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놓고 남남 갈등이 심해지고 정치적 대립이 첨예해지는 상황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30년 전 군 장성 출신 대통령이 마련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상생, 평화의 남북 관계 초석이었음 환기한다면, 초정파적인 대북 정책과 평화·외교·안보 정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당시 고위급 회담에 참여하고 정상 회담을 수행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로마서 12장이 대북 포용 정책의 근거였다고 증언한다. (본문 중)

윤은주(뉴코리아 대표, 북한학)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남북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1991년 12월 13일 채택되어 1992년 2월 19일부터 발효됐다. 전쟁 이후 적대적 대결 속에 있던 남과 북이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침략하지 않으며, 교류 협력을 시작하겠다는 남북 간 종전 합의였다. 이보다 앞서 9월 17일,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독립적인 주권 국가임을 천명했다. 이처럼 이미 남과 북은 30년 전에 ‘사실상의 종전’ 상황을 실현하고자 했고, ‘남북 연합’에 이르는 길을 닦고 있었다. 북한의 핵 문제가 국제 사회 이슈로 등장하기 두 해 전의 일이다.

 

2018년에는 세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졌고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선언, 부속 군사합의서가 체결됐다. 이로써 남북 사이에서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군사 분야에서도 평화를 향해 가는 로드맵이 그려졌다. 이후 남북 DMZ 내 GP 철수, 판문점 구역 비무장화, 화살머리 고지 같은 대표적 유해 발굴 현장의 지뢰 제거 등 합의 실행이 따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북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 중국의 이해관계가 어긋나면서 한반도 냉전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지정학상 미소 냉전의 첨병 역할을 했던 한반도는, 냉전 구조 해체가 지체되는 가운데 미‧중 패권의 전장(戰場)으로 변모하고 있다.

 

북한의 핵 문제는 남북 관계에서 풀어질 사안이 아니다. 이전과 다름없이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 문제의 해법을 구하는 데 남북 관계를 지렛대로 삼고 있다. 북한은 초창기부터 자신들의 핵 개발이 체제 안보와 에너지 활용을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실사에서 신고 내용의 불일치 문제로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이 1992년 1월 처음으로 북미 수교를 타진하며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지 않는 평화 협정 체결을 제안했지만, 곧 무너질 수 있는 정권과 수교할 필요가 없다고 본 미국의 판단으로 무산됐다.

 

당시에는 북한 정권이 실권하면 다른 체제 전환 국가들처럼 다당제가 시행되고 경제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1990년 10월에 독일이 통일되고 김일성과 혁명 동지였던 루마니아의 차후 세스코의 처형이 공개되면서, 북한 정권이 몰락하면 흡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해 보였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국면에서 영변 핵시설을 군사적으로 타격하는 작전 계획이 발표되는 가운데 한반도에 전운(戰雲)이 깃들었다. 다행히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씨는 그대로 남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수령이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묘향산 집무실에서 임박한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해 내부 경제 현황을 파악하던 중, 보고서 내용이 현실과 달라 역정을 내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산세가 깊은 묘향산에 설상가상으로 기상이 악화되어 응급 헬기가 뜰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카터 전 대통령의 권면을 수용해서 준비하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최초 정상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김일성 수령 사망 국면에서 조문단 방북을 불허한 김영삼 대통령은 이후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며 북한을 외면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서명, ⓒ국가기록원

 

노태우 정부 북방 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남북기본합의서는 적대적 남북 관계를 상생 평화의 관계로 전환하자는 신호탄이었다. 예비회담이 시작된 1989년 2월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5차례 진행된 남북 고위급 회담은 군사, 경제, 사회문화 세 분과의 부속 합의서도 끌어냈다. 총리를 단장으로 한 고위급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후 정상 회담은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김영삼 정부가 북한 핵 문제를 남북 대화와 연계시키지 않고 분리 대응했다면, 김정일 위원장과 최초의 정상 회담이 가능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를 승계하여 대북 포용 정책을 펼쳤다. 북핵 위기 국면에서 진행된 정상 회담은 국제 관계 속 남북 관계의 위치를 잘 보여 주었다. 금창리 핵 개발 의혹으로 다시금 불거진 미국과 북한의 신경전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미국에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단계적 접근을 권면했다. 일명 ‘페리 프로세스’가 채택된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고, 곧바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이어졌고, 북미 코뮤니케(Communiqué: 공동 성명)가 채택됐다. 북미 수교까지는 정상 회담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를 견인한 첫 장면이다.

 

2018년 이후 남북 관계는 다시금 북미 관계를 추동(推動)하고 있다. 4‧27 판문점(남북), 6‧12 싱가포르(북미). 9‧19 평양(남북), 2‧27 하노이(북미), 그리고 6‧30 판문점(남북미) 정상 회담이 이어졌다. 그러나 2021년 12월 현재,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소강상태에 빠져 있다. 유례없는 코로나19 국면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남북한과 미국의 셈법이 좀처럼 공통분모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새로 집권한 바이든 대통령과 5월 21일 정상 회담을 하고 북미 정상 회담의 새판을 짜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22년 3월 9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여야의 두 유력 후보는 국민 앞에 자신의 대북 정책과 평화·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해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기존의 남북 합의서들을 어떻게 계승하고 개혁할 것인지도 밝혀야 한다. 또한, 냉혹한 국제 사회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의 국가 이익은 무엇이고, 남북의 민족적 이해는 무엇인지 후보의 관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헌법 4조와 66조 등에서는 대통령의 ‘평화적 통일’ 직무를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선택받기 원하는 후보라면, 이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북한을 놓고 남남 갈등이 심해지고 정치적 대립이 첨예해지는 상황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지만 30년 전 군 장성 출신 대통령이 마련한 남북기본합의서가 상생, 평화의 남북 관계 초석이었음을 환기한다면, 초정파적인 대북 정책과 평화·외교·안보 정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당시 고위급 회담에 참여하고 정상 회담을 수행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로마서 12장이 대북 포용 정책의 근거였다고 증언한다. 용서와 화해는 입에 쓴 약과 같다. 그 열매로 얻게 되는 평화가 포도나무의 포도송이처럼 달다고 고백하는 날이 속히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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