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권위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것을 전제로 함께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거기에서 자발적인 상호 존중의 교육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말한다(롬 12:10). 교사들이 먼저 실천하며 학생과 학부모와 함께 새로운 교육적 권위를 만들어 가야 한다. (본문 중)
권위 상실의 시대에서 새로운 교육의 권위 찾기
김정태(좋은교사운동 공동대표)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올해도 5월 15일이 돌아왔다. 21세기, 가부장제적 권위가 허물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를 노래하고 들으려니 솔직히 어색하다. 스승의 날이라는 이 불편해진 기념일이 과연 몇 년을 더 버틸지, 때때로 냉소적인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과 학부모들이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라고 노래를 불러 주며 살갑게 다가오는 것을, 요즘 교사들은 부담스러워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상처받지 않을 만큼 마음을 주어야 한다며 경계의 벽을 높이 쌓고 있다. 그래서 매년 돌아오는 스승의 날, 교사들은 하늘을 보며 거룩해지고 싶지가 않다.
교권 침해로 고통받는 학교 현장
2021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표한 설문 결과다. 만 19세 이상 75세 미만 4,000명 중 44.5%는 ‘교원의 교육 활동 침해 행위 정도’가 심각하다고 응답했으며, 그 이유로서 가장 많은 사람이(36.2%) ‘학생 인권의 지나친 강조’를 꼽았다.
2022년 3월 21일 전북일보는 매우 구체적인 교권 침해 사례를 보도했다. “남학생이 수업 시간에 이유 없이 친구를 때리고 성질을 부려서 (선생님이) 팔을 잡고 제지했는데, 팔이 아프다고 (선생님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해요.” “생활 지도를 하는데,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XX 새끼’라고 욕하고, 수업 시간에 책상을 내리치고, 쓰레기통을 발로 찼지만, 조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수업 중 (학부모가) 교실로 찾아와 심한 욕설을 하고, ‘차에 도끼 싣고 다닌다. 선생님 죽여 버린다’라는 말도 들었어요.” 이런 말들을 요즘 교사들이 듣는다. 이보다 더한 것도 많다.
올해 전북 교사노조에서 유초등교원 84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 학생생활지도법 법제화에 99.4%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서울 교사노조에서는 서울시 교육감 후보자들에게 교육활동보호조례 제정을 요구하는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요즘 교사들은 학생들의 안전 위협과 학교 폭력 상황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지도하다가 학부모로부터 아동 학대로 고소·고발을 당하기도 한다. 학생과 학부모로부터의 폭언과 폭행은 물론이며 SNS상에서 언어폭력, 성희롱 등 다양한 형태로 교권 침해를 당하고 있다. 교사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미비한 현 상황에서 교권을 침해당한 교사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현재로서는 병가 휴직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권 침해의 주원인이 학생인권조례일까?
교권 침해의 주원인이 학생인권조례일까? 학생 인권 조례에 교권 침해를 촉발하는 조항이 있을까?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의 주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면, “학교에서 체벌은 금지된다.” “학교는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을 강제해서는 아니 된다.” “학교는 두발의 길이를 규제해서는 아니 된다.”가 있다.
2000년대까지 학교는 체벌과 강제 야간 자율 학습과 두발 검사 같은 생활 교육과, 입시 지도란 명목 아래 폭력적 문화를 용인해 왔다. 오랜 세월 학교 안에 자리잡아 온 것들이어서 마치 교육 활동인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체벌, 두발 규제, 강제 야자 안에서 어떤 교육적 가치를 찾기는 어렵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그런 면에서 분명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인권 감수성을 일깨운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점이다. 실제로 2010년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학교는 느리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 변화의 흐름에서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키지 않은 지역의 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체벌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두발 검사는 사라졌으며, 강제 야간 자율 학습은 지역과 학교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이전보다는 더 많은 선택권이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이처럼 학생들이 입시 경주마가 아닌 사람으로서 존중받기 시작했는데, 그 때문에 교사들의 교육권이 침해받는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학생 인권 향상이 교사의 교육권을 희생시킨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전과 같은 가부장적 교육 문화와 시스템으로 돌아가야만 교권이 존중받으며 교사와 학교의 권위를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과거 회귀에서는 이미 변화된 교육과 앞으로 변해갈 교육을 담을 새 부대를 찾을 수 없다. 21세기 사회에서 무슨 수로 19세기 이전의 가치와 사회 문화적 환경을 복원한다는 건가?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전도서 7:10)
세상도 사람도 바뀌었는데, 관계의 틀로서 새로운 규범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것이 문제다. 일종의 아노미 상태다.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의 변화가 찾아왔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전환될 때 얼마나 큰 격동이 있었을까? 그러나 한번 정착하게 된 인류는 다시 이전의 유랑 생활로 돌이킬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인류의 문명은 20세기를 지나 21세기가 되기까지 여러 차례 큰 변화를 겪었다. 인터넷이 일상이 되고, 손바닥에 컴퓨터가 쥐어지면서 정보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확산된다. 지금 교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정에서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도 있는 시대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 당장 학생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지식이 될 수도 있다. 밀실에서 소수 엘리트들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 한 명의 메시아적 영웅이 대중을 낙원으로 인도하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 시대에 작동하던 방식의 권위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러니 교육 공동체를 규정하는 규범이나 권위도 새로운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 새로운 형태의 권위로 바뀔 수밖에 없다. 지금의 교권 침해 현상은 이런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놓쳐버린 교사, 학부모, 학생, 그리고 우리 사회 모두가 만들어 내는 안타까운 불협화음이다. 그러니 더 이상 과거의 학교와 교육 위에 존재했던 그런 방식의 권위를 되찾으려 하지 말자. 되찾을 수도 없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권위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셨다. 과거에는 스승이 하늘까지 올라갔다. 하늘의 뜻을 전수하는 절대적 권위를 교사와 학교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땅에 내려와야 한다. 아이들의 곁에서 동행하며 먼저 존중하고 공감하는 선생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자발적인 순종을 끌어내는 권위를 찾고 세워야 한다.
육아와 교육의 새로운 권위는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에 있으며, 이 권위가 새로운 이유는 이전 형태의 권위를 획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한 수평적 권위가 고전적인 하향식을 대체함으로써 권위는 재탄생한다. … 이상적인 환경은, 부모와 교사, 학생이 수평적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파울 페르하에허, 『우리는 왜 어른이 되지 못하는가』)
수평적 권위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것을 전제로 함께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며, 거기에서 자발적인 상호 존중의 교육이 일어날 수 있다. 성경은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말한다(롬 12:10). 교사들이 먼저 실천하며 학생과 학부모와 함께 새로운 교육적 권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교사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학부모, 학생, 온 사회가 다 함께 교육의 권위를 세우는 데 마음을 모아야 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마음을 모으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미 우리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 외에도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손에서 양육되고 있으며, 가정과 학교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과 어른들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모두가 아이들을 교육한다. 우리 모두가 아이들의 스승이며, 더 나아가 서로의 스승이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아주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꼭 필요한 아름다운 권위를 함께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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