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지만,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 판타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지옥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그려 내는 것, 지옥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판타지라는 구조를 통해서 인간이 어떤 선택에 놓여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자신의 선택을 돌아볼 기회를 주려 할 뿐이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밀도의 문제
루이스가 신학적 판타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그려 내는 지옥은 불구덩이에서 사람들이 고통받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만 하면 뭐든지 만들어지는 곳, 말하자면 아쉬울 게 없는 곳이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의지를 극단적으로 관철하려 하는 탓에 다른 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각자가 한없이 고립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옥 언저리에서 천국 언저리로 떠나는 버스가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또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분노와 다툼, 욕설, 싸움은 끊이지 않는다. 이야기의 화자(루이스 본인을 모델로 한 캐릭터. 이후 L.)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천국 언저리로 올라간다.
하늘을 날아 천국의 언저리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환한 빛 속에 선 승객들에게서 L은 눈을 떼지 못한다. “빛 한복판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그들은 투명했다. 빛을 배후로 서 있을 때는 완전히 투명했고, 나무 그늘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불투명한 부분이 생겨서 얼룩덜룩하게 보였다.” 그들은 유령이었다.
찬연한 공기 위에 묻어 있는 인간 형상의 얼룩이었다. … 나는 그들이 밟고 가는 풀이 휘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유령들은 너무나 밀도가 낮아서 투명하게 보인다. 떨어지는 사과 하나만 맞아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잎사귀 하나를 드는 것도 어렵다. 꽃이 발을 뚫고 솟아오른다.
그런데 그들을 맞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견고한 이들(Solid People)이었다. 유령들과 달리 그들이 “강인한 발로 땅을 밟을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버스가 도착한 곳이 천국의 언저리라면, 더 깊은 천국이 있었다. “아득히 먼 저쪽, 거대한 구름 내지 산맥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 틈으로 가파른 숲과 깊이 팬 골짜기, 까마득한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고산 도시들의 형체”가 언뜻언뜻 보였다. 천국의 주민들은 “산맥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살고 있다.”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이미지겠다.
크기의 문제
그런데 L을 맞이한 조지 맥도널드에 따르면, 유령들을 맞이하러 온 견고한 이들은 그 귀중한 여행을 미뤄두고 측량할 수 없이 먼 거리를 되돌아온 것이었다. 한 유령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L은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제대로 하려면 “버스가 출발했던 곳”까지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절벽 가장자리 너머, 큰 만(彎)이 있는 곳”을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서 맥도널드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여기 좀 보게”라고 말하고는 손바닥과 무릎으로 땅을 짚고 엎드렸다. 그는 풀잎을 하나 뽑아서 그 끝을 지시봉 삼아, 땅에 아주 작게 갈라져 있는 틈을 가리켰다. 그리고 L이 타고 온 버스가 올라온 틈도 이보다 크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L은 자신이 버스를 타고 오면서 무한한 심연을 보았고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을 올라왔다고 말한다. 그 절벽 위에 자신이 서 있는 이 나라가 있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맥도널드는 버스 여행이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었다고, 버스와 그 속에 타고 있던 일행 모두가 천국 언저리로 가까워질수록 커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한없이 텅 비어 있던 지옥이 그 작은 틈에 있었다니?
맥도널드는 지옥을 두고 “이 나라, 이 참된 세계의 원자 하나보다 더 작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비를 가리키며, 나비가 지옥을 삼켜버린다고 해도 나비는 느끼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L은 그곳에서 왔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거기 가 보시면 크게 보일 거라고 항변하는 L에게 맥도널드는 이렇게 단언한다.
지옥에 있는 모든 고독과 분노, 증오, 질시와 참을 수 없는 갈망을 다 하나의 경험에 뭉쳐 저울에 올려놓는다 해도, 천국에서 가장 작은 존재가 느끼는 찰나의 기쁨에도 미치지 못한다네. 선이 선에 충실한 데 비해, 악은 악에도 충실할 수가 없어.
같은 논리로,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영혼은 무(無)에 가깝다. 쭈그러들어 자기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보다시피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밀도와 크기라는 두 시각적 이미지로 대비시킨다. 지금 우리에게는 물질이,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욕구와 질투, 욕망, 미움 등의 격한 감정들이 가장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것들이 선명하고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런 것들 앞에서 하나님이니 하나님과의 관계니 구원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 실체가 없는 희미하고 미미한 것들로 보인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의 이혼』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판타지적 구성을 통해 그러한 우리의 인식과 시각을 뒤집어 놓는다. 천국이야말로 충만하고 단단하고 크고 거대한 곳이고, 그곳 주민은 견고하고 존재감이 가득한 반면, 지옥과 그곳의 주민은 존재 자체가 희미하고 미미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끝에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은 유령들이 견고한 이들의 초청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살펴보자.
유령들, 천국의 초대 앞에 서다
지옥에서 올라온 유령들은 여러모로 다양하다. 교육 수준이나 관심사, 생전의 상황, 죽게 된 계기까지 다 다르다. 그들이 천국의 언저리를 방문한 목적도 다 다르다. 따라서 그들을 맞으러 온 견고한 이들이 겨냥하는 지점도 다르다.
자신의 투명하고 희미한 모습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 기겁을 하며 버스로 돌아가는 유령도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생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하던 대로 자신을 맞으러 온 견고한 이를 유혹하려 들다 여의치 않자 분개하며 버스로 돌아가는 유령도 있다.
