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숲이지만 다가가서 보면 나무라고, 나 자신이 그 나이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노년이 낯설지 않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노년의 친구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숲으로 뭉뚱그려진 그들이 아니라 나무 하나하나로서 그들의 삶을, 그들의 개성을 보게 되었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제법 삼엄하던 전염병 경계의 시절이 어느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최근, 어머니가 귀국하셨다. 사다리에 올라 몰딩에 페인트를 칠하고 내려오다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히신 후 두통과 같은 뇌진탕 증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보험이 없는 여행자 신분으로 이런저런 검사를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에 일단 귀국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여 들어오신 건데, 다행히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상태가 호전되어 병원으로 직행하지 않고 지방에 있는 댁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방문한 병원에서도 별 이상이 없다 하여 지금은 몇 달간 비워둔 집과 마당을 손보느라 바쁘시다. 어머니가 살림하는 모습을 보면 일흔 중반의 나이인데도 나보다 힘이 더 좋으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작년 요맘때에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더라면 노년이 지루하지 않게 진작에 무엇을 준비할 걸 그랬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의 윗세대는 자식들 뒷바라지가 끝나면 손주들 재롱 보면서 좀 지내시다가 돌아가시는 게 수순인 세대였기에 어머니도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셨는데,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생각보다 오래 사시게 되니 무료하셨던 것이다. 당시에는 일흔을 넘어서까지 사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할머니가 아흔 무렵까지도 살림하시다가 요양 병원에 가신 걸 생각하면 엄마도 그만큼 오래 사실 가능성을 미리 가늠하실 수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 살 가능성을 감지하셨다 해도 무엇을 어떻게 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아마 오래 사는 것이 단지 나이가 더해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전체의 쓰임새가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 산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노년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의 연장이 아니라, 그만큼의 생애가 더해지면서 그 이전 단위의 생들을 사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의 유명한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딸로서 마찬가지로 인류학자가 된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Mary Catherine Bateson)은 저서 『죽을 때까지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Composing a Further Life)에서 장수한다는 것은 단지 인생에 몇 년이 더해지는 게 아니라 인생의 모습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집에 방을 하나 더한다고 할 때 단지 방 하나가 추가된 게 아니라 더해진 방으로 인해서 집 전체의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집 어느 구석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그냥저냥 남은 날들을 채웠을 나이에, 사람들은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거나 세계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

 

어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상하게 나는 할머니들과 가깝게 지냈다. 할머니라고 해도 나에게는 어머니뻘이지만 모두 7, 80대의 여성들이었다. 나의 지도교수 두 명도 다 70대였지만, 미국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들도 70대였고, 일본에서 남자들로 포진한 연구실 밖에서 일본 생활을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친구들도 모두 그 연령대의 여성들이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내 또래보다 조금 일찍 나의 미래로서 노년을 보게 되었다.

 

멀리서 보면 숲이지만 다가가서 보면 나무라고, 나 자신이 그 나이에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도 노년이 낯설지 않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노년의 친구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숲으로 뭉뚱그려진 그들이 아니라 나무 하나하나로서 그들의 삶을, 그들의 개성을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미국인 친구 하나는 지도교수와 함께 보츠와나로 연구 여행을 갈 때 그 그룹에 함께 한 친구였는데, 내 나이 또래의 딸과 내 아들 또래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였다. 나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남들보다 대학 교육도 늦게 시작해서 박사 학위를 자신의 개인적 성취로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70대이지만 머리카락 하나 밖으로 삐치지 않게 외모를 깔끔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아랫니가 비뚤어지기 시작해서 영락없는 할머니처럼 보인다며 치열 교정까지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가지런하던 치열이 나이 들면 비뚤어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비뚤어진다 해도 손자도 본 할머니가 할머니처럼 보인다고 교정까지 할 것이야….

