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J. 사이더가 지난달 27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사람들은 그를 복음주의 좌파, 급진적 복음주의자로 불렀지만 평소 그 자신은 ‘성경에 충실한 복음주의자’로 불리길 바랐다. 별세하기 몇 해 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세운 단체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의 이름을 Christians for Social Action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복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더 분명히 유지했다.  그런 그의 삶과 사상을 주요 문서 중심으로 정리함으로써 그를 추도하고자 한다. (본문 중)

정지영(전 IVP 기획주간)

 

로널드 J. 사이더가 지난달 27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사람들은 그를 복음주의 좌파, 급진적 복음주의자로 불렀지만 평소 그 자신은 ‘성경에 충실한 복음주의자’로 불리길 바랐다. 별세하기 몇 해 전,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세운 단체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의 이름을 Christians for Social Action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복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더 분명히 유지했다. 그런 그의 삶과 사상을 주요 문서 중심으로 정리함으로써 그를 추도하고자 한다.1)

 

천생 복음주의 재세례파 사이더2)

 

론 사이더는 부흥 운동, 웨슬리안 성결, 재세례파 전통이 한데 어우러진 그리스도 교회 형제단 목사/농부의 아들로 1939년 9월 17일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즈음 가정 예배를 드리던 중 그리스도를 영접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교회가 그에게 전해 준 신앙에는 사회 복음과 근본주의 교회로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던 당시 교회들과 달리 복음 전도와 사회 운동 사이에 어떤 간극도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믿음과 가정생활의 모범인 아버지로부터의 신앙 교육과 재세례파 전통을 가진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이후 그의 신학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배경이 되었다.3)

 

역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들어간 대학에서 사이더는 한때 근대 계몽주의 영향 아래 세속화된 학문 세계를 경험하며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과장으로 부임한 기독교 학자이자 변증가 존 워윅 몽고메리가 베푼 합리적 변증과 우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회복했고, 역사를 변증의 도구로 삼아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세상 지식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해’ 진학한 예일 대학교와 신학교에서의 IVF 활동을 통해 그의 기독교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 사이더는 신학 연구와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일반 대학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학자로 그리고 동시에 IVF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한다.4) 그의 박사 학위 주제는, 마르틴 루터의 반대자였다가 후에 그의 지지자가 되었으나 교회 개혁 과정에서 신학 차이로 결국 루터와 결별한, 급진 종교 개혁자이자 종교 개혁 좌파 인물인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 폰 카를슈타트였다. 1974년 브릴(E. J. Brill)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포트리스(Fortress) 출판사를 통해 개정된 후 최근 『카를슈타트와 루터의 대결』(일문사, 2016)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사이더는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를 온전히 이해하고 실천했던 18,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을 현대 교회가 다시 깨닫게 하는 일에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기독교 사역으로의 소명은 청년 대표로 세계 선교 대회에 참석해 사회 정의에 대한 복음주의 교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휘튼 선언”(1966)을 발표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로널드 사이더

 

불편한 복음주의의 양심, 사이더

 

1968년 메시아 칼리지가 템플 대학교와 제휴해 세운 필라델피아 캠퍼스에서 교수직을 맡은 직후, 그는 가족과 도심 흑인 거주 지역으로 이주해 살면서 직접 목격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그들의 가난에 대해 교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강의와 집회를 통해 그의 사역을 구체화했다. 일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칼 헨리, 버나드 램, 존 요더, 데이비드 모버그, 리처드 마우, 루이스 스미디즈, 낸시 하데스티, 새넌 갤러거, 사무엘 에스코바 등 교회 원로와 소장 신학자 및 활동가와 함께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시카고 선언”(1974)을 이끌어 기독교 안팎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5)

 

같은 해 사이더는 빌리 그레이엄이 소집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에서 ‘복음 전도는 논리적으로 우선하지만,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는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내용이 로잔 선언에 반영되도록 존 스토트와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로잔 대회와 다음 해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에 실린 그의 글 때문에 그는 주목받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통전적 구원,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 관계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존 스토트의 응답 글과 함께 『복음 전도, 구원, 사회 정의』(IVP, 1985)로 국내에 출간 소개된다.6) 그러나 사이더가 영미 복음주의를 넘어 전 세계 기독교권에 각인된 계기는 1977에 일어난 일이다.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초판 미국 IVP)의 출간이 그것이다.7) 많은 사람에게 사이더는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될 만큼, 이 책의 영향력은 대단했고 충격적이었다. 출간되자마자 영미 복음주의자들로부터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 책은, 하나님은 영적으로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의 하나님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개인적, 교회 공동체적, 사회정치적 세 차원에서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도전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 안주하고 있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을 통렬히 고발했고 제3 세계 기독 지성인들도 각성하게 했다.8) 책이 불러온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 책 때문에 사이더는 일부에 의해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고, 이후로 복음주의 좌파로 확실하게 분류되었다.9) 이런 비판에는 자신의 경제학에 대한 전문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자초한 면이 있음을 인정한 그는, 이후 개정판을 통해 기독교 경제 윤리, 복음 전도와 사회 변혁에 관한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고, 선포 없는 사회적 참여나 행위 없는 복음 선포의 복음을 ‘반쪽짜리 기독교’라 부르며 에큐메니컬과 복음주의 모두가 회복해야 할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총체적 복음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제시하는 책들인, 『정의와 사랑의 복음』(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부, 1990),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IVP, 1997), 『물 한 모금, 생명의 떡』(IVP, 1999) 등을 출판했다.

