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첫 번째로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은 이렇게 해서 섬을 찾아 나선 존의 순례길을 따라간다. 이 섬은 특정한 갈망을 가리킨다. 이 갈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강렬하고 채워지지 않는데도 추구하게 된다. 둘째는 고유의 미스터리다. 이것은 세상에서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갈망이다.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이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존은 지주에게 땅뙈기를 받아 부쳐 먹는 소작인들이 사는 땅 퓨리타이나의 주민이다. 그는 지주가 집사들을 통해 전해준 규칙을 지키려 애쓰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서쪽의 ‘섬’을 보게 된다. 보다 자세히 말하면, 먼저 음악 소리를 들었고, 낭랑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오너라.’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섬을 보았다.

 

한동안 존은 그 소리와 풍경이 주는 달콤함, 갈망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섬 풍경과 그에 따라오는 갈망은 그 자체를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섬을 찾아 나서라는 초청임을 깨닫게 된다. 존은 그 초청에 응하여 섬을 찾아 떠난다.

 

C.S.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첫 번째로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은 이렇게 해서 섬을 찾아 나선 존의 순례길을 따라간다. 이 섬은 특정한 갈망을 가리킨다. 이 갈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강렬하고 채워지지 않는데도 추구하게 된다. 둘째는 고유의 미스터리다. 이것은 세상에서 대상을 찾을 수 없는 갈망이다.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이 갈망을 채워주지 못한다.

 

영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에 따르면, 바로 이 갈망의 “참된 기원, 목적, 목표를 추구하는 탐색으로 보면”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는 “이 갈망을 이해하기 위한 잘못된 시도들 및 이 갈망의 진정한 대상에 대한 오해로 점철된” 인간의 경험, 즉 “가면 안 되는 길들”이 잔뜩 등장한다.

 

루이스는 나중에 이 갈망에다 ‘기쁨’(joy)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루이스가 후년에 가서 쓴 영적 자서전의 제목은 그래서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이었다. 존이 섬을 보고 섬을 찾아 순례에 나선 것처럼, 루이스는 ‘기쁨’을 추구하다가 철학적 탐구를 거쳐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 『순례자의 귀향』의 이해를 돕는 최고의 안내서가 『예기치 못한 기쁨』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순례자의 귀향』에서는 주인공 존이 섬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그 갈망(‘기쁨’)을 좇아가는 인간의 여정을 표현한다. 섬에 대한 갈망을 동력으로 떠나는 순례에서 존을 이끌어준 안내자가 이성(理性, Reason)이고, 그와 동행하는 캐릭터가 미덕(Vertue)이다.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순례자의 귀향』의 큰 흐름을 잡아보자.

 

섬(갈망)에 대한 잘못된 두 반응

 

루이스는 여러 다른 글에서도 이 갈망을 다룬다. “영광의 무게”가 그 주제를 다룬 에세이라면,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말하는 생쥐 리피치프는 평생 이 갈망에 이끌려 사는 캐릭터다. 하지만 루이스의 가장 친절한 설명은 『순전한 기독교』에서 소망을 다룬 다음 대목이지 싶다.

 

처음 이국(異國)을 그려 볼 때, 또는 처음 흥미로운 과목을 배울 때, 속에서 솟구치는 갈망은 결혼이나 여행이나 배움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망입니다. 흔히 말하듯 그 결혼이나 휴가 여행이나 배움이 성공적이지 못할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결혼이나 여행이나 배움이 최고의 것일 때도 그렇습니다. 그 갈망을 처음 느낀 순간에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현실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 아내가 훌륭할 수도 있고, 여행 가서 묵은 호텔이 아름답고 경치가 빼어날 수도 있으며, 화학 연구가 흥미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들 어떤 욕구에, 어떤 목표나 흥미에 이끌려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만족을 얻는가? 웬만큼 살아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두 가지의 잘못된 대처 방식을 소개한다. 첫째, 어리석은 사람의 대처 방식이다. 다른 여자, 더 호화로운 여행 등을 하면 모두가 추구하는 신비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다 권태와 불만에 빠지고 말지만, 다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며 늘 이번에야말로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매번 실망한다. 이 여자 저 여자, 이 나라 저 나라, 이 취미 저 취미로 옮겨 다니느라 일생을 탕진한다.

