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옆 구석에 기도하러 앉은 채 낭독되는 성경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알료사의 눈앞에 문득 혼인 잔치의 광경이 펼쳐진다. 하객들과 젊은 신랑 신부가 보이고, 관에 누워 있어야 할 조시마 장로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나도 잔치에 초대를 받았단다”라고 말한다. 그는 왜 자기를 보고 놀라느냐면서 자신도 파 한 뿌리를 적선해서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곳의 모든 사람이 파 한 뿌리씩, 단지 조그만 파 한 뿌리씩 적선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욕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파렴치한 인간 표도르 카라마조프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첫째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은 연적(戀敵)이다. 상대는 소설의 전반부에서 악녀, 요부로 등장하는 그루센카다. 아버지 표도르는 돈을 걸고, 드미트리는 준수한 외모와 젊음과 열정, 관대함을 무기로 그녀의 사랑을 얻고자 경쟁한다. 그녀는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카라마조프 부자(父子)를 애타게 한다.

 

그루센카는 카라마조프 형제 중 셋째인 알료사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그녀는 알료사의 친구인 자신의 사촌 라키친 편으로 알료사에게 자신의 집을 방문해 달라고 초대한다. 그러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수도사 지망생 알료사는 아버지와 큰형, 그녀의 관계를 알고 있기에 그녀를 ‘무서워 한다.’ 게다가 그는 이미 그루센카가 큰형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에게 충격적이라 할 만큼 뻔뻔하고 기만적으로 구는 모습을 지켜본 바 있었다. 그녀는 알료사와 대척점에 있는 여인, 그로서는 피하는 것이 마땅한 존재였다.

 

악취

 

알료사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그곳의 수장 조시마 장로 때문이었다. 수도원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도원 바깥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의 조언과 기도를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조시마 장로는 아들처럼 아끼며 사랑하는 알료사에게 자신이 죽으면 수도원을 나가라고 한다. 알료사로서는 두 배로 막막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의 죽음을 앞두고 수도원뿐 아니라 주변에도 모종의 설렘이 감돈다. 거의 성인급으로 존경받던 조시마 장로였던 터라, 그가 죽으면 기적이 나타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치유의 기적이 나타난다든지, 시체에서 향기가 난다든지, 하여간 그가 특별한 삶을 살아왔다는 초자연적인 ‘인증’이 나타날 거라는 예상이 있었다.

 

예상대로 얼마 후 장로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시마 장로의 시체에서는 악취가 났다. 기적은 없었고 오히려 보통의 경우보다 시체가 더 빨리 썩는 것처럼 보였다. 이 소식은 금세 주변 마을까지 퍼져 나간다. 이런 상황 앞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기뻐한다. 조시마 장로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아예 관이 있는 방으로 와서 시신에서 나오는 악취가 그가 살아온 인생이 실패였음을, 엉터리 신앙이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처럼 행패를 부린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웃거리고 비웃고 수군거린다. 그런가 하면, 기적이 안 일어난 데 당황하며 믿음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알료사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괴로운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시체가 빠르게 부패하고 악취가 풍겨서가 아니었다. ‘정의’가 훼손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던 조시마 장로의 인생이 이렇게 한순간에 매도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세상을 인정”할 수가 없다.

 

파 한 뿌리

 

라키친은 침울한 알료사의 모습을 보고 비열한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소시지를 먹겠느냐, 술 한잔하겠느냐고 물으며 알료사를 시험한다. 알료사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자, 라키친은 그동안 노리던 기회가 왔음을 감지하고 미끼를 던진다. 그루센카한테 가겠느냐고.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옛날부터 모색해 왔던 ‘의인의 수치’ 즉 ‘성자에서 죄인’으로 ‘타락’하는 알료사의 모습을 봐야겠다”는 목적이었다. 또 하나는 알료사를 데려오면 주겠다고 그루센카가 약속한 돈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소중한 장로를 잃은 슬픔과 장로의 인생이 멸시당하는 데 대한 분노와 좌절감은 알료사의 심사를 잔뜩 뒤틀어 놓았다. 그는 이렇게 뒤틀린 심사의 자신을 “비열하고 사악하다” 여기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악한 영혼의 소유자” 그루센카를 만나러 간다. 그동안 자신을 절제하고 금욕하던 것이 순간적으로 다 부질없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고,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루센카는 자신을 찾아온 알료사를 보고 너무나 기뻐하면서 알료사의 무릎 위에 올라 앉는다. 알료사는 그녀가 건넨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그런데 그녀는 왜 알료사를 데려오라고 한 것일까? 알료사는 그동안 그녀가 무서워서 그녀의 시선을 피해 왔지만, 그녀는 알료사가 자기를 무시해서 눈도 맞추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를 무너뜨리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시마 장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루센카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전혀 몰랐다며 경건한 자세로 성호를 긋고는 알료사의 무릎에서 내려온다. 알료사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놀라워하며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요부 같던 그녀의 모습 이면에 감추어진 신심과 따뜻한 영혼, 동정심을 알아보고 그녀를 ‘누님’이라 부르며 자신이 보게 된 그녀의 그런 면모를 말해 준다. 이것을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의 영혼에 큰 감동을 준, 평생에도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루센카는 알료사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그런데 그에 앞서서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파 한 뿌리’ 이야기다.

