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겠다, 나아가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말들이 일종의 선언처럼 들리고 책 제목으로도 등장하고 있다. 제법 개념 있게 들리는 이러한 저항의 서사와 달리, 동물은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은 (하지도 않지만 만약 한다면) 매정한 꼰대의 인상을 준다. 사람을 키우는 일보다 동물을 키우는 일이 더 공감을 끌어내는 사회가 된 셈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고등학교 시절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 ‘니 00 키우나?’ 하는 말이 유행했다. (그렇다 나는 경상도에서 자랐다.) 예를 들면, 지우개를 빌려 달라 할 때도 “니 혹시 지우개 같은 거 키우나?”하는 식이다. 만약 지우개가 없다면, “으으응(↘↗↘의 인토네이션으로 읽는다), 내는 그런 거 안 키운다”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아씨, 쫌 키우지…” 하고는 다른 친구를 찾아간다. 지우개를 키우는 사람은 지우개를 챙기는 사람이다. 필통에 챙기고, 닳으면 새것으로 갈아 챙긴다. 그렇게 지우개를 키우는 것이다. 바야흐로 오늘날 지우개를 키우는 사람은 드물어졌지만, 그 대신에 개를 키우는 사람은 늘고 있다.

 

코로나 일상이 지난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재택근무의 루틴대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려고 아파트 정문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만치서 누군가가 자기 지인을 향해 다가가며 “어머, 애 많이 컸네” 하고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지인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당연히 아기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어떤 귀여운 아가일까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그 옆을 지나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흠칫했다. 내가 본 ‘애’는 아기가 아닌 강아지였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나 또한 한때 강아지를 키웠던 사람으로서 강아지의 귀여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아들이 아무리 그 강아지를 동생처럼 대해도 나는 끝내 주인마님 이상의 호칭을 강아지에게 허용하지 않고—내가 어떻게 니 엄마니?—동물과 사람 간 종의 차이를 굳건히 지키려 했다. 강아지가 아무리 예뻐도 개는 개일 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개모차로 개조한 카트에 차양까지 달고 강아지 세 마리를 태운 채 선풍기를 돌려가며 애지중지 몰고 가는 중년 남성을 보았다. 그 광경이 어찌나 생경하던지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에는 수만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저 사람은 독신일까? 아니면 자기 아이들이 있을까? 자기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은 어떻게 키웠을까? 강아지를 대하는 정성 혹은 그 이상으로 키웠을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일까? 대체로 돌봄 노동과는 거리가 먼 내 또래의 남성이 저렇게라도 돌봄을 알게 된다면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돌봄은 강아지에게만 국한된 돌봄일 수도 있다. 남편이나 남자 친구는 키우지 않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는 키우는 여성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섣불리 사람에게는 돌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도 그 동물들에게 쏟는 애정과 정성은 무한대이다.

 