 

둘째, 환멸에 빠진 지각 있는 사람의 방식이다. 그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결론을 일찌감치 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법이지. 하지만 내 나이쯤 되면 무지개 끝을 좇는 일 따윈 그만두게 된다네.”

 

존의 순례 여정은 섬을 찾아가던 그의 앞길을 막은 협곡(‘아담의 죄’)을 기준으로, 협곡을 건너기 전의 여정과 건넌 후의 귀향길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협곡을 건너기 전까지 존이 만나는 이들은 길은 북쪽과 남쪽으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북쪽은 감정, 직관, 상상력을 의심스러워하는 사고방식들이다. “이성적”이고 “엄격한 체계”의 영역이다. 남쪽은 감정의 도취 상태를 선사하는 이들을 환영한다. 북쪽이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느낌을 의심”하는 이들이라면, 남쪽은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느낌을 정당화”하는 이들이다.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섬을 대하는 자세는 위에서 말한 ‘갈망’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대처방식에 각각 대응한다.

 

섬과 지주, 협곡

 

섬을 찾아 순례에 나선 존은 여러 경험 끝에 마침내 지주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주를 찾게 된 그에게는 고민이 찾아왔다. 섬에 대한 갈망에 이끌려 거기까지 왔는데, 이제 섬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주가 돌아오면서 섬이 들어설 자리가 싹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그런 곳이 있다 해도 그는 더 이상 영혼을 다 바쳐 그것을 찾을 자유가 없고, 지주가 마련해둔 계획을 따라가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갈망이 세상의 가장 깊은 본질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존은 이 난감한 상황을 해설해 주는 이를 만난다. 절벽의 동굴에 사는 ‘역사’라는 은둔자다. 그를 통해 존은 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지주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목자들(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규칙(율법)을, 이교도들에게는 그림(신화)을 보냈다는 것이다. 섬은 지주가 보낸 그림 중 하나이기에 환각이 아니다. 그림의 공통점은 “모종의 메시지”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 메시지가 이 욕망을 일깨워 사람들이 세상의 동쪽이나 서쪽의 무엇인가를 갈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주를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존 앞에는 큰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자기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거대한 협곡(‘아담의 죄’)이다. 순례의 앞부분에서 협곡을 건네주겠다는 마더 커크의 제의를 거절하고 다른 길을 부지런히 찾았던 존은 결국 마더 커크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협곡을 건넌 존과 미덕은 안내자의 인도를 받는다. 안내자는 존에게 서쪽의 섬이 곧 지주의 성(동쪽 산의 정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섬이 곧 산의 반대쪽이기에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리하여 ‘순례자의 귀향’이 시작된다. 협곡을 건넌다고 다른 곳에 가게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별세계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걷던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이전의 길을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된다. 그리고 안내자의 말대로 “돌아가는 길에는 땅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성(理性)

 

존이 섬을 찾아 떠난 순례에서 갈망의 “거짓 대상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거짓임이 드러나면 단호히 내버리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성’이다. 존의 여정을 이끄는 동력이 섬에 대한 갈망이라면, 그 여정을 돕는 인도자는 이성인 셈이다. 사실, 존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을 내리는 데는 이성이 다 필요하겠지만, 『순례자의 귀향』에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기사 모습의 캐릭터 이성이 ‘따로 등장’하는 세 대목이 있다.

 

첫째, 이성은 시대정신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존을 구해준다. 이성이 시대정신을 퇴치하고 그자의 거짓을 폭로할 때 쓰는 통찰은 이후 루이스의 글에서 자주 활용되는 것들이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정신을 벗어날 길이 올바른 이성의 사용에 있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둘째, 존은 자신이 협곡을 건너게 될(즉, 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더럭 겁이 난다. 지주의 수중에 떨어진다는 두려움에 몸부림을 치다가 잠에서 깨어난다. 절벽에 있는 동굴에서 나와 되돌아갈 생각을 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 두 손과 무릎이 까지도록 기더라도 … 어떤 고생도 감수”해서 돌아가려 했다. “계속 가다가는 다음번 모퉁이를 돌자마자 적의 권력 심장부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불쑥 나타난 이성이 칼을 빼 들고 묻는다. “싸우고 싶어요?” 존은 이성의 칼끝을 피해 서둘러 동굴 속으로 돌아간다. 존은 합당한 논증을 따라 협곡을 건너기 직전의 자리까지 이르렀고, 그곳이 그에게는 “논증이 이끄는 곳”이었던 사실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셋째, 협곡을 건넌 “그들이 걷는 내내 이성이 줄곧 옆에서 말을 몰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고,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거나 홀연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성이 신앙의 동반자라는 루이스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비이성적, 또는 반이성적인 일이 아닌 것처럼, 협곡을 건넌 신자로서의 삶도 이성과 동떨어진 삶, 뜬금없이 논리를 끌어대다가 불리하면 갑작스럽게 추론을 중단하는 행태를 보이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미덕의 고민

