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몇 차례 끝에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선 엄마와 달리, 아들은 아예 직장 생활은 생각도 하지 않는단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피곤해 하는 집안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대학도 선택하고 하는 모습이 생경하긴 하다. 엄마는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냥 성적 맞춰서 대학과 학과를 골랐지만, 아들은 초등학생부터 한결같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았던 만큼 미리미리 정보 수집도 꽤 했나 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팔뚝만한 사이즈로 태어나 코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게 젖을 빨아대던 아기 때의 모습이 아직도 내 눈에 선연한 아들이 이제는 고개가 꺾어지게 올려다봐야 눈을 맞출 수 있는 키로 자라 생애 첫 투표를 한단다.
지금의 정부를 키운 동료들이 길거리로 명동성당으로 몰려갈 때도 마음은 고뇌해도 몸은 도서관과 교회를 오가던 엄마였건만, 동료 세대가 시작한 참교육을 착실히 받은 아들은 중학생 때 이미 촛불을 들어보았다.
엄마의 정치의식은 광장이 아니라 가정에서 깨어났고, 내가 노동자는 되어 보지 않았으나 적어도 가사 노동자로서 부당하게 경험한 것들이 (여기에 자세히 적기에는 좀 많이) 있기에 십여 년간의 투쟁 끝에 결국 집을 나와 머나먼 곳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엄마의 투쟁으로 아들은 졸지에 어려서부터 청소, 설거지, 빨래 널고 개기를 배워야 했다.
엄마의 투쟁도 한편으로는 모순덩어리였다. 한번씩 한국에 올 때마다 일체 아들을 부엌에 들이지 않고 내가 나서서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행여 아들이 나중에 자기 아내보다 더 많은 집안일을 하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 아닌 걱정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인간의 모순을 깊이 알면 알수록 무슨 무슨 ‘스트’(-ist) 하는 정치적 레이블은 달지 않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레이블은 자랑스럽게 달 수도 있지만, 레이블이 떼이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충성의 표시를 보여야 하고, 그 충성의 행동이 종종 프로크루테스의 침대가 되어서 팔다리를 댕강댕강 잘라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순을 깨달은 엄마가 페미니스트 의식은 있으나 페미니스트는 아니라는 애매한 말로 페미니스트 프레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사이, 어느덧 아들이 (세는 나이로) 이십 대에 접어들면서 이대남이라는 프레임을 상대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이대남’이 되어버린 아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반 여자아이한테 맞고 와서 왜 여자는 남자를 때려도 되는데 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되냐고 묻기도 했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출산이 더 힘든가 징병이 더 힘든가를 놓고 반 여자아이들이랑 수업 시간에 토론도 했단다. 중학교부터 남녀가 분리되어 미팅이라는 것으로 잠시 이성을 접할 뿐이었던 엄마 세대와는 사뭇 달라진 대화임이 틀림없다.
촛불까지 들었던 아들이 무엇보다도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검열이란다. 창작을 꿈꾸는 아들은 작가가 이거 내가 그려도 되나, 써도 되나 고민하게 만드는 일명 ‘깨시민짓’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다. 요즘은 그런 말도 쓰나 하여 엄마는 부지런히 검색을 했고, 몇 개의 사이트를 뒤지고 나서 아들의 반발은 소위 인간의 가장 기본적 도덕의 하나인 언행일치에 어긋나는 깨인 시민 코스프레에 대한 것이겠구나 했다. 깨시민의 허세는 싫지만 그래도 상황에 따라 깨인 시민의 모습을 보여줄 줄은 안다고 하니 엄마보다 빠른 처세력이 아닐 수 없다.
직장 생활 몇 차례 끝에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선 엄마와 달리, 아들은 아예 직장 생활은 생각도 하지 않는단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피곤해 하는 집안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찍부터 진로를 정하고 거기에 맞춰서 대학도 선택하고 하는 모습이 생경하긴 하다. 엄마는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냥 성적 맞춰서 대학과 학과를 골랐지만, 아들은 초등학생부터 한결같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았던 만큼 미리미리 정보 수집도 꽤 했나 보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좋은 대학의 랭킹에 미련을 둔 엄마가 슬쩍 한 대학의 이름을 꺼내니, 엄마는 내가 교수 뭐 그런 게 되기를 원하냐며 한 마디 던진다. 심지어 그 대학은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곳도 아니란다. 한번도 아들한테 교수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건만, 엄마의 학벌이 암암리에 부담이 되었던지 자기의 길은 엄마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못 박아 두려는 듯했다.
사실 나도 교수 되려고 공부한 건 아니다. 게다가 ‘연구’ 교수는 교수라기보다는 잠시 써먹는 계약직이고 갈수록 비전임 비정년직이 늘어나는 대학 사회에 생긴 많은 임시직에 불과하다. 나의 필요에 따라 감사히 일하는 곳이지만, 연구교수가 교수 축에 안 든다는 것을 가르쳐 준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채용한 대학 사회이다. 그래도 밖에서는 아직 ‘교수’라는 타이틀이 뭔가 있어 보이는 매직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아들 세대는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친구들의 진로가 제법 다양했다.
아들이 선택한 학과에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야 일이 소위 ‘남자다운’ 일은 아니라는 말도 된다. 프리랜서에도 급이 있는데, 마음대로 일을 골라잡을 수 있는 고가의 프리랜서와 일이 끊이지 않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하는 프리랜서가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어느 정도 일의 조절이 가능한 중간급이 있지만, 대개가 불안정하게 산다. 그래서 결혼은 할 수 있을지, 하게 된다면 어떻게 생활할지 물어보면, 자기는 그냥 집에서 살림해도 괜찮단다. 어차피 프리랜서로 일할 테니 자기가 살림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챙기는 것도 할 수 있단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소설가 박민규도 직장 다니는 아내의 배려로 돈은 벌지 않고 살림하면서 3년간 글만 써서 데뷔했고, 소설가 김연수도 안정적인 직장은 아내가 가지고 있고 자기는 딸아이 챙기면서 글을 쓰나 보다. 번역가 김고명도 아내가 더 잘 벌기 때문에 자기가 번역가로 살아도 부담이 되지 않는단다. 소위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버틸 수 있는 남자들 곁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아내들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투쟁해야 했던 때를 생각하면, 직업에 대한 생각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도 한결 유연해진 듯하다.
대화 중간중간 텐션이 올라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단골집에서 기름기 쫙 뺀 참나무 숯불통탉과 새로 개척한 옛날통닭 집에서 프라이드치킨을 하나씩 시켜 사이좋게 뜯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어찌 됐든 이렇게 이십대 남자가 된 아들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전례가 같이 밥을 먹는 것이었다는 것은 이런 날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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