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에도 글에 다 담아낼 수 없는 어려움들은 많다. 오랜 육아의 지속으로 인한 피로감이며, 재정적, 심리적 부담이며, 정서적 어려움들 또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보내 주시는 지체들의 사랑과 관심, 격려 때문에 또 한고비를 넘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작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응원과 지지와 사랑이 가족들에겐 가장 큰 힘이다. 물론 제도들도 하루빨리 보완이 되면 좋겠다. (본문 중)
최용철
오늘도 이집트 10가지 재앙 중 8번째인 메뚜기 떼를 그려 달라는 현민이의 요청에 반응하며 바쁜 아침을 시작한다. 옷을 갈아입히고, 수천 번은 봤을 유튜브 영상에서 능숙하게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찾는 현민이를 재촉하여 밥을 먹게 하면서, 나는 얼른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분명 오려 달라고 할 것이기에, 가급적 오리기 편한 방식으로 그림을 변형하려 애쓴다. 원본과 많이 다르면 다시 그려 달라고 떼를 쓸 것이기에 그림 내부의 디테일은 살리고 윤곽만 오리기 편하게 살짝 변형을 준다. 틈틈이 밥을 먹도록 재촉하고, 경기 약을 먹이고, 등교 준비를 시키면서 나 역시 일터로 나갈 준비를 한다. 아내는 출근 시간이 조금 빨라 먼저 집을 나선 후다. 날이 점점 빨리 밝아 오기에 농사를 위해서는 진즉 집을 나섰어야 하지만, 등교를 도와 주실 활동 보조 선생님이 오시기까지는 내가 현민이를 챙긴다.
큰아들 현민이는 나이는 23살이지만 아직 고3이다. 유아기부터 열경련을 하다가 18개월부터 본격적으로 국소 발작의 뇌전증(경기)으로 인하여 약을 먹기 시작했고, 점점 더 발달 장애가 심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입학을 유예하다가 2살 터울의 여동생이 입학할 때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는데, 학교에서 관리가 잘 안 되어서 아이가 없어지기도 하는 등의 소동을 겪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한 학기 후 홈스쿨링을 하게 되었다. 약 2년 후에 아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아이들을 다시 공교육으로 복귀시켰는데, 동생은 제 나이에 맞게 들어갔는데, 현민이는 1학년부터 다시 다니라고 해서 원래 나이보다 4년이 늦어졌다.
비록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나이는 많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그래도 현민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에는 부모는 나름대로 일을 할 수 있어서 오래 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등학교 과정이 다 끝나고 나면 취업을 위한 훈련 과정인 전공 과정이 2년 정도 있는데, 어느 정도 취업 가능성이 있어야만 전공 과정으로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현민이는 지적장애 2급인데다, 대근육 소근육이 원활하게 발달하지는 않아서 과연 전공 과정에 들어갈 수 있을지 애매한 상황이다.
20년 넘게 경기 약을 먹어 오면서 어느 때는 경기가 잘 통제가 될 때도 있었고, 중간에 한 2년 정도는 경기를 하지 않아서 약을 뗀 적도 있었지만, 최근 2년 동안은 계속 경기가 심해졌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다가 작년 하반기부터는 1주 단위로 계속 경기를 하였다. 한번 경기를 하고 나면 후유증이 심해져서 5-6시간 동안은 계속 토하고 힘들어 했다. 결국 약으로 잘 통제되지 않아서 미주신경 자극 치료를 위한 전기 장치를 가슴에 삽입하는 수술을 작년 겨울에 받았다. 다행히 약간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기는 하지만, 집에서는 온 가족이 현민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신경이 곤두서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 나는 대학생 선교 단체의 훈련 담당 간사로서 훈련원에 거주하였기에 사역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현민이를 돌볼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재택근무를 한 셈이다. 다만 사역지가 전주에서 성주로, 성주에서 강릉으로, 훈련원 상황에 따라 자주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작년에는 일반 회사로 전직을 하게 되어 인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현민이 경기가 심해져 아내가 직장을 쉬고 현민이를 계속 돌봐야 했다. 현민이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어떻게 돌보는 것이 좋을까 고심하던 중, 결국 내가 귀농을 하면 그래도 현민이를 돌보는 일에 조금은 유연성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 가족은 다시 전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다행히 상담 일을 하는 아내는 취업을 하게 되었고, 나도 농사일에 잘 적응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높은 노동 강도와 많은 노동 시간으로(친환경 농사라 일이 많다) 현민이가 졸업하게 되면 현민이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고민은 계속 하고 있다. 활동 보조인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부모가 직장에 나가 있는 시간을 다 커버해 줄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지금 당장 아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좀 더 먼 미래에는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도 시시때때로 찾아와 큰 불안을 안겨 준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녀를 돌볼 수 없는 때가 오게 될 때, 우리 아이는 어떡해야 할까. 이 부분은 늘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이 테스트받는 영역이라고 느껴진다. 한 번 두 번 통과하고 나면 더 이상은 어려운 시험거리가 아니어야 되는데, 여전히 현민이가 많이 아플 때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계속해서 우리 부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고 다시 힘든 싸움을 싸우게 된다.
경기 문제 외에도 매년 한두 차례씩은 큰 부상을 당하는 일이 생겨서 마음을 졸일 때가 많다. 현민이는 대소 근육이 세밀하게 발달하지 못해서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반사 신경이 잘 작동하지 않아 큰 부상을 당하곤 한다. 지난 2월에는 갑작스럽게 경기를 하면서 쓰러졌는데, 넘어질 때 책상 모서리에 눈 위 부분이 찢어지고 출혈이 심해 난리가 났던 적도 있다. 정기적인 뇌파 검사, 미주신경 치료를 위한 삽입 수술과 이런저런 부상으로 병원 갈 일이 많은데, 보험 회사들은 장애인들의 손해율이 높기 때문에 보험 가입을 대부분 거절하고 있다. 결국 일반 건강보험 말고는 받을 수 있는 혜택이 거의 없다. 병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보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험 가입이 안 되는 아이러니를 통탄하게 된다. 복지 혜택이 많이 커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장 기본적인 제도들에서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이 외에도 글에 다 담아낼 수 없는 어려움들은 많다. 오랜 육아의 지속으로 인한 피로감이며, 재정적, 심리적 부담이며, 정서적 어려움들 또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보내 주시는 지체들의 사랑과 관심, 격려 때문에 또 한고비를 넘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작은 관심과 배려, 그리고 응원과 지지와 사랑이 가족들에겐 가장 큰 힘이다. 물론 제도들도 하루빨리 보완이 되면 좋겠다. 이번에 장애인 이동권 문제로 정치권에 큰 논쟁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내 불편, 내 기회에만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간절함과 괴로움을 먼저 헤아려 주는 성숙함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한탄하게 된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의 옆자리에 함께 하며,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눈물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있기를 간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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