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논쟁의 관건은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물리 법칙에 따라, 즉 물리적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면, 어떻게 행위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수 있느냐이다. 이 문제가 신경과학이나 물리학의 발전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본문 중)

김남호(울산대학교 철학과)

 

‘리만 가설’은 수학계의 대표 난제로 알려져 있다. 철학에 그런 난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자유의지 논쟁’은 철학계의 난제 중 난제로 손꼽힌다. 그러나 수학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난해함의 종류도, 역사도, 그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함의하는 바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의지를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정의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지하는 견해에 따라 그 개념이 조금씩 달리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약하기 전, 고대 그리스인들의 언어적 유대감과 정체성 확립에 큰 기여를 한 호메로스(주전 약 800-700년)의 작품 『일리아드』를 보면, 아킬레우스가 점령한 도시에서 데려온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빼앗은 아가멤논이 그 일에 대해 자기 변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브리세이스를 빼앗게 된 이유는 신들이 회의하여 자신에게 ‘망상과 어리석음’의 신인 아테(ate)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런 구절을 통해서, 호메로스 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한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다고 본다. 그 대신 운명(moria)과 필연(ananke)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즉, 아가멤논의 그러한 부도덕한 판단은 그의 운명이고 필연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상식에서는 아가멤논의 자기 변론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기가 어렵다.

 

플라톤에 이르러 자유로운 행위의 중요성과 의미가 학술적 수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한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토론을 담고 있는 대화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왜 자신의 뼈와 근육이 차디찬 감옥 바닥에 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충분히 망명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혀 독배를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의 뼈와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였기 때문인가? 물론, 신체를 움직이는 원인이 되는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그가 이런 언급을 했지만, 플라톤이 자유로운 선택과 행위의 의미에 대해 알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용어를 구분함으로써 자유의지 논쟁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엘레우테리아(eleutheria)를 ‘우리에게 속함’(up-to-us-ness)과 구분하였다. 전자는 가령 ‘투표할 자유’ 등에 사용한 반면, 후자의 경우는 어떤 선택이나 행위가 ‘본인에 의해 발생했음’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전자는 오늘날의 용어로 ‘행위의 자유’(freedom of action)로, 후자는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로 지칭된다. 행위의 자유는 일상에서 흔히들 생각하는 종류의 자유다. 내가 바닷가에서 요트를 타고 싶지만, 그만한 돈이 없다면 탈 수 없다. 치킨을 먹고 싶지만 감옥에 있다면 먹을 수 없다. 즉, 행위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반면, 의지의 자유는 더 근본적이다. 번개가 치거나 꽃이 지는 사건은 자연 사건으로서 그 원인이 번개나 꽃 자체에 귀속하지 않는다. 반면, 어떤 사람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자 할 때, 그 선택이 강요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그 선택은 행위자 본인에게 귀속한다. 이 지점에서 그 선택의 책임은 본인의 몫이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의지의 자유’는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capacity)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게 빵 하나가 있는데 나보다 더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그 빵을 먹을 수도 있지만 먹지 않고 그에게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인간은 자연 안에서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물리 법칙과 생리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논쟁의 관건은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물리 법칙에 따라, 즉 물리적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면, 어떻게 행위자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할 수 있느냐이다. 이 문제가 신경과학이나 물리학의 발전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주요 개념의 분석, 실험 등의 해석, 논증의 논리적인 검토 같은 작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철학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과학자들은 ‘행위자’(agency)라는 개념을 과학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과학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철학자는 이 개념에 대한 합리적이고, 정합한 생각을 내놓을 수가 있다.

 

벤자민 리벳 실험 등으로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정론이 이전보다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준비 전위’와 같은 신경과학적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피실험자에게 요구하는 ‘버튼을 누름’ 등과 같은 인위적인 실험 방식과 조건이 가치, 옳고 그름, 신념, 희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제 ‘선택의 과정과 유형’을 과연 대표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일은 과학과 철학 지식의 발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학적으로 옳지 않은 지식이나 엉성한 논리로 구성된 변증은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논쟁은 여전히 현재도 진행 중이다. 분명히 답은 둘 중 하나이다. 자유의지가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가 옳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오기 전에, 각 견해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차분하게 따져 물어보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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