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끝부분에 던져진 “교회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개별 독자를 넘어 한국 교회가 끝까지 끌어안아야 할 큰 질문이자 과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시종일관 교회는 ‘로마의 평화’가 아닌 ‘예수의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본문 중)
[서평]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
이상규 지음 / SFC출판부 / 287면 / 15,000원 / 2021.11.10.
김복기(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선교사, 평화저널 발행인)
매년 새해를 맞이하면 올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작성해 본다. 지난해에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을 추리고, 또 새로이 발간된 책을 살펴보는 일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여러 책 중에 눈에 들어온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는 감개무량함으로 다가왔다. 평생 신학교 강단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던 저자의 수고로 한 줄에 꿰어진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책을 받아 드니, 가뭄에 단비를 만난 느낌이었다.
원래 서평을 쓸 때는 책의 모든 면을 꼼꼼히 살핀 후 책의 장점은 칭찬하고 단점은 비판하는 것이 상례지만, 이 책은 예외를 두고 싶다. 하여 일부 수정해야 할 부분 한두 곳은 제쳐 두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이 책을 상찬하고 싶다.
첫째, 폭력의 역사, 전쟁의 역사를 개괄한 책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가끔 인문학 서가에서 평화사를 주제로 한 책도 몇 권쯤은 찾을 수 있지만, 기독교 관점에서 정리한 평화 신학 혹은 기독교 평화사 책을 찾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 중심’이었던 우리 사회의 평화 담론이 2000년대 이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보다 다양하고 일상에서 모두가 누리는 ‘일상적’ 평화 담론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맞추어 기독교 평화사를 정리해 출간했다는 점에서 우선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바이다.
둘째, 이 책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인 ‘평화’를 다루며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병치하여 설명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약과 구약이 다루는 전쟁과 평화의 난제들을 비켜 가지 않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예수의 평화’, 즉,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라는 성경의 핵심 가치를 끌어안음으로써 폭력이나 전쟁이 아닌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독교 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51~52).
셋째, 성경적 관점에 이어 초기 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를 1)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며 비폭력, 비전, 반전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평화주의’(Pacifism), 2)가능한 전쟁을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전쟁이 의로운 것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정당전쟁론’(Just war theory), 그리고 3)전쟁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데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로 압축해 설명하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초기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 이해, 기독교 국교화와 더불어 발전하게 된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설명, 중세 시대의 성전론과 이후의 발전사를 개관하는데, 메노나이트 교회사가이자 평화학자였던 가이 허쉬버거의 『전쟁, 평화, 무저항』(1944)이나, 예일대의 교회사가이자 종교개혁 연구의 권위자였던 롤란드 베인턴의 『전쟁, 평화, 기독교』(1979) 등의 연구와 흐름을 같이 한다.
넷째,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에 논의되었던 개혁자들의 평화에 대한 관점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과 개혁자들, 즉, 에라스무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이 토대를 두었던 것이 정당전쟁론이었음을 밝히는 가운데 이들이 견지한 평화에 대한 태도들의 작고 큰 차이점들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우선, 에라스무스는 정당전쟁론을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자로 전쟁의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군주, 귀족, 성직자, 지식인들에게 평화를 호소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정당전쟁론과 두 왕국 이론에 근거하여 국가의 공권력을 하나님께서 위임한 것으로 보았다. 즉, 권력 행사의 정당성, 군인의 직제 인정 등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폭력이나 전쟁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루터를 평화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는 전쟁의 해악이나 폐해를 지적하기는 하였으나, 정당전쟁론에 근거하여, 복음과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결국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벌어진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로 잘 알려진 칼뱅 역시 정당전쟁론에 의거하여 합법적 국가 권력의 법 집행은 정당한 것으로 이해했다. 당연히 전쟁도 합법적이라고 보았다. 개혁교회의 세례를 가장 잘 받은 한국 교회가 왜 정당전쟁론 외 다른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을 생각하기 힘들었을지 독자들이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7장).
다섯째, 다른 책과 차별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개혁가들을 다룬 후 곧바로 계몽주의 시대로 넘어가지 않고, 재세례파와 평화주의를 소개한다는 점이다. 개혁가들과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전적으로 대비되는 재세례파의 연원, 신학, 특성, 평화주의 입장을 짧지만 굵게 소개하였다. 재세례파는 급진적(근원적) 개혁 운동이다. 운동 초기부터 주장했던 1)교회와 국가의 분리 2)유아 세례 거부 3)신자들의 세례 4)폭력과 전쟁을 반대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 운동 5)슐라이트하임 신앙 고백서 등을 통해 이들의 비폭력 사상을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며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었다. 이뿐 아니라, 20세기 초에 결성된 ‘역사적 평화교회’(historic peace church)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어떻게 평화주의 이상을 지켜왔는지를 설명하였다. 이 부분(8장)은 평화사를 통해 들여다 본 아나뱁티스트 운동 약사로 소개해도 손색이 없다.
여섯째,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평화주의를 넘어 계몽주의 평화 사상가들과 운동의 맥을 잘 짚어 주었다. 루소의 국제 평화에 대한 개념이라든가, 칸트의 영구 평화론은 평화 사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기에 더욱 값지다. 퀘이커를 비롯하여 재세례파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계열의 평화교회들과, 톨스토이, 간디, 안중근, 니버, 요더 등의 평화주의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도 인상 깊다. 오기(誤記)로 생각되지만, 282쪽에서 평화론을 제시한 이들 중, 윌리엄 펜, 톨스토이, 존 요더 등을 “광의의 정당전쟁론 전통에 서 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짧은 지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흐름을 한국전쟁 이후부터 최근의 평화통일론까지 잘 정리하였다. 통일 담론으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박정희 정권의 선 건설 개발 후 통일론(후에 선평화 후통일로 발전),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1988년의 7·7선언, 1991년의 남북한 UN 동시 가입,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최근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에 이르기까지 핵심을 잘 다루었다. 물론 통일 평화 담론에 관한 내용이 조금 더 세부적으로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이 책의 목적이 통일 담론 이해가 아니므로 기독교 평화 이해를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다.
책 끝부분에 던져진 “교회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개별 독자를 넘어 한국 교회가 끝까지 끌어안아야 할 큰 질문이자 과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시종일관 교회는 ‘로마의 평화’가 아닌 ‘예수의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는 평생 교회사를 연구하고, 강의하고, 몸으로 실천해 온 교회사가의 저술이기에 이처럼 일목요연하고, 명료하고, 구체적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기독교인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평화맹’으로 살기 쉬운 오늘날, 이 책이 우리의 평화맹 상태를 탈출하도록 돕는 소중한 선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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