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장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모사한다. 선거 과정도 선출 방식도 이를 흉내 낸다. 학급 회의는 충분한 설명과 토의 없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데만 급급하다. (교회학교 회의나 회장을 뽑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달리기만 축구 기술이 아니듯이 민주주의에서도 다수결만 답이 아니다. 다수결, 참여, 소수 의견자 권리에 대한 인정, 다른 가치에 대해 귀 기울여 듣기 등 많은 것들의 함양이 진정한 민주시민을 위한 조건이다. (본문 중)

이봉수(덕성여고 교사)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조로아스터교는 조로아스터가 페르시아 지역에서 창시한 종교로 그 특징은 선악 이원론이다. 아후라 마즈다는 선의 신이며 인간과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을 창조했다. 앙그라 마이뉴는 아후라 마즈다에 저항해서 싸우는 악의 신이다. 선과 악의 싸움은 결국 선의 싸움으로 끝날 것이고 앙그라 마이뉴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반면, 기독교는 정의와 선의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이 창조되어 나왔다고 말한다. 악은 선의 하나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악도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이해했다. 선악에 대한 세계관이 달라지면 악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 조로아스터교가 악과 악인을 소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면, 기독교는 악인을 선을 회복시켜야 할 긍휼의 대상으로 여긴다.

 

조로아스터교 정치 현상

 

정치란 사회적 희소 자원을 권위를 통해 배분하는 과정이다. 권위주의 정치가 소수 혹은 독재자의 의지에 이 배분의 힘을 귀속시킨다면, 민주 사회는 시민에게 속한 권력을 기반으로 협력과 양보를 통해 그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시민 개인의 욕구, 취미, 가치가 다양해지면 협의는 쉽지 않은 과정이 되고 정치는 하나의 예술로 승화된다. 정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반목의 긴 역사와 진자 같은 진보와 퇴보, 그리고 협의를 통해 정치 발전의 걸음을 내딛어 왔다.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 정치의 걸음을 성큼성큼 걷고 있고, 많은 후발 국가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 나타난 대립과 갈등의 정치 현상은 우려할 일이다. 팽팽한 대립으로 0.73%, 24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가 났는데, 패배한 쪽은 ‘선의 패배’, ‘악의 승리’로 받아들이며 절망에 빠져 있고 승자는 그 반대이다. 기사와 댓글, 유튜브 등의 공간에서 다른 색깔의 전투복을 입은 진영이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10여 년째 벌어지고 있는 전쟁인데, 조로아스터교적 이원론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성숙한 민주 사회를 향해 나가던 담대한 걸음이 왜 비틀거리게, 또는 퇴보하게 되었을까? 제도적 이유로는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기 힘든 양당제 기득권 정치 구조를 들 수 있겠다. 소선거구제의 국회의원 선거 제도나 단순다수대표의 대통령 선거 제도에서 시민들은 오직 두 개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당한다. 과일 시장에 갔더니 배와 사과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것이다. 딸기나 체리도 먹고 싶은데 말이다. 기득권 양당의 탐욕이 얼마나 강한지는 지난 국회의원 선거의 위성 정당 사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낡은 문법의 언론 보도를 들 수 있겠다. 민주화 이전에나 이후에나 영향력 있는 주요 언론은 헐뜯고 왜곡하고 과장하는 데만 능숙하다. 이들은 세상을 둘로 가르고 분노를 조장한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충실한 사제들이다. 영향력이 커진 뉴미디어의 문제도 있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의 돌격 대장이다. 조회 수가 행동 자금이고 헌금인 이들은 왜곡을 넘어 사실을 창조하고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정치인들은 공모자로서 이런 언론 환경을 교묘히 이용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들 공모자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을까? 민주 정치란 결국 다수 시민의 의사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인데, 우리가 반성할 점은 없을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갔을 때 아론이 백성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준 것은, “일어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는 백성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단과 분열의 한쪽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또 다른 편의 사람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편 가르기 정치는 편 가르기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편 가르기식 사고방식은 민주 시민 교육 부재의 공백 속에서 자라났고, 과거 민주화 투쟁 과정의 상흔 때문에 강화되었다.