 

특히, 90년대 이후 사이더는 그리스도인의 개인 윤리의 중요성을 재천명함과 동시에, 기독교 우파의 득세 문제, 사회와 경제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가족, 동성 결혼, 낙태, 환경 같은 사회 이슈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정치적, 정책적으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IVP, 2006),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홍성사, 2010) 등에서 다루며 급진적 제자도의 삶을 구체화한다.10)

 

평화주의자 사이더

 

사이더를 사회 변혁, 경제 정의, 통전적 제자도의 선구자 정도로만 인식한다면, 이는 사이더를 반쪽만 아는 것이다. 사이더의 삶과 신앙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면은 평화주의에 대한 헌신이다. 이는 그의 재세례파 신앙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9년에 출판했다가(Herald Press) 2001년에 다시 출간한(Wipf & Stock) 『그리스도와 폭력』(대장간, 2012)은 그의 평화주의 입장을 잘 드러내 준다. 사이더는 이 책에서 정치적 무력 사용이 기독교 전통과 양립할 수 없다는 기독교 비폭력주의를 옹호하고, 부당한 경제 구조에 참여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강조한다. 냉전 구도 속에 있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사이더는 일련의 책을 통해 복음주의자에게 핵무기 사용에 반대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는 복음주의 진영과 갈라서게 된다. 특히 제람 바즈는 『핵전쟁과 평화주의』(생명의말씀사, 1987)에서 정의로운 전쟁의 가능성만 아니라 핵무기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사이더의 견해를 통렬하게 반박한다.11)

 

평화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책으로 집대성된 듯하다. 『비폭력 행동』(Nonviolent Action; Brazos, 2015)은 비폭력주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룬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같은 역사적 비폭력주의 운동, 공산주의를 포함한 국가 폭력의 역사 등을 통해 비폭력주의의 변혁적 힘을 주목한다. 『예수가 주님이시라면』(요단, 2021)은 초기 저작에서 주장했던 평화주의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철저히 근거해 있으며, 이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어떻게 수납하고 살아 냈는지를 성서신학적으로 정립한 완숙한 신학 작품이다. 이 두 책을 통해 사이더는 그동안 설파해 왔던 통전적 복음, 즉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며 꾸준히 활동해 왔다.

 

“미국의 공적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복음주의자, 가톨릭교도, 아프리칸-아메리칸, 라틴계 그리스도인들이 pro-family, pro-poor, pro-life, pro-radical justice의 정치적 의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법을 배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12) 사이더의 이 말에는 그가 평생 추구하며 살아왔던 기독교 사역의 핵심이 잘 담겨 있다. 이 뜨거운 의제를 가지고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가진 자와 없는 자, 평화주의자와 정당 전쟁론자 사이에서 복음의 통전성을 설파하고 온전히 살아 내고자 했던 로널드 사이더가, 이제 지난했던 삶을 끝내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Rest In Peace, Ron!

 


1) 이글은 <복음과 상황> 155호, 2005년 3월호에 필자가 쓴 “로날드 사이더, 책으로 읽기”의 오류를 수정하고 내용을 보강해 다시 쓴 것이다.

2) 로널드 사이더는 자신의 신앙 여정을 『복음 전도와 사회 운동』(CLC, 2013) 1장에 압축해 놓았다.

3) 아버지가 그에게 준 영향을 그는 I am not a Social Activist (Herald Press, 2008) 여러 곳에서 증언한다. 특히 part 2 My Father’s Briefcase를 보라.

4) 그의 학문 이력은 다음과 같다. 캐나다 워털루 루터란 대학에서 역사학 학사(1962), 예일 대학에서 역사학 석사(1963), 예일 신학교에서 신학사(1967), 다시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1969).

5) 이 선언의 정확한 이름은 “The Chicago Declaration of Evangelical Social Concern”으로, 성경 무오성을 천명한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1977), 고대 기독교 전통에 대한 강조를 다룬 “The Chicago Call”(1977)와는 구별된다.

6) 처음에 잡지에 기고했던 그의 글이 성공회 자료집 Groove Booklet on Ethics 시리즈로 편입되면서 존 스토트의 대답과 함께 묶여 1977년 소책자로 출간되었다. 우리말 초판은 이 소책자를 번역한 것이고, 1987년에 휘튼66부터 휘튼83까지 복음주의의 사회적 관심을 다룬 르네 빠디야의 글과 휘튼83 선언문이 함께 묶여 단행본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7) 이 책은 『기아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보이스사, 1981)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지만 우리 독자에게 확산되는 계기는 한국 IVP판의 출간이라고 볼 수 있다.

8) 이 책은 1970년대 초 ‘누진 십일조’란 주제로 IVF 잡지 HIS에서 연재했던 글을 출판사가 작은 단행본으로 다시 써 줄 것을 요청한 일이 계기가 되어 발전했다. I am not a Social Activist (Herald Press, 2008), 153.

9) 이 책에 대한 복음주의의 다양한 반응과 전개에 대해서는 크레이그 블럼버그,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IVP, 2012) 서론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특히, 하이퍼 칼뱅주의의 미국판인 신율주의자(theonomist: 국가도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편집자 주)들의 비판이 유독 심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10) 두 책의 원제는 다음과 같다. The Scandal of Evangelical Politics (Baker, 2005), The Scandal of Evangelical Conscience (Baker, 2008).

11) 이 사건은 복음의 통전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던 복음주의자들이 구체적 사안들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잠재해 있는 긴장을 단적으로 보여 준 일이었다.

12) I am not a Social Activist (Herald Press, 2008),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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