 

옛날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이 죽었다. 평생 선행이라곤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지옥 불에 빠졌다. 할멈의 수호천사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할멈의 선행 하나를 간신히 떠올렸다. “할멈이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 한 뿌리를 가져가 지옥 불 속으로 내밀어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게 해 주라고 하셨다. 천사가 할멈이 매달린 파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할멈이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지옥 불 속 다른 죄인들이 자기들도 빠져나가려고 할멈한테 매달리기 시작했다. 할멈은 “이건 내 파지 너희들 파가 아니야”라고 악을 쓰며 발길질을 하다가 파가 뚝 끊어져 지옥 불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루센카는 자신을 지금과 같은 요부가 되게 만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과거의 아픔과 지금 가슴 속의 고민거리를 알료사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알료사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평생 당신 같은 분을 기다려 왔어요. 누군가 나를 찾아와 용서해 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누군가 이 추악한 여자를 수치 거리로 여기지 않고 사랑을 베풀 거라고 믿었어요.”

 

사실, 알료사가 그녀에게 뭔가 대단한 일을 해 준 것은 없다. 그녀도 알료사의 어떤 말이, 어떤 행동이 그렇게 크게 다가왔는지 말하지 못한다. 그냥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분은 내 마음에 이야기를 해 주셨고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으셨어. 이분은 나를 동정한 최초이자 유일한 분이야.” 그루센카가 자신의 아픈 상처, 연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용납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이 전부라고 할까. 그래서 그루센카의 감사 인사를 받았을 때 알료사가 자신이 “파 한 뿌리를, 아주 작은 파 한 뿌리를 주었을 뿐”이라고 한 것은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진실한 답변이었다.

 

 

가나의 혼인 잔치

 

눈물과 안타까움 속에서 수도원을 떠났던 알료사는 그루센카를 만난 후 큰 기쁨을 안고 조시마 장로의 관이 놓인 방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는 한 신부가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는데, 마침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관한 대목이었다.

 

문 옆 구석에 기도하러 앉은 채 낭독되는 성경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알료사의 눈앞에 문득 혼인 잔치의 광경이 펼쳐진다. 하객들과 젊은 신랑 신부가 보이고, 관에 누워 있어야 할 조시마 장로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는 “나도 잔치에 초대를 받았단다”라고 말한다. 그는 왜 자기를 보고 놀라느냐면서 자신도 파 한 뿌리를 적선해서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곳의 모든 사람이 파 한 뿌리씩, 단지 조그만 파 한 뿌리씩 적선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할 일이 뭘까? … 너도 오늘 구원의 손길을 뻗는 한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적선했더구나. 이제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네 임무를 시작해. … 그런데 넌 우리의 태양이 보이니? 그분이 보이냔 말이다.”

 

“전 두렵습니다. … 감히 쳐다볼 수가 없어요.” 알료샤는 더듬거렸다.

 

“그분을 겁내지 말거라. 위대한 분이시기에 두렵고 위엄이 크시기에 무섭기도 하지만, 그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셨고 우리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시며 손님들의 즐거움이 잠시도 멈추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기도 하고 새로운 손님들을 기다리시면서 모든 세기에 걸쳐 끝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부르고 계신 거란다. 봐라, 새 술과 음식들이 들어오고 있구나.”

 

그 순간 알료사의 가슴에서 뭔가 불타오르고 고통스러울 만큼 그의 존재를 가득 채운다. 그의 영혼에서 환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뻗쳐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다.

 

몇 가지 단상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이 대목은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생각을 한번 정리해 봤다.