동물이 사람을 어느 정도 대신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끝내 주인마님 이상의 호칭을 허락하지 않았던 우리 집 강아지도 애초에 집에 들인 이유가 둘째 아이를 분만실에서 영안실로 허망하게 보내고 품의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강아지는 식구들이 다 나가고 홀로 집에서 번역 일을 할 때 내 발치에 딱 붙어 누워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주었고, 유학 중에 한 번씩 집에 올 때면 너무 흥분해서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나를 반겨주었다. 일찍이 그런 환영은 전무후무했다. 그러던 강아지가 열 살 남짓 되었을 때, 남편과 아들이 잠시 저녁 먹으러 외출한 사이 부엌 어느 구석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비닐봉지를 끄집어 내서 가지고 놀다가 질식사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당시 연구원으로 머물던 일본에서 전화로 그 소식을 접한 나는 길거리에 멈춰 서서 전화기를 붙잡고 아들과 함께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호기심 왕성하던 어릴 때도 안 하던 짓을 왜 노견이 되어서 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만 남았고, 아프다 간 게 아니고 갑작스레 사고로 간 거라 허망함도 컸다. 귀국해서는 마룻바닥에 탁탁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던 강아지의 발소리가 들릴 것만 같고, 어디서 빼꼼 고개를 내밀 것만 같아 한동안 허전했다. 마음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둘째 아이를 잃은 아픔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사랑과 동물을 대하는 사랑이 나에게는 끝내 동격이 되지 못했던 이유이다. 그래서일까. ‘반려인 능력 시험’이라는 것까지 만들며 사람 대신에 동물 키우기에 몰두하는 사회가 나는 제법 낯설다. 출산율이 연일 바닥을 친다는 앓는 소리 이면에 이처럼 증가하는 반려인의 수가 나는 어쩐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결혼하지 않겠다, 나아가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말들이 일종의 선언처럼 들리고 책 제목으로도 등장하고 있다. 제법 개념 있게 들리는 이러한 저항의 서사와 달리, 동물은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선언은 (하지도 않지만 만약 한다면) 매정한 꼰대의 인상을 준다. 사람을 키우는 일보다 동물을 키우는 일이 더 공감을 끌어내는 사회가 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를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고 거기에 특별히 가치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 또한 오랫동안 아이 없이 지내면서 주변에서 받은 아이 낳기에 대한 압력에 적잖이 상처도 받고 저항도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안 낳고가 하나의 선언으로 정리되는 것은 인간사를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선언이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는 행위가 하나의 선언으로 요약되면서 오히려 인간의 출산을 둘러싼 드라마가 너무 밋밋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이를 안 낳는 것과 못 낳는 것의 경계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낳아 보려 하기 전까지는 나와 나의 파트너가 안 낳는 것인지 못 낳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불임/난임 커플들이 많은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나 또한 두 번째 임신도 유산으로 끝나자 못 낳는 상황의 경계선에서 차라리 안 낳는 쪽을 택할까 고민했었다. 못 낳는 것보다는 안 낳는다는 쪽이 아무래도 쿨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이미 낳으려 시도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안 낳겠다고 한 사람처럼 쿨해 보이기는 글러 먹었던 셈이다.

 

아이라는 게 신기해서 원하는 사람에게 잘 안 생기고 안 원하는 사람에게 잘 생기는 속성이 있다. 그리고 안 원할 때는 생기고 원할 때는 안 생기기도 한다. 사르트르가 거느렸던 많은 여성 중 하나는 임신이 너무 쉽게 되어서 낙태가 불법이었던 시대에 보부아르가 비밀리에 낙태 시술소를 연결해주느라 애를 먹었다는데, 막상 사르트르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임신이 되지 않아서 끝내 원하는 아이는 얻지 못했다고 한다. 섹스를 하지 않는 것 이외에 백 퍼센트 보장되는 피임법이 없다면 (심지어 묶은 정관도 때로 실수를 한단다), 섹스를 하는 사람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아주아주 미세할지언정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고, 그 미세한 틈새를 뚫고 아이가 생겼을 때,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한 선언이 가벼운 선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은 결국 낙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낙태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선언의 무게가 그 행위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신념이기에 매 순간 자기 신념에 헌신하기로 선택하며 그 서사를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서사를 수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 생각한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레이첼처럼, 유통 기한이 지난 콘돔 때문에 뜻하지 않게 생긴 아기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홀로 좌충우돌 키우는 그 모습이 어쩐지 나는 더 인간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물론 상당 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런 선택이 자연스럽게 가능한 사회를 꿈꾸어 봐도 좋지 않을까. 아이는 신이 점지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의 굳센 의지와 철벽 방어를 뚫고 생긴 아이를 향해, “리스펙!” 하며 엄지 척 한 번쯤은 해 줄 수도 있는 여유. 그 여유는 곧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신비를 향한 열림이기도 할 것이다.

 

레이첼은 가상의 캐릭터이지만 재치 있는 글로 많은 애독자를 둔 미국의 작가 앤 라모트는—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다.—실제로 뜻하지 않게 생긴 아기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홀로 좌충우돌 키운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남자 친구는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사라져 버렸고, “첫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 늙었고 너무 피곤한” 서른다섯의 나이에 그는 낙태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출산을 택했다. 그로부터 약 이십 년 후 그는 할머니가 되었고, 삼십여 년이 흐른 후에 『어쨌든 할렐루야』(Hallelujah Anyway)라는 책을 쓴 것을 보면, 인간의 계획을 치고 들어오는 예기치 못한 사건 앞에서 서사를 바꾸는 것도 확실히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앤 언니, 리스펙!” 그리고 어찌 됐든 할렐루야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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