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빌보는 참으로 용감한 행동을 한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골룸을 죽이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그대로 뛰어넘는다. 마법의 반지라는 행운이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 중에서 불쌍한 골룸을 살려주고 자기는 빠져나갈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행운으로 주어진 힘에 도취되지 않았다. 행운이 안겨준 힘을 절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선까지만 능력을 쓰는 데 자족했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호빗』의 주인공 빌보 배긴스는 “부유할 뿐 아니라, 모험이나 예상 밖의 일을 한 적이 없었”던 골목쟁이 집안의 호빗이다. 그런 빌보의 인생에 간달프가 찾아와 “자네를 모험에 보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는 모험을 원한 적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지만, 간달프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는 열두 명의 난쟁이라는 커다란 혹을 주렁주렁 달고 되돌아온다. 간달프가 훅 들어오면서 빌보의 인생이 제대로 꼬였다. 운도 나쁘지. 그런 존재와 엮이다니.

 

『호빗』은 빌보 배긴스가 열두 명의 난쟁이들에게 ‘좀도둑’(전문 보물 사냥꾼)으로 고용되어 사악한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난쟁이들의 보물을 되찾으러 떠나는 모험 판타지다. 간달프의 꾐에 넘어가 모험에 나서게 된 후, 빌보는 몇 번이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도둑질이니 뭐니 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야. 내 멋진 굴집 불 가에 앉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찻주전자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면서 말이야!’

 

사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모험 과정에서 수없이 위험에 처하고 몇 번은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막힌 행운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빌보는 ‘운 좋은’ 호빗이었다. 극도의 불운 가운데 빌보에게 찾아온 행운의 두 사례만 생각해 보자.

 

영화<호빗:뜻밖의 여정> 스틸컷.

 

골룸과의 만남

 

빌보 일행은 고블린들에게 잡혀가 “다시는 햇빛을 못 보게 뱀이 우글거리는 어두운 구멍 속”에 처박힐 위기에 처하지만, 때맞춰 나타난 간달프의 도움으로 탈출에 나선다. 그런데 빌보는 탈출 과정에서 큰 위기에 처한다. 일행의 맨 끝에서 자신을 업고 가던 난쟁이 도리가 갑자기 뭔가에 낚아채이면서 그의 등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빌보는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고 만다.

 

빌보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깜깜했고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참으로 막막한 상황이었다. 큰 불운이라 할 만했다. 어떤 적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동굴에 혼자 떨어지다니. 도리에게 업힌 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는, 그곳이 어디쯤이고 일행을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불운의 정점에서 동굴 바닥을 기어가던 그의 손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작은 반지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빌보는 골룸을 만난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골룸은 반지의 주인이었고 그 반지는 골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골룸은 빌보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자기가 낸 문제를 못 맞히면 빌보를 잡아먹고, 자기가 빌보의 문제를 못 맞히면 나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이런 불평등 계약을 수락한 것을 보면 빌보의 처지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다. 내기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 빌보에게는 지성과 함께 큰 행운이 필요했는데, 여기서도 과연 행운이 따라주었다.

 

수수께끼 내기의 결과가 여의치 않자, 골룸은 빌보를 내버려 두고 은신처로 돌아간다. 반지를 끼고 돌아와 빌보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골룸은 빌보가 반지를 훔쳤다고 생각하고 비명을 지르고 눈을 초록빛으로 불태우며 그에게 다가온다. 빌보는 골룸이 자기를 죽일 생각임을 직감하고 황급히 도망친다. 그 와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손가락에 반지가 스르륵 끼워진다.

 

빌보는 서두르다 나무뿌리에 걸려 엎어지는데, 미처 대처할 틈도 없이 바짝 다가온 골룸이 자신을 못 보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이 발견한 반지가 사람을 안 보이게 만드는 마법 반지임을 알게 된다. 그가 동굴 속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이 바로 이 반지였다. 반지의 힘을 적절한 때에 알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반지가 없었다면, 있었어도 그 힘을 몰랐다면, 그는 골룸에게 잡아먹혔을 가능성이 크다. 반지가 골룸의 손에 남아 있었다면 백 퍼센트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골룸은 빌보가 반지를 훔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반지의 힘은 모를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빌보가 나가는 길을 모른다고 한 말도 거짓말처럼 느껴졌고, 빌보가 동굴을 빠져나가려다가 고블린들에게 붙잡힐 거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그러면 반지를 빼앗길 테고, 고블린이 반지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낀 채 자기를 죽이러 오면 꼼짝없이 당하게 될 거라는 걱정을 하게 된다. 반지의 힘을 써서 여러 고블린을 잡아먹었던 골룸이기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이자 두려움이었다.

 

골룸은 고블린들보다 빌보를 먼저 잡으려고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빌보는 그 뒤를 따라가 결국 입구 앞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입구 앞에서 골룸은 주저앉는다. 고블린들의 냄새가 난 것이다. 그때 빌보가 몸을 움직이자 골룸은 빌보의 냄새도 맡는다. 입구를 딱 막은 채 활시위처럼 몸을 긴장한 채 주위를 경계하는 골룸.

 

빌보는 그런 골룸을 보면서 녀석을 죽이고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가능하면 빨리. 그때 빌보의 마음에 “느닷없는 이해심, 공포와 뒤섞인 갑작스런 연민”이 솟는다. 그는 이미 동굴에서 골룸이 어떻게 사는지 보았다. 곁에 아무도 없고 애지중지하던 반지까지 잃어버린 골룸의 비참한 처지가, “더 나아질 희망도 햇빛도 없이 단단한 돌에 둘러싸여 차가운 물고기만 먹으며 몰래 숨어 속삭이며 살아온 셀 수 없이 긴 세월이” 느껴진 것이다.

