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심문관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 대목을 끝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린 셈이 될 것이다. 내 자신에게서 근본적으로 대심문관의 면모를 본다는 두려운 사실 말이다. 나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내 삶의 방식, 원리, 원동력은 사실 다른 자의 것이 아닌가? 내 길이 그분의 간판만 걸고 사탄의 지혜, 에너지, 원리,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려운 일이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난 신의 세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난 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이 점을 알아 둬. 난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그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가 없어.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카라마조프 씨네 둘째 아들 이반이 수도사를 지망하는 동생 알료사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기하학 증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어찌 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능력이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라면 아는 바가 있고, 그 지식에 따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변한다.

 

이반이 말하는 것은 세상의 고통이다. 그중에서도 무고한 아이들의 부당한 고통. 그는 그런 사례들을 줄줄이 나열한다. 어느 집에 침입해 아이들을 포함해 일가족을 죽인 강도, 어머니 눈앞에서 아이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군인, 어린 딸을 무자비하게 채찍질한 아버지. 밤중에 화장실 문제로 부모 손에 엄동설한에 밤새 변소에 갇혀야 했던 다섯 살배기 소녀, 소녀는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를 꺼내 달라고 밤새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다. 그리고 돌을 던지고 놀다가 잘못해서 지주가 아끼는 개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밤새 헛간에 갇혀 있다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벌거벗긴 채 사냥개에 쫓기다 갈기갈기 찢겨 죽은 여덟 살 아이의 이야기.

 

이런 부당한 고통에 대해 이반이 요구하는 것은 한 가지다. “내겐 응보가 필요해. … 응보는 무한 속의 언제 어디선가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거야.” 신을 부정하겠다는 게 아니라 신의 세상, 정의가 부정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 어딘가 낯이 익다. 알료사도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알료사는 존경하고 사랑하던 조시마 장로가 죽고 나서 엉뚱한 이유로 그의 인생이 부정되는 현실 앞에서 ‘정의’가 훼손된다고 느꼈다. 조시마 장로의 인생이 한순간에 매도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세상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료사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대한 환상을 통해, 거기 등장하는 조시마 장로의 권고를 통해, 내세까지 아우르는 큰 시각에서 장로의 인생을, 더 나아가 인간 삶의 가치와 목적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런데 이반은 내세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세에 화해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건 어차피 모르는 일이니까. 아이에게 고통을 가한 가해자와 아이, 아이 엄마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천상의 결합 가능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설령 만물이 ‘주님이 옳으셨나이다!’라고 외치는 순간이 온다 해도, 자신은 그렇게 외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이 세상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은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해소되지 못한 분노를 품은 채로 남겠다”라고 말한다. 그 자리로 가는 “입장권을 정중히 사양하겠다”라고 말한다.

 

그런 지옥을 안고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아이의 고통에 근거하여 이반이 신이 만들어가는 현세와 내세 모두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알료사는 그것이 반역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이반은 도리어 이렇게 묻는다.

 

내가 궁극적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목적으로 인류의 운명의 건물을 건설한다면,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단 하나의 미약한 창조물이라도, 아까 조그만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던 불쌍한 계집애라도 괴롭히는 것이 불가피하여 그 애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을 토대로 그 건물을 세워야 한다면, 그런 조건 아래 건축가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니?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이들이 마음의 동요를 경험할 것이다. 그런 반응의 뿌리에는 한 아이의 생명이 갖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이 질문에는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극한의 선언이 담겨 있다. 오로지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더구나 순수한 아이가, 그 어떤 고고한 목적을 위해서일지라도 희생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반은 아이의 목숨과 고귀함이라는 가치를 고스란히 지키고 싶어 한다. 어떤 타협도 없이 말이다. 그의 입장은 비극을 예고한다. 아이와 약자들이 희생되고 고통당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옳다는 게 아니다. 고통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거다. 그런데 이반은 이런 세상을 거부할 뿐 아니라, 내세에서의 화해 가능성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알료사는 이런 형을 걱정한다. 그가 입 밖에 꺼낸 ‘반역’은 이반의 외통수 상황을 부각시키는 단어다.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알료사는 머릿속에 그런 지옥을 안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형에게 묻는다.

