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쪽으로는 연해주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남쪽으로는 쿠릴 열도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의 이해가 충돌한다. 미국의 패권 유지 전략을 강의한 김준형 교수는 ‘킨더버거 함정’(Kinderberger Trap) 가설을 소개했다. 유럽 부흥 계획인 마셜 플랜의 기안자인 킨더버거는, 국제 정치에서 공공재를 제공하는 패권국이 부재할 때 국가 간의 신뢰가 낮아지고 강대국들은 각자도생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본문 중)
윤은주(이화여대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뉴코리아 대표)
한반도 평화 완성과 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역할에 주목하며 평화 시민 교육에 힘써 왔던 사단법인 뉴코리아는 지난 6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서초평화포럼을 개최했다. 남북 관계를 비롯해서 러시아와 중국, 일본과 미국 전문가들이 다섯 번의 강연을 했고, 마지막엔 민통선 내 도라산 전망대에서 개성 공단을 목전에 두고 과거 남북 경협의 현장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전문가들은 한반도 정세에 한결같이 우려를 표했다. 중국과 미국, 러시아와 미국의 세력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미국과 동맹국인 우리가 전쟁 발발 시 연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쪽으로는 연해주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남쪽으로는 쿠릴 열도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의 이해가 충돌한다. 미국의 패권 유지 전략을 강의한 김준형 교수는 ‘킨더버거 함정’(Kinderberger Trap) 가설을 소개했다. 유럽 부흥 계획인 마셜 플랜의 기안자인 킨더버거는, 국제 정치에서 공공재를 제공하는 패권국이 부재할 때 국가 간의 신뢰가 낮아지고 강대국들은 각자도생을 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각처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1989년 소련과의 탈냉전 선언 이후 미국이 누려 왔던 초강대국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위해 군사력을 지원하면 우리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하나의 중국’ 전략을 강행하는 중국과 대만 분쟁에 우리가 끌려 들어가게 된다면? 쿠릴 열도에서의 중국과 일본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한미 동맹에 따라 군사력을 투입해야 한다면? 일본의 영토 분쟁에 우리가 연루되면 미일 동맹의 하부 구조 속에서 한미 동맹이 작동하게 된다. 그러면 독도를 놓고 갈등하는 일본을 위해 우리가 협력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30여 년간 러시아, 중국과 교류하며 닦았던 시장 경제 인프라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대안을 찾을 것인가?
국제 정치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아편 전쟁을 지휘했던 영국의 외무장관 파머스톤의 말이다. 냉전 시대를 뒷받침했던 이념 대립은 퇴색한 지 오래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보다 현격히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달러 패권도 아직 유력하다. 우리와 미국의 동맹 관계는 군사에서 경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안미경중(安美經中) 전략을 보다 심도 있게 구사해야 할 처지가 됐다. 미국 역시 국익을 위한 대외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남북 관계는 심각한 경색 국면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여러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이 있었지만 북미 관계에서 풀어야 했던 북한의 핵 문제 협상이 불발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문제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 남북 관계를 넘어서는 국제 체제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인 것이다. 미국과 우리의 정권 교체로 인해 일관성을 상실한 대북 정책은 협상을 번번이 무위로 돌려버렸다. 안타깝게도 대북 정책 실패의 책임은 북한에게만 오롯이 전가되고 있다. 북한에게 불량 국가 이미지는 딱 씌우기 좋은 매칭이다.
북한의 핵 개발이 문제시된 것은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 가입해 있던 북한이 1993년 탈퇴 선언을 하면서부터였다. 북미 직접 협상을 비롯해 6자 회담 틀에서 수십 년간 협상과 합의가 있었지만, 북한은 2006년 1차 핵 실험을 강행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 9‧19 합의가 실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2017년 11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 2018년 6월 북미 정상 회담으로 다시금 협상 타결의 전조가 보이는 듯했지만, 2019년 2월 북미 정상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비핵화를 겨냥한 미국의 대북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17년 세계 핵무기 동향 보고서에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에 이어 북한을 9번째 핵 보유국으로 기록했다. 2018년과 2019년은 어쩌면 북한의 핵 포기 유도를 위한 마지막 협상 국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비핵화를 선제적으로 내세우는 대북 정책은 이제 실효성을 잃어버렸다.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평화를 완성할 것인지 대북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북한이 내민 손을 뿌리친 것은 미국이다. 다 늦은 책임 공방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볼 때이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소련,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자, 북한은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관계 정상화를 타진했다. 기존의 입장을 바꿔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지 않는 평화 협정 체결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당 독재 체제가 붕괴하는 정세 속에서 북한 정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서독 통일과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처형은 ‘정권 붕괴 후 흡수 통일’이라는 막연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남북 관계와 동·서독 관계는 전혀 맥락이 다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북한의 김일성 역시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 주체사상과 사회 정치 생명체론을 기반으로 하는 북한의 집단주의 시스템은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 구조의 유기체적 질서이다. 인구의 10~13% 이상이 당원인 북한은, 당원 가족들까지 고려할 때,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정치적으로 이해를 같이하는 것이다. 북한의 내구성이 동독이나 루마니아와 전혀 달랐던 배경이다. 김일성 수령 사후 고난의 행군기를 거쳐 3대 세습이 이어지면서도 내구성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세력 경쟁이 노골화한 지 10년이 넘었고,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도 전쟁으로 비화했다. 쿠릴 열도와 남중국해에서의 중-일, 중-대 갈등도 언제 군사 행동으로 표출될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국익을 위해 취해야 할 외교 전략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 엄혹한 국제 사회 역학을 직시하고 대북 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 한미 동맹만 중시하는 대외 정책도 위험하다. 실패한 대북 정책을 고집하며 북한 때리기로 일관하다가 정권의 근간이 훼손될 수도 있다. 부디 역사로부터 지혜를 구해 대북 정책도 대외 정책도 성공시키는 정부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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