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자산어보』가 쓰인 1814년을 기점으로 대략 70여 년 정도 뒤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1885년 이후는 어떠했을까? 서양 학문으로 고등 교육까지 받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우리나라의 과학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본문 중)

성영은(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2022년 새해를 맞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작년에 서울뿐 아니라 서울 주변의 지리와 근현대사에 밝은 전직 교장 선생을 알게 되어 기회 있을 때마다 그분 따라 서울 여기저기를 걷고 있다. 그런데 마침 새해 첫 코스가 합정역 주변을 도는 14km였고, 그 코스의 마지막에 이 묘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선교사 묘지를 처음 방문하게 되어 큰 기대를 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상상한 것보다 그 규모가 무척 작았다. 그렇지만 책에서만 보던 선교사들의 묘와 묘비를 직접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400여 기가 넘는 외국인 묘 중에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는 145기에 불과해서 선교사 묘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여튼 작년 한양도성길 코스를 걷던 중에 근대 초기 학교나 교회들을 들르거나 지나치면서 보고 들었던 선교사들이 여기에 묻혀 있다는 사실에 이런저런 감회가 들었다.

 

필자는 “영화 <자산어보>와 조선 후기의 과학”이라는 이전의 글에서 우리나라에 서양 과학이 소개된 조선 후기의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는 중국에 온 로마가톨릭의 예수회나 후대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서양 과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홍대용, 최한기 등 몇 학자들이 책까지 썼지만 별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산어보』가 쓰인 1814년을 기점으로 대략 70여 년 정도 뒤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1885년 이후는 어떠했을까? 서양 학문으로 고등 교육까지 받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우리나라의 과학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개항 이후 조선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그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아졌다. 그러던 중 1881년 청나라에 영선사(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파견했던 시찰단)를 파견한다. 이때 정부 차원에서 한역(漢譯) 서양 과학기술 서적들을 200여 종 이상 들여왔다. 이 책들은 대부분 프라이어(John Fryer) 등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1870년대 번역되거나 편집된 것들이다. 물론 선교사들은 선교 목적으로 과학기술 서적들을 번역했다. 그래서 과학 번역 서적인데도 원전에 없는 ‘천지만물을 상제(하나님)가 만들었다’와 같은 표현들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학 용어는 주로 중국 고전에서 따왔다. ‘사이언스’(science)라는 용어는 ‘격치(格致)’ 혹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번역했는데 ‘사물의 이치와 까닭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이해되지만, 선교사들이 이렇게 번역한 것은 ‘하나님의 이치를 연구’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일본식 번역어인 ‘과학’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도 서양의 과학을 이 한역을 따라 ‘격치’ 혹은 ‘격물’이라 불렀다.

 

188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원산학사는 이런 한역 서적들의 강독을 통해 서양의 산수(算數)나 격치를 교육했다. 1882년 미국과 수교한 후 1884년에는 미국에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한다. 이때 근대 교육을 위해 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데, 1886년 길모어, 벙커, 헐버트 등 신학을 공부한 3명이 교사로 입국하여 그해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에서 가르치게 된다. 이 육영공원에서도 격치를 가르쳤다. 길모어는 3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벙커와 헐버트는 계속 남아 활동하다가 양화진에 묻히게 된다. 벙커는 육영공원에서 10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배재학당의 학감이 되었고, 아펜젤러 사후에는 교장이 된다. 벙커 부인인 엘러즈는 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개칭,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의 의사로 와서 1887년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 전신)을 세운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라는 근대 천문학과 기상학이 포함된 한글 교과서를 집필하고 나중에 한성사범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헤이그 고종 밀사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었다. 하지만 해방 후 다시 돌아와 한국 땅에서 죽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 ⓒpixabay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는 입국하자마자 그해 세워진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같은 시기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으로 세운 배재학당은 기독교 정신과 개화사상을 위한 근대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처음 시작했던 학생들이 고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과학 과목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도 바로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 전신, 뒤에 연희전문학교 분리)을 세우는데, 여기서도 성경, 국어, 영어 외에도, 점차 과학, 체육, 음악, 역사, 지리 등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일반 과목들을 가르쳤다. 스크랜튼이 세운 이화학당이나 좀 더 뒤 베어드가 세운 평양의 숭실학당도 마찬가지였다. 위에 언급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베어드 이분들도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다.1) 당시는 공식적으로 포교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들은 교사나 의사 신분으로 들어와 교육이나 의료를 통해 선교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과학에 대해서는 중국 선교사들처럼 기독교 자연관을 가지고 가르쳤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독립신문> 주필을 맡았던 아펜젤러는 이 신문에 서양의 근대 과학을 창조주의 섭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의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민족 근대 학교들도 앞다투어 과학 등 근대 교육을 실시한다. 1895년에 이르러 소학교령이 반포되어 일반 국민에게 근대 교육이 시행되기 시작하고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도 세워진다. 소학교와 사범학교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르치는 교과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가들은 대체로 1900년 전후까지 우리나라의 과학은 전문성 없는 피상적이고 초보적 단계에 있었다고 평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는 서양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선교사들이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교양으로 배운 과학 과목들을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르쳤지만 전문적이지는 않았다.

 

과학 전문가와 교사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근대 과학이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 무어는 곤당골교회(승동교회의 전신)를 설립하면서 교회가 신분 차별을 넘어서야 함을 가르쳤고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신분 차별을 넘어서는 교회를 이루어 냈다. 그 덕분에 백정 출신으로 곤당골교회 초대 장로가 된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이 교회 예수학교에서 배운 후 1908년 제중원 의학교(세브란스의학교로 계승)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의사이면서 화학 교사가 된다. 그는 오성, 중앙, 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생물학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등에서 졸업하고 유학을 가거나 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과학적 전문성을 갖춘 이들 상당수는 과학보다 당장 시급한 독립운동에 더 마음을 쓰게 된다.

 

우리나라의 근대 과학기술 도입에 대한 평가만큼 선교사들의 기여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이나 일본을 거친, 그것도 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양 학문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에 선교사들과 그들이 세운 학교를 통해 서양 학문을 직접 접해 본 학생들에게는 그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신분과 남녀 차별의 전통을 넘어서는 교육이 기독교 정신으로 실천되었으니 그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선교사들도 인정하듯,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서당이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평민들도 대체로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고, 가르치는 학자를 존중하는 우리의 풍토가 과학기술 도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양화진 선교사 묘역 방문이 나에게는 개화기 과학을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에 대한 세상과 교회사의 평가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그들이 소개했던 과학이 지금의 잣대로 보면 어설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물설고 낯선 나라에 와서 수천 년간 가로막혔던 장벽들을 하나씩 허물어 갔던 선교사들과 우리 선조들의 신앙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아펜젤러는 목포로 가다가 선박 충돌로 익사하여 시신을 못 찾는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양화진에 묻혔다. 베어드는 평양에 묻혔고, 양화진에는 그의 기념비와 대를 이어 선교사였던 두 자녀들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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