음을 듣는 데 집중한다. ‘Heart’(마음)라는 단어에는 듣는(hear) 기술(art)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그 대상이 누구이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듣는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라는 말씀은 피조물의 내면을 보시며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시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를 이해하고자 보이시는 모습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삶에 매번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의지를 사용하도록 기다려 주시며 지켜봐 주신다. 마찬가지로, 상담의 한 역할은 상담자와 내담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듣고 이해하면서, 내담자가 자신이 원하는 온전한 모습으로 서도록 이끌거나 따라가 주는 것이다. 상담은 인내와 기다림의 과정이다.
치유 사역에서 종종 접하는 “하나님이 치료하시고 사람은 돌본다”(God cures, Man cares)라는 말이 있다. 치유 사역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특히 상담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 전통의 편견을 뛰어넘었던 예수님처럼, 고통과 상처의 회복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모든 도구를 사용하며, 그 일을 할 권한을 위임받는다. 기독교 상담은 내담자의 정서에 집중하고 들으면서 마음을 교류하는 도구로서, 이 돌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 역사, 즉, 그분의 사랑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해 있는 모든 것은 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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