L도 알아볼 정도로 생전에 유명했던 화가 유령은 또 어떤가. 그는 천국에서 자기가 개성 있는 그림을 그려서 유명해질 수 있다면 깊은 천국으로 따라갈 의향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천국은 유명해질 수도 없고 무언가를 그리기 전에 보고 누려야 할 곳이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진다. 급기야 자신이 죽은 후 세상에서 완전히 잊혔고 퇴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자 이 사태를 되돌릴 방안을 궁리하며 버스로 돌아간다.
세상에서의 지명도와 성공에 아직도 연연하고 천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유명해질 수 있기만 바라고, 그럴 수 없는 천국이라면 자기는 있을 이유가 없다는 화가 유령의 모습은, 이 작품을 사후에도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식으로 읽는 것이 적절치 않음을 잘 보여 준다. 이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나오는 숱한 사례들은 생전에 그들이 어떤 생각과 지향점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판타지라는 설정을 통해 지금 여기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 우리의 관심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의 선택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선택인지, 그것이 하나님과 선을 선택하는 일인지 지옥과 자아를 선택하는 일인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유명화가 유령뿐 아니라 남편을 뜻대로 좌지우지했던 아내, 배교한 신학자에 이르기까지 『천국과 지옥의 이혼』의 유령들은 자기 뜻대로, 자기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천국으로 입성하고자 한다. 생전에 살던 대로 천국을 차지하고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것이 거부당하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천국에서 섬기느니 차라리 지옥에서 지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유령들을 지켜보면서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 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안에는 이 두 방향성이 혼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고, 또한 늘 자기를 돌아보는 경성함이 필요한 것이겠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 판타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지옥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그려 내는 것, 지옥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풀어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판타지라는 구조를 통해서 인간이 어떤 선택에 놓여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어 자신의 선택을 돌아볼 기회를 주려 할 뿐이다. 이제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사라 스미스 vs. 프랭크
천국 주민과 지옥 주민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대결하는 이 판타지의 핵심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사라 스미스와 프랭크의 만남이 그것이다.
사라 스미스(이하 ‘부인’)는 단단한 사람 중에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다. 세상에 있을 때는 알아주는 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생명”이 그녀로부터 흘러넘쳐 그녀를 만난 사람은 “모두 그녀의 아들딸이 되었다.” 그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바라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더 충실한 남편이 되었다. “연못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더 멀리 퍼져 나가”듯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부인은 허깨비 둘을 맞이하러 나왔다. 키 크고 깡마른 삼류 배우 같은 유령이 풍금 연주자가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만큼 자그마한 유령을 사슬에 묶어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난쟁이 유령이 손에 사슬을 들고 있고, 목에 족쇄를 차고 있는 쪽이 삼류 배우 유령이었다. 부인은 난쟁이에게만 말을 건다. 난쟁이의 이름은 프랭크. 세상에 있을 때 프랭크와 부인은 부부였다. 난쟁이 유령은 삼류 배우 유령에게 말을 시켜 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죄책감을 끌어내려 하지만, 부인에게서 흘러넘치는 기쁨과 사랑이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는 그것을 거부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그의 존재의 핵심은 ‘남의 동정심을 악용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슬에 묶여 있던 유령은 그가 남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악용하기 위해 늘 써먹던 ‘연기’(演技)가 형상화된 것이었다. 점점 작아지던 프랭크는 결국 압도적인 사랑과 기쁨으로 들어오라는 부인의 초대를 한사코 거부하던 끝에 사라져 버리고 배우 유령만 남는다. 그리고 부인에게 몇 마디 건네던 배우 유령은 실체가 없고 거짓에 불과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 부인에게 간파당하자 사라져 버린다.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는 척도로 밀도(단단함, 실체성), 크기에 이어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지명도, 유명도다. 밀도와 크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명함의 척도도 여기서 뒤집히고 있다. 사라 스미스는 세상에 살 때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부터가 그녀의 그런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스미스는 ‘김’ 씨 정도 될 것 같고 사라는 영자, 정자, 영숙, 정숙쯤 될까.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천국에서 평가받는 그녀의 삶의 가치와 영향력은 거대한 것이었고 너무나 뚜렷한 것이었다. 그 실체는 천국에서 온전히 드러났다. 그녀의 삶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강력하게 보여 준다.
사실성의 원천
앞에서 천국이 충만하고 단단하고 크고 거대한 곳이고 그곳 주민은 견고하고 존재감이 가득한 반면, 지옥과 그곳의 주민은 존재 자체가 희미하고 미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루이스는 『기적』 11장에서 하나님이 “모든 구체적이고 개체적 사물과 사건의 궁극적 원천”이시라고, 즉, “최고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추상적이고 일반적 원리가 구체적인 실재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창안하시며 행동하시며 창조하시는” 존재다. “하나님은 모든 사실성의 원천”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가까이 갈수록 또렷하고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분이 알아주시는 것만이 중요하기에, 사라 스미스 같은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명한 사람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루이스는 『기적』에서 하나님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그분이 막연해서가 아니라,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 너무 분명한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루이스의 상상력에 힘입어 나는 세상에서 희미하고 작게 여겨지는 천국의 가치와 실재들이 오히려 견고하고 거대한 것이며, 세상에서 유명한 것과는 다른 진정한 유명함이 따로 있을 수 있음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독자들도 이 책이 주는 반전의 상상력을 통해 색다른 위로와 격려를 맛보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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