 

알료사는 이반을 그의 지옥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답변을 찾아내야 한다. 그는 이반의 말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이반은 세상에서 누가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알료사는 그런 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길

 

알료사는 그리스도에게 용서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든 어떤 죄악이든 용서하실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그리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무고한 피를 스스로 내놓으셨기 때문이죠. … 건물은 그분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그분을 향해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 이는 당신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라고 외칠 거예요.

 

이반은 알료사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한 편의 서사시를 소개한다. 이른바 “대심문관”이다. 이 시에서 이단 심문과 처형이 횡행하던 15세기 스페인에 그리스도가 강림한다. 세상을 심판하는 분으로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초림 때 3년간 공생애 기간에 보여준 모습으로 와서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고친다. 그런데 대심문관이 나타나 그리스도를 체포해서 심문한다. 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자신이 이룬 ‘성과’를 내세우며 그리스도에게 말한다. “당신은 경고와 지적을 충분히 받았지만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절”했다고 말이다. 여기서 “경고와 지적”은 광야에서 사탄에서 받았던 세 가지 시험을 가리킨다. 하나씩 살펴보자.

 

대심문관은 사탄이 첫 번째 시험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하는구나. 자유에 대한 약속만 있을 뿐 빈손으로 말이다. 하지만 순진하고 본래 비천한 인간들은 그 약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나 인간 사회에서 자유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네 눈에도 뜨겁게 달아오른 이 벌거숭이 광야에서 뒹구는 저 돌들이 보이겠지? 그 돌들을 빵으로 변화시켜라. 그러면 인류는 네가 손을 거둬들여 빵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영원히 불안에 떨면서 착하고 온순한 양떼처럼 네 뒤를 따를 테니.

 

그리스도는 여기에 어떻게 반응했던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간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빵으로 복종을 산다면 그게 무슨 자유인가라고 판단하여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아니,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지녔던 자유라는 선물을 한시바삐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고민은 없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숱한 시행착오와 고통을 겪은 끝에 자신들의 자유를 대심문관 같은 이들의 “발밑에 공손히 바쳤다.”

 

두 번째 시험으로 넘어가 보자. “무섭고 지혜로운 악마”는 그리스도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기를 원한다면 밑으로 뛰어내려라. 성서에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받쳐 주어 땅에 떨어져도 다치지 않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이며, 네 아버지에 대한 너의 믿음이 어떠한지도 입증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말에 굴복하지 않았고 뛰어내리지 않았다. 그 말대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뎠더라도, 밑으로 몸을 던지기 위해 움직이기만 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되어 그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고 당신이 구원하러 온 그 대지와 충돌하여” 악마를 기쁘게 했을 것이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신처럼 당당하고 훌륭하게 행동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되묻는다.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인간의 본성이, 기적을 거부하고 그 무서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고통스러운 정신적 의혹의 순간에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을 것 같소?”

 

그리스도는 성경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인간들이 보고 “자신의 뒤를 따라 기적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기대했”겠지만, 인간은 하나님보다 기적을 찾는 존재라고 대심문관은 일갈한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네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겠다’라고 조롱하고 놀려 대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기적에 의한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인간을 영원히 공포에 떨게 할 권세 앞에서 드러나는 예속적인 노예들의 환희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을 열망했던“ 것이다.

 

대심문관의 비밀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세 번째 시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내가 당신한테 우리의 비밀을 숨길 것 같소? 당신은 내 입을 통해 그걸 듣고 싶은 모양이니 말해 주겠소. 우리가 함께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요. 그것이 우리의 비밀이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당신이 아닌 ‘그’와 함께했고, … 당신이 화를 내며 거부했던 그것을, 악마가 지상의 모든 왕국을 가리키며 당신에게 제의했던 그 마지막 재능을 그에게서 얻어 냈소.

 

대심문관은 세 번째 시험에서 악마가 로마와 시저의 칼을 제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그때 이미 시저의 칼을 얻을 수도 있었소. 어째서 당신은 그 마지막 선물을 거부했던 거요?”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거부한 그것을 자신들은 얻어냈고, 그리하여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지상의 제왕”이 되어 인류의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거부한 길을 대심문관이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대부분의 인간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자유를, 자유로운 섬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할 수 있는 ‘신 같은’ 이들은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는다. 기껏해야 수만 명? 그것은 극소수의 특별한 인간들만 따라갈 수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수많은 약한 자들은 어찌하라는 것인가?