 

 

뻥축구와 빌드업

 

과거 한국 축구를 ‘뻥축구’라고 불렀다. 기술과 실력이 부족하니 강팀과 싸울 때 주로 쓰는 전술이 뻥 차는 것이다. 대부분 수비에 치중하다 역습 기회가 생기면 발 빠른 선수들은 힘껏 전방을 향해 뛰어가고 멀리서 공을 뻥 차서 요행을 바라는 축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 축구가 많이 발전했다. 요새 국가대표 경기를 시청하면 많이 등장하는 말이 빌드업이다. 빌드업은 전체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전략과 전술에 따라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빌드업에는 기술, 체력, 전술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 대표팀이 빌드업을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는 논란인데, 이는 개최될 월드컵에서 밝혀질 것이다.

 

과거의 민주 시민 교육은 뻥축구에 비유할 수 있겠다. 학생들을 민주 시민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도, 역량도 부족했다. 학생 자치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도, 교사도, 교육 당국도 요행히 좋은 시민이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분법적 태도가 민주 시민 교육의 부재 혹은 저급함에서 시작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는 민주 시민 양성을 위한 빌드업이 시도되고 있다. 진보 교육감들의 등장으로 민주 시민 교육은 학교의 중요한 의제다. 서울시 교육청의 경우 ”교복 입은 시민“이라는 주제로 학생 자치 예산을 지원하고, 학생 자치회 시간을 확보하라는 지침이 계속 내려오고 있다. 촛불 시위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효능감이 높고 참여에 대한 열의도 크다. 하지만 민주 시민의 역량 향상이라는 목표(goal)에 비추어보면, 이 빌드업에 미덥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학생회장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모사한다. 선거 과정도 선출 방식도 이를 흉내 낸다. 학급 회의는 충분한 설명과 토의 없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데만 급급하다. (교회학교 회의나 회장을 뽑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달리기만 축구 기술이 아니듯이 민주주의에서도 다수결만 답이 아니다. 다수결, 참여, 소수 의견자 권리에 대한 인정, 다른 가치에 대해 귀 기울여 듣기 등 많은 것들의 함양이 진정한 민주시민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민주 시민 교육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20여 명밖에 안 되는 학급에서 회장을 꼭 뽑아야 하는 것일까? 위원회 형식으로 학급을 운영하여 다 같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참여 경험을 하는 것은 어떨까?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를 학급 단위에서 실현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학생회는 꼭 대통령제의 모사여야 할까? 러닝메이트 부통령제, 결선 투표제, 의원 내각제 등 다양한 정치적 실험을 통해 정치 제도에 대한 지식과 유연한 태도를 키우는 것은 어떨까? 학급회의에서 다수의 의견은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다수의 의견에 반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같이 토의하고 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학급 회의에 심의형 배심원제를 도입하여 찬반 논거를 충분히 듣는 훈련을 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은 어떨까? 사족이지만, 평가 문제도 중요하다. 5지선다 문제 형식이 삶이나 정치에도 명확한 정답이 있다는 확신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 서술·논술형 문제 확대로 정답도 의논 될 수 있고 형성될 수 있다는 태도를 배우게 하면 어떨까?

 

빌드업은 뻥축구보다 지난하다. 하지만 뻥축구는 요행을 바라는 것일 뿐 실력은 아니다. 지금 당장 갈등과 대립의 정치 문제를 해소하기는 어렵다. 요행히 해소가 되더라도 건강한 시민사회라는 배경이 없다면 후퇴는 순식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통합과 이해의 정치를 바란다면, 시선을 뒤로 돌려 민주 시민 교육의 빌드업을 위해 차근차근 노력해야 한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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