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돌봄을 이야기하면 ‘독거노인’, ‘노인의 빈곤’ 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아져서 이제 이들의 수가 900만에 육박한다(2021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853만 7천 명). 노인을 단일한 단어와 개념으로 규정짓고 이들은 다른 세대로부터 돌봄을 제공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데서 그친다면, 노인(여성은 물론 남성 노인을 포함해서)이 제공하는 돌봄은 비가시화된다. (본문 중)

신하영(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모두가 돌봄을 말하지만, 돌보지 않는 시대

 

요즘처럼 한국 사회에서 개인주의/능력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가치가 충돌하는 때가 언제 또 있었는가 싶다. 대선 정국을 지나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구조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공정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 시점에서 ‘노인의 돌봄’을 이야기하는 것은 뻔한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노인과 돌봄이라는 말이 만날 때에는 당연히 ‘노인을 위한 돌봄’(care for elders)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때로는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공정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 노인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생각보다 더 역동적인 행위의 연쇄 작용을, 그 중심에 있는 돌봄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노인의 돌봄을 통한 연결

 

첫 번째로 노인의 돌봄과 관련해서 짚어야 할 것은, ‘노인의 돌봄’(care of elders)은 흔히 생각하는 ‘노인을 위한 돌봄’ 외에도, 노인이 제공하는 ‘노인에 의한 돌봄’(care by elders)을 포함한다. 한국에서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의 절대다수가 중·고령층 이상의 무급/유급 여성 노동자임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고령 여성의 경우 중첩된 돌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양육을 돕는 보조 혹은 주 양육자로 함께하는 조부모의 경우도 보편적으로 중·고령 여성이 돌봄을 제공한다. 손자녀를 돌보지 않는 경우에도, 배우자 혹은 파트너 그리고 노부모도 이들의 돌봄이 필요하다. 이들 고령층 여성은 이렇게 ‘노노(老老) 케어’라고 불릴 정도로 돌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 완전히 사회화되지 못한 돌봄 영역의 헐거운 곳, 촘촘한 안전망이 채 완성되지 않은 그 빈틈을 연결하는 곳에 이들의 돌봄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돌봄을 이야기하면 ‘독거노인’, ‘노인의 빈곤’ 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노인 인구 비율이 높아져서 이제 이들의 수가 900만에 육박한다(2021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853만 7천 명). 노인을 단일한 단어와 개념으로 규정짓고 이들은 다른 세대로부터 돌봄을 제공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데서 그친다면, 노인(여성은 물론 남성 노인을 포함해서)이 제공하는 돌봄은 비가시화된다. 노인은 사회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쓸모 있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채 돌봄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돌봄을 제공하는 노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린이집과 태권도 학원 봉고차에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가방을 들어 주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님들의 모습을 이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동력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군가가 경력 단절의 위기에 있는 여성의 육아를 분담해 주기 때문에, 누군가가 더 늙고 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요양 보호사가 되어 돌보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사회가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노인의 비공식적 돌봄, 청장년 생산 인구와 어린 비생산 인구를 연결하는 노인 비생산 인구의 돌봄 제공을 ‘노인에 의한 돌봄’으로 가치를 인정하고, 그 사이에서 소외되고 곤란에 처한 이들에게 어떤 보호와 보장을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할 때다.

 

 

돌봄을 받는 노인은 존엄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신체적 한계 등의 이유로 돌봄이 필요하다. 그런데 과연 노인만 그럴까. 왜 노인이 되기 전에는 돌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온전히 자력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노인의 의존성이 별스럽게 다루어질까. 커테이(Eva Kittay)는 인간이 경험하는 불가피한 의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파생된 의존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근대적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독립된 자아’라는 것은 사실 환상에 가까운 가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인간의 실존은 상호의존성을 가진 연고적 자아(encumbered self) 혹은 관계적 자아(relational self)를 통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1)

 

돌봄을 제공받는 노인이 ‘온전한 시민’으로 존엄하다는 것은 자명하나, 여러 제도와 통념들은 마치 이를 의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많은 언론의 보도는 노인 부양을 젊은 생산 인구가 ‘떠안아야 할’ 부담, 미래 세대에게 주어지는 짐으로 묘사한다. 한편, 한국 사회의 복지 체계, 특히 특정한 수요를 가진 이들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는 필연적으로 어떤 ‘포기 혹은 체념’을 요구한다. 노인들이 장기요양보험제도, 시설보호서비스 등 국가의 보호와 보장을 제공받으려면 ‘부양자 없음’, ‘경제적 능력 없음’을 지속적으로 증명해 내야 하고, 자신의 ‘없음’ 혹은 ‘불(가)능’을 문서로, 구두로 밝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돌봄을 받는 노인은 스스로를 존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면 ‘비장애인/유급 노동을 제공하는 성인’만큼 존엄하다고 스스로를 감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능론적 돌봄 체계는 노인의 경제적 필요, 건강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촘촘한 의료 체계와 적정한 생활 보장으로 노인의 생존 조건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은, 노인이 자기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유의미한 삶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노인에게 제공되는 노인을 위한 돌봄(care for elders)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존엄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 어쩌면 돌봄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선언적인 수사로 노인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돌봄의 실천 과정, 돌봄을 위한 제도와 기술을 만들고 제공하는 과정에서 노인을 존엄하게 여기고, 스스로 존엄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연결됨으로써 존엄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것처럼, 노인뿐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존재 양식은 그 자체로 돌봄의 주고받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하기’를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 민폐를 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2) 다른 이의 필요를 알고 채워줄 뿐 아니라, 나의 결핍도 어려움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도움과 돌봄을 활발히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성취와 이익, 나의 눈동자가 저절로 향하는 곳만 말고, 다른 이의 눈이 향하는 곳, 지금 이 시대의 노인 그리고 ‘고아와 과부 됨’이 눈에 들어와야 한다.3)

 


1) 정지은, “민간부문 사회복지사가 경험하는 돌봄 서비스 제공에 대한 질적연구”, <여성연구>, 2021, 109(2), 167-207.

2) 박은영, “누구나 돌봄이 가능하다고 우기는 법”, <일다> 2022. 8. 4.

3)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서 1:27).

 

* 이 글은 <기윤실 좋은사회 포럼>(2022. 8. 10.)에서 발표한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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