 

미덕(Vertue)은 인간의 “도덕적 의무감”을 구현한 캐릭터다. 그는 “규칙은 당장 기분이 내켜서가 아니라 규칙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목적지를 모르면서 하루 몇 km 이상 간다는 ‘스스로의’ 규칙을 따르는 캐릭터다. 초반에 존은 미덕을 버리고 미적 경험을 따라간다.

 

존은 시대정신의 감옥에서 벗어난 후에 미덕과 재회하지만, 둘은 곧 거대한 절벽 앞에 선다. 루이스는 이 대목을 “존은 착하게 살기로 마음먹지만 금세 어려움을 만난다”고 해설한다. 협곡 근처에서 두 사람은 마더 커크를 만난다. 그러나 협곡을 건네주겠다며 “내 말대로 해야 한다”는 마더 커크의 말이 거슬린 미덕은 이렇게 선언한다. “난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위치를 원하지 않거든요. 난 내 영혼의 선장, 내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해요.”

 

이후 미덕은 줄곧 존과 동행한다. 그런데 미덕은 북쪽 ‘창백한 이들’의 오두막에서 지내다가 협곡을 건널 길이 있는지 확인하러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가 ‘야만인’을 만난다. 그런데 야만인을 만나고 온 그는 크게 흔들린다. 야만인의 모습이 왜 그렇게 혼란을 안겨준 것일까?

 

어떤 뇌물과 위협에도 흔들림 없이 오롯이 자기 의지와 규칙에 따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미덕이 추구하는 순례의 자세였다. 그래서 야만인을 만났을 때 의지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그 철저함에 매료되어 야만인 곁에 남을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기 의지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야만인의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인간성을 포기한 상태에 가까웠다. 규칙을 지키고 의지로 밀어붙여서 이를 수 있는 극한점을 보고 온 그는 전진할 힘을 잃어버린다. 눈앞이 캄캄해진 탓이다.

 

미덕은 어떻게 딜레마에서 벗어났나?

 

선택에 근거한 임의적 규칙의 한계를 자각하고 막막해진 미덕은 꼼짝도 못 하게 된다. 한동안 그는 존이 주는 것을 먹고, 존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 그러다 지혜의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규칙은 인간이 “발견했을 뿐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배운다. 기존 규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규칙들”도 옛날 규칙들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지혜의 설명을 듣고 미덕은 규칙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규칙의 자리가 확고해지고 객관적이 되면서 규칙을 지키는 문제가 크게 다가온다. 그의 내면에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규칙을 지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도 알게 된다. 규칙을 제멋대로 정해서 의지로 밀어붙이고 살아갈 때는 몰랐던 사실이다.

 

미덕은 지혜의 가르침을 자기식으로 받아들여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자신의 몸, 아니 자신의 존재야말로 규칙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미덕은 자기 몸을 더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모든 즐거움을 다 잘라내”겠다고 길을 나선다. 존이 함께 하겠다고 따라나서자 돌까지 집어던지며 거부한다.

 

멀찍이서 미덕의 뒤를 따라가던 존은 절벽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이런 위기 가운데 그는 지주의 도움을 받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와 존이 나누는 대화에서 미덕이 협곡을 건너는 선택을 내린 상황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존이 하는 말은 사실 존 안에 있는 미덕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존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결국 제 위에 지주가 있다”는 말씀이냐고 묻는다. 그리스도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왜 놀라느냐고 되묻는다.

 

“규칙을 지킬 마음이 없었느냐? 지킬 마음이 있었다면, 그 규칙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느냐?”