 

1. 조시마 장로의 죽음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에 대하여. 그런 기대가 내 눈에는 이상하게, 심지어 미신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조시마 장로의 사후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시신의 부패라는 자연적 현상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반응 또한 이상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독자는 그들을 계몽되지 못한 미신에 빠진 이들로 취급하고 무시하고 그와는 다른 자신의 모습에 우쭐해지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우월감을 느끼고 넘어가면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을까? 이들이 전해 들은 기적담, 이들에게 익숙한 신앙방식, 생각, 신학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이들이 훌륭한 신앙인,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사람, 성인(聖人, saint)의 죽음이 가져올 결과로서 ‘당연하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21세기의 지금 한국 땅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믿음의 사람, 의인, ‘성도(聖徒, saints)’의 삶이, 또는 죽음이 가져올 결과로서 ‘당연하게’ 기대하는 바가 있지 않은가? 성공, 부, 명예, 인정이 그런 것 아닐까.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 누구는 실망하고 믿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누구는 믿음의 삶에 대해 ‘별것 없다’고 조소하기도 한다. 냉소적이 되기도 한다. 정의가 어그러졌다고 분노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도 그리 다를 바 없지 않을까?

 

2. 알료사가 느낀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조시마 장로의 시체가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것에 사람들이 경악하고 수군거리고 그의 인생과 신앙을 폄하하고 비웃는 것을 보면서 알료사는 정의가 침해를 당한다고 느끼고 분노한다. 그것은 고인의 고귀한 삶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허용되는 세상, 그런 질서에 대한 분노였다. 그런 세상과 질서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른 대단한 보상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장로의 고귀한 인생과 신앙에 걸맞은 최소한의 존중과 예우를 바란 것뿐인데,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라니. 이런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도대체 ….

 

이런 마음은 장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나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알료사가 이런 더러운 세상에 분개하며 ‘비뚤어질 테다’ 하고 나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귀한 것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자가 귀한 것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것들에 초연한 것은 그 수준을 넘어선 모습이 아니라 그저 미치지 못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반발심에서 일탈을 추구한 일이 오히려 알료사를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이 깨달음의 산파, 매개가 되는 상대가 그런 깨달음의 가장 큰 장애물일 것으로 짐작할 만한, 전혀 뜻밖의 두 인물이라는 것이 절묘하다. 한 명은 알료사라는 성자의 추락을 기대하는 인물 라키친이다. 알료사의 타락을 누구보다 바라고 그를 그리로 이끌고자 했던 라키친이 알료사의 깨달음과 성장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다니. 그루센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파 한 뿌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3. 그루센카가 들려준 파 한 뿌리 이야기에 대하여. 이 이야기를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교리처럼 받아들이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파 한 뿌리 같은 공로를 붙들고 천국을 기대하게 하다니, 이런 어설픈 공로주의가 있나, 하면서 비웃기 십상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파 한 뿌리 이야기를 날려 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이야기를 구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소명, ‘사명’을 말해 주는 탁월한 비유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말이다. 알료사도 조시마 장로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루센카에게 파 한 뿌리 건네고 돌아온 알료사의 꿈속에 조시마 장로가 찾아온다. 그런데 알료사가 조시마 장로를 만난 곳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다. 조시마 장로는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파 한 뿌리 건네고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말한다. 파 한 뿌리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겠다.

 

여기서 장로는 알료사의 고민과 분노에 두 가지로 답하고 있다. 우선, 그는 지금 혼인 잔치에 참여했으니 가장 귀한 것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시마 장로의 인생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 분노하는 것은 인간의 평가를 전부로 알고 일희일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하나, 대단해 보였던 조시마 장로의 인생도 사람들에게 파 한 뿌리 건넨 것일 뿐이다. 파 한 뿌리 건넨 것을 가지고 뭐 대단한 것처럼 인정을 기대할 것이며, 그것 몰라준다고 ‘정의’ 운운하며 부들부들 떨겠는가. 우리의 처지는 마치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 그 용돈 중 일부로 부모에게 선물을 하는 아이와 같다. 부모는 선물을 받고 당연히 기뻐하겠지만, 아이가 자신의 선물로 부모의 사랑을 샀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조시마 장로는 파 한 뿌리를 나누는 사명으로 알료사를 부른 후, 더 나아가 알료사의 시선을 잔치의 주인께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장로는 그리스도를 위대한 분으로, 천상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두려워하는 알료사에게 사랑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소개한다. 잠이 깬 알료사는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대지에 키스하고 확신으로 가득 찬 투사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는 속세로 나간다.

 

알료사를 붙들어 세운 파 한 뿌리 은유는 내게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일단, 어깨에 힘을 좀 빼게 해 준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벗게 해 준다. 동시에 이 은유 앞에서 나는 이렇게 바라게 된다. 내 인생도, 내가 하는 번역도, 이 글도,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고작’ 파 한 뿌리 건네는 일이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그분이 맡기신 일일 수 있겠고 가냘픈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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