 

그때 빌보는 참으로 용감한 행동을 한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골룸을 죽이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그대로 뛰어넘는다. 마법의 반지라는 행운이 열어준 새로운 가능성 중에서 불쌍한 골룸을 살려주고 자기는 빠져나갈 좁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행운으로 주어진 힘에 도취되지 않았다. 행운이 안겨준 힘을 절제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선까지만 능력을 쓰는 데 자족했다. 그런 선택은 나중에 『반지의 제왕』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궁금하신 분들은 책이나 영화를 참고하시길.

 

영화<호빗:뜻밖의 여정> 스틸컷.

 

 

스마우그와의 만남

 

‘대진운’이 최악이었다. 빌보가 도둑질을 해야 하는 상대는 스마우그. 어마어마한 덩치에 불을 뿜고 하늘을 날며 온몸은 방탄 비늘로 덮인 최강 신체의 빌런이다. 탐욕은 끝이 없고, 눈이 매섭기 그지없으며, 교묘한 지능에 달변이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불 뿜는 용 스마우그는 이야기 전개에서 아주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스마우그는 빌보가 난쟁이들과 함께 왔음을 알고 보물에 관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14분의 1이나 그 정도가 계약 조건이었겠지. 하지만 어떻게 운반할 건가? 수레에 실어서 운반할 건가? 무장한 경비병이나 통행료는 어떻게 하고?” 빌보는 실제로 보물의 14분의 1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스마우그의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보물 운반 문제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마우그가 난쟁이들에게서 빼앗아서 깔고 앉은 보물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용의 몸 아래로, 여러 개의 다리와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꼬리 아래, 바닥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펼쳐진 그의 몸 주위로, 헤아릴 수도 없는 귀금속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정련한 금과 정련하지 않은 금, 보석과 장신구, 그리고 불그스름한 빛 속에서 붉게 물든 은이 있었다.” 그중에서 14분의 1이라니. 너무 많은 양이었다. 대부분은 가져갈 수 없을 만큼.

 

스마우그가 이런 질문을 한 목적은 난쟁이들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빌보는 당황했고 정말 그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난쟁이들도 이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뒤에서 내내 나를 비웃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빌보는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고 자기 목적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며 스마우그와의 말씨름을 이어갔다.

 

스마우그는 나쁜 의도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이 대목에서 빌보가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된 일은 나중에 난쟁이 무리와 호수마을 사람들(스마우그의 거처가 있는 산 아래, 난쟁이들의 모험을 후원했던 이들) 사이의 보물 분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인의 악한 꾀가 결국 우여곡절 끝에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언제 봐도 짜릿하고 놀랍다. 그것이 책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강적 스마우그와의 대결이라니, 정말 최악의 ‘대진운’이었다. 그러나 그 강적이 머리를 굴려서 던진 회심의 질문이 빌보에게는 커다란 행운을 안겨 주었다. 덕분에 그는 보물과 관련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우그의 미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족할 줄 아는 빌보 앞에서 끔찍한 충돌과 희생을 막게 해 줄 실마리로 바뀌었다. 빌보의 덕스러운 성품이라는 필터를 거치자, 무서운 유혹이 ‘위장된 행운’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불운이든 행운이든, 결국 그것을 본인과 주위의 많은 이들에게 복이 되게 만드는 빌보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영화<호빗:스마우그의 폐허> 스틸컷.

 

소린의 불운과 행운

 

난쟁이들의 왕 소린은 참으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었다. 스마우그에게 가족과 왕국, 보물까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빼앗긴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오랜 세월 불행에 시달리던 그에게 연거푸 행운이 찾아왔다. 우선, 충직한 신하들이 있었다. 간달프가 난쟁이들의 역사에 개입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로 결정한 것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간달프가 얼마나 많은 위기에서 소린 일행을 구해주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운 좋은 좀도둑 빌보가 있었다. 빌보의 행운은 고스란히 소린의 행운이 되었다.

 

마침내 스마우그가 사라지고 보물을 모두 되찾는 더없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엄청난 행운이 최악의 덫으로 변한다. 소린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독차지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물을 찾은 이후로 소린은 완전히 다른 난쟁이가 되고 그의 최대의 행운 때문에 호수마을의 인간들 및 엘프와 전쟁까지 벌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펼쳐진다. 소린의 탐욕이 그 위기를 만들었고, 모험 내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빌보를 의심하고 밀쳐 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신의 행운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때 자칫 모두의 불행으로 끝날 수 있다는 두려운 사실을 소린은 잘 보여준다.

 

난쟁이들의 왕 소린이 보물에 대한 욕심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면 본인도 완전히 망가졌을 테고, 수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희생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소린이 탐욕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것은 고블린과 늑대, 오크들의 공격이었다. 그들의 침략이 없었다면, 소린은 자신을 도와주었던 엘프, 인간들과 추악한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진짜 적들이 나타나자 소린은 욕심을 떨쳐 내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선다. 싸워야 할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소린을 보면서 한심하게 여기면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유혹이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니겠나. 사랑하는 친구들의 충심어린 조언은 소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정신 차리게 만든 주역이 그를 죽이러 오는 적들이었다니, 큰 아이러니다. 자신의 상황을 빌보처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다른 이들을 통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다면 그것도 큰 복이겠다. 『호빗』을 덮으며,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줄 아는 귀를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빌보보다는 소린에 훨씬 가까운 나이기에.

 

영화<호빗:다섯 군대 전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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