 

여하튼, 영성에 대한 관심도 통하고 또 알고 보니 가까이에서 살아서 여행 후에도 자주 만나 산책을 하곤 했는데, 공부를 마치고 떠날 때 나더러 친자매 같았다면서 많이 슬퍼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을 한동안 하지 못하자 줌으로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데, 글쎄 작년부터 학교 강의를 대폭 줄이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더니 인도에 있는 웹 기술자를 고용해서 도움을 받으면서 그동안 자신의 인생 경력과 교육 경력을 다 동원하여 온라인으로 코칭 사업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만난 또 한 친구도 70대였는데, 나랑 먼저 가깝게 지내던 은퇴한 80대 여교수의 소개로 만나 나중에 같이 교회를 다니게 된 친구이다. 마침 내가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이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 매주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00 선생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자기 이름으로 부르라고 해서 **씨가 되었다. 아마도 독일인 남편과 살아서 서구식 생활 방식에 익숙한 것 같았다. 아들 둘을 낳고 이혼했는데 지금은 혼자 살면서 나고야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면서 클래식 음악 공연을 조직하는 일도 하고 있다. 보니까 영어 가르치는 일보다 음악회 조직하는 일을 더 즐겨하는 듯했는데, 해외에서 사람을 초청하기도 하고 일본 내에서 연주자들을 부르기도 했다. 연주회 티켓이 비싸지도 않으면서 공연들도 좋아서 그 은퇴한 여교수, 그리고 그분의 제자이자 나의 일어 선생이었던 친구와 같이 공연 나들이를 가곤 했다.

 

영어 강사인 친구도 그렇고 은퇴한 여교수도 그렇고—이분은 영국인과 결혼했는데 자녀는 두지 않았고 지금은 사별하셨다—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내가 미국에서 만난 친구들 못지않게 배움과 사귐이 지속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흔히 ‘노인’으로 뭉뚱그려지는 숲의 이름 없는 나무들이 아니었다.

 

1970년에 자기 의지에 반해서 교회 사역을 은퇴한 후 노인의 권리를 위해 일한 미국의 여성 활동가 마거릿 쿤(Margaret E. Kuhn, 1905-1995)은 노년에 대한 여섯 가지의 신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노년은 질병, 재난이다, 2) 노인은 생각이 없다, 3) 노인은 성적 욕망이 없다, 4) 노인은 쓸모가 없다, 5) 노인은 무력하다, 6) 노인은 다 똑같다. 이 지적은, 대접받기만을 요구한다면서 마치 노인권이 과도하게 인정되는 듯 여기기도 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는 제법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사실 속으로야 진작부터 이렇게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다만 동방예의지국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이 중에서 특히 여섯 번째 항목인 ‘노인은 다 똑같다’라는 말은, 노인이 하나의 집단으로서 타자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나무로서의 변별력을 상실한 한 덩어리의 숲으로 그들을 보는 것이다.

 

70대의 나이에도 치열 교정을 해가며 자기 나름의 개성을 찾고 일과 사랑을 멈추지 않은 나의 친구들은 숲으로 사라지길 거부하고 나무로서 자기 이름을 놓치지 않은 여성들이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사실 이러한 삶이 모든 노년의 여성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고정된 성역할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 역할의 박스를 벗어나 개인으로서 영위하는 인생을 상상하는 일은 제한적이고, 경우에 따라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그 대신에 나의 어머니 세대가 하신 일은, ‘너희는 나처럼 살지 말라’며 딸들을 열심히 교육시키고, 그들의 일을 응원하며, 때로는 대신해서 아이도 키워주고 살림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너희는 숲으로 사라지지 말고 자기 이름을 가진 나무로 살라’고 하신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다음 세대로 전가한 이 행위는 때로 원하지 않는 부담과 책임 전가로 불화를 낳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한 가지 가능성은 준다. 우리 인생에 덧붙여진 햇수가 단지 햇수의 연장이 아니라 인생을 사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지금부터 준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몸의 낡음과 내면의 새로움은 일찍이 성경에서도 말했으니(고후 4:16), 나이와 욕망의 엇박자는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나이와 욕망이라는 것을 알고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기가 오늘날의 중년이다. 딸들에게 그러한 중년을 가능케 해준 노년의 어머니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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