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선 지금도 재테크를 주식이 아니라 소로 해서인지 아프리카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이 깊다는 것을 느낀다. 그 한 예가 아프리카에는 흑인만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과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고, 세계적 록밴드의 보컬이었던 프레드 머큐리가 탄자니아 출신인 걸 알고 놀랐다. (본문 중)
이정일(작가, 목사)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알제리 작가 부알렘 상살이 소설 『2084』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상살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영감을 받아 썼기에 앞자리 숫자만 바꿔 제목을 붙였다. 『1984』가 전체주의 국가를 그렸다면 『2084』는 유일신을 섬기는 신정 국가의 권력을 묘사한다.
알제리도 낯선 나라이지만 사실 그 이웃 나라들도 낯설다. 아프리카엔 무려 54개나 되는 나라가 있다는데 나는 이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말할 때 나라보다는 아프리카란 대륙으로 부른다. 나는 마다가스카르와 나이지리아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두 친구를 만나면서 두 나라가 아프리카의 어디쯤 붙어 있는지 찾아 보게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바오바브 나무뿐이었다. 나이지리아에 대해선 그나마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게 되었다. 유럽의 열강들이 아프리카로 밀려들던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그걸 읽고 나니 나이지리아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린 구한말처럼 느껴졌다.
나이지리아는 인구가 2억이 넘는 나라이다. 나라도 크지만 잘 산다. 이런 힘이 문학에서도 나타난다. 1986년 아프리카 최초로 노벨문학상이 나왔는데, 그게 월레 소잉카이다. 『해설자들』을 썼다. 그리고 영미권에서 핫하지만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있다. 장편소설 세 권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게 동물의 왕국, 내전 아니면 빈곤 모금 광고이다. 아프리카 하면 언제나 위험하거나 가난하므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TV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방영되는 모금 광고를 보기 때문이다. 영상 속 아이들은 처참하다. 굶주리다 못해 앙상하다. 하지만 이것은 난민촌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란다.
송태진 작가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들으니 아프리카에서는 속이 안 좋을 때 돌을 먹는다고 한다. 이것은 돌이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쌍하다고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주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서로 도와주는 문화가 있어서 누가 해외에서 돈을 벌어 송금하면 사돈에 팔촌까지 도와준다고 한다.
이것을 들으니 소말리아 출신의 아얀 히르시 알리가 회고록 『이단자』에서 한 이야기가 이해되었다. 어릴 때 할머니가 몇십 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암송시켰다. 타지를 여행할 때 차를 마시며 족보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에게 겹쳐지는 이름이 나오면 그 순간부터 둘은 친척이 된다. 생면부지여도 잠자리를 챙겨 준다.
아프리카에선 지금도 재테크를 주식이 아니라 소로 해서인지 아프리카에 대한 한국인의 고정관념이 깊다. 그 한 예가 아프리카에는 흑인만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과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고, 세계적 록밴드의 보컬이었던 프레드 머큐리가 탄자니아 출신인 걸 알고 놀랐다.
아프리카는 부족 중심의 사회라고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남아공 출신의 인류학자 아치 마페제가 ‘부족’이라는 말도 구조주의라는 서구 인류학의 지적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하는 걸 알고 놀랐다. 부족이 아니라 민족이라고 쓰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우리 민족을 표현할 때 ‘부족’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고정관념이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은 대개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서 얻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비슷하다기보다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을 바꾸려면 어떤 이야기이든 단편이 아니라 전체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단편적인 이야기에는 빠진 게 많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혐한이 드세다. 하지만 한국에 여행을 오거나 한국인을 만나 밥을 같이 먹고 대화를 나누면 시선이 바뀌곤 한다. 아프리카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수의 한국인이 아프리카는 늘 굶주리고 전쟁과 가난, 혹은 에이즈로 수천 명이 죽어 나가는 땅이라 여기지만 문학으로 만나는 아프리카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토록 긴 편지』를 읽고 그 땅의 여성이 겪는 아픔을 느꼈다. 세네갈 작가 마리아마 바가 썼다. 소설은 일부다처제를 비판하지만, 나는 엉뚱하게도 부조금을 과시하듯 내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랑하고, 또 그 부조금이 갚아야 할 빚이기에 세심하게 기록을 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을 보고 놀랐다. 우리의 장례 문화와 너무 닮아서.
나이지리아 작가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을 펴니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모두 눈이 먼 채 태어나서 보는 것을 배운 자가 극소수인 그런 인간들의 무정함을 우리는 두려워했다”라고. 그가 쓴 이 문장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속 문장과도 이어진다. “우리는 … 눈이 멀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소설을 읽기 전에는 아프리카와 나는 연결되는 게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치누아 아체베, 벤 오크리, 응구기 와 티옹오, 알랭 마방쿠, 베시 헤드, 누르딘 파라 같은 작가들을 읽고 나니 아프리카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느껴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 역시 사랑, 자유, 평등, 인권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를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을 들려주는데 소설만큼 좋은 건 없을 것 같다. 나는 『야자열매술꾼』을 읽을 때 우리나라 도깨비 전래 동화를 읽는 것 같아 신기했다. 무협지를 단번에 제압하는 작가의 말빨에 감탄했다. 술주정꾼이 들려주는 유쾌하고 엉뚱하고 매혹적인 이야기의 힘이 엄청났다.
아프리카 문학을 읽기 전까진 나는 아프리카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 가며 집단이 아닌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니 내가 가졌던 편견이 보인다.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나 자각이 첫걸음이다. 이런 자각이 없다면 우리는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을 먼저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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