 

대심문관은 자기도 한때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려 했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그 길은 선택된 소수만의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은 절대다수를 떠안기로 결심했다. 그 길은 그리스도를 유혹할 때 드러난 사탄의 지혜를 따라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포장된 악마의 길이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그 진실을 아는 괴로움을 안고 가는 비운을 이야기한다. 비밀을 간직한 자신의 불행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절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선언한다. “그들(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간 소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만을 구원했을 뿐이지만 우리들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했노라고.” “나는 죄를 모른 채 행복에 젖어 있는 수억 명의 갓난애들을 가리키겠소. 그들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죄를 떠맡은 우리는 당신 앞에서 ‘우리를 심판하라. 그것이 가능하며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하고 말할 것이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고 있지만 실상 악마의 길을 따르는 자들을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생각은 없지만 그분의 이름이 주는 아우라를 거부할 생각도 없다. 자기가 그리스도보다 지혜롭고 자비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보다 나은 길로 사람들을 이끌겠다고 나선다. 예수의 이름을 걸고 있다고 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들은 섬뜩하게 보여준다.

 

대심문관만 이런 길을 간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럿이 예수님을 자기 길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것은 오병이어 기적 후 예수님을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길이었고, 십자가로 가지 말라고 예수님을 꾸짖었던 베드로의 길이었으며,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면 믿겠다던 구경꾼들이 제시한 길이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간다.

 

대심문관의 말은 ‘어떤 대목에서는’ 진정성 있게 들린다. 특히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지적 앞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은 원래 누구도 ‘자기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래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도 못 가는 길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길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모두가 초청받는 길이지만, 자기 힘으로는 누구도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필요하지 않았을 테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바울의 권고도 없었을 것이다.

 

대심문관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 대목을 끝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린 셈이 될 것이다. 내 자신에게서 근본적으로 대심문관의 면모를 본다는 두려운 사실 말이다. 나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내 삶의 방식, 원리, 원동력은 사실 다른 자의 것이 아닌가? 내 길이 그분의 간판만 걸고 사탄의 지혜, 에너지, 원리,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려운 일이다.

 

두 입맞춤

 

대심문관이 장황하게 자기를 변호하고 정당성을 내세우는 동안 그리스도는 침묵한다. 대심문관은 말을 마치며 다음날 그리스도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런 다음, 잠자코 그리스도의 답변을 기다린다. “두렵고 듣기 싫은 이야기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 말 없던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에게 다가와 “아흔 살 노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네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돌아와라.” 이런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심문관의 반응에 있다. 심문관은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감옥 문을 열고 죄수에게 말한다.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 앞으론 절대 찾아와선 안 되오. … 절대, 절대로.” 대심문관은 자신을 속이며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사탄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크게 동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입맞춤은 그런 노회한 성직자에게 그리스도의 진심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반에 따르면, “그 입맞춤이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지만” 대심문관은 과거의 사상을 고수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대심문관에게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길을 정직하게 돌아볼 기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기회.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기회를 날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이야기를 마친 이반에게 알료사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반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형한테 다가가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형은 동생의 입맞춤에 문학적 표절이라고 말하면서도 환희에 차서 작별을 고한다. 두 사람도 각자의 길을 간다. 이반의 길은 부친 살해를 방조하는 길이다(이것은 무고한 자들의 고통이 만연한 세상을 만든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전면적 거부의 상징으로도 읽힌다). 알료사의 길은 (본인도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알고 보면) 부친 살해를 막기 위한 동분서주의 길이었다.

 

그 동분서주 와중에 알료사는 일류사라는 아이와 맞닥뜨린다.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 알료사의 입을 빌어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답변을 제시했던 작가는, 이제 일류사라는 아이의 고통과 알료사의 만남을 통해 문학적 답변을 내놓고 있다. 한 아이의 구체적인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 아이의 고통에 대한 알료사의 연민과 수고를 통해 그가 생각하는 답변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자유롭게 섬기는 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의 답변이 성공적이었는지는 독자가 직접 읽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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