존이 말했다. “제가 규칙을 온전히 지킬 마음은, 그러니까 다 지키거나 늘 지킬 마음은 없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킬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와 같다고 할까요.”

 

그리스도는 존의 이 두 비유를 듣고 웃으며 말한다. “나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구나.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시를 빼는 일이지.”

 

존과 미덕은 함께 해야 한다

 

존은 갈망을 따라가 그 근원이자 갈망을 채워줄 분을 만났다. 미덕은 규칙을 지키려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규칙의 기원이자 규칙을 지킬 수 있게 할 분에게 굴복해야 했다. 존은 원하는 바를, 미덕은 해야 하는 바를 따른다. 둘 다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존에게 떠나간 미덕을 따라잡으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둘 다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존과 미덕은 서로 잘해보자고 다짐한다고 잘 지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을 화해시킬 한 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마더 커크에게 가야 그분에게 이를 수 있다. 이교도와 목자(구약 이스라엘)를 화해시킨 그분 말이다. 그분이 한 사람 안에서도, 갈망과 의무감의 화해를 이루어내실 수 있다.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협곡을 건너야 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죽어야 했다. 둘은 함께 협곡 바닥의 연못 속으로 뛰어든다.

 

협곡을 건넌 후에도 둘의 동행은 끝나지 않는다. 유혹과 싸움도 마찬가지다. “자급자족, 떳떳함, 남에게 기대지 않는 자세”는 여전히 미덕에게 유혹 거리가 된다. “섬에 데려다주지도 갈증을 오래 잠재워 주지도” 않지만 목마르니까 색욕의 잔을 마시라는 마녀의 유혹은 존에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진정한 갈망의 대상을 알았어도,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하는 거짓 우상들의 유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용과 싸워서 그 힘을 빼앗아야 했다. 존은 북쪽의 차가운 용과 싸워서 강해져야 했고, 미덕은 남쪽의 뜨거운 용과 싸워 열기를 훔치고 유연해져야 했다. 두 사람이 용과 싸우는 대목을 그들이 싸워야 했던 유혹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오히려 위로가 된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그 과정에서 강해지고 유연해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는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어떤 유혹들이 유혹 거리도 아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사실인가, 당위인가

 

앞에서 이성이 협곡을 건넌 이들과 죽 나란히 가는 대목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그 대목은 사실을 서술한 것일까, 당위를 기술한 것일까? 이성과 아예 담을 쌓은 비논리와 억지의 화신 같은 신자들이 있지 않은가? 미덕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미덕이 신앙 안에서 규칙(도덕)의 근거와 규칙을 지킬 힘을 얻게 된다는 부분은 어떨까? 부도덕한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 정도까지 아니라도, 자신이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일관성 있고 떳떳하다고 내세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에 대해 두 가지 답변이 떠오른다.

 

첫째, 협곡을 건넌 사람은 지주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이다. 그것은 순종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죽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협곡을 건넌 존과 미덕에게 안내자가 이런 충고를 해준 것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은 너무 질겨서 한입에 다 먹을 수가 없어요. 앞으로 생각보다 그 개울을 자주 만나게 될 거예요. 그때마다 그 개울을 영원히 건넜다고 생각할 거고요. 하지만 언젠가는 진짜 그런 날이 올 겁니다.”

 

둘째, 협곡을 건넌 후에도 존과 미덕을 괴롭히는 유혹이 있고, 그들은 용과 싸워야 했다. 역사가 한 말을 떠올려 보자. “발이 올바른 곳에 자리를 잡으면 손과 머리도 조만간 올바른 자리로 오게 되지. 그 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네.” ‘조만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 신자의 믿음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현실과 당위의 이분법이 아니라 “약속”과 “성취”, 그리고 그 사이의 싸움과 인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갈망, 도덕, 이성의 삼겹줄

 

은둔자 역사는 섬에 대한 갈망이 존을 지주에게 이끌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그분에게서 나온 것만이 그분에게로 돌아갈 수 있네.” 이것은 갈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갈망이 그 근원이자 갈망을 채워줄 분인 지주께로 존을 이끌었듯, 규칙(도덕)도 그 근원이자 규칙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 분에게로 미덕을 이끌었으며, 이성은 이 나라(세상)와 도로(논리 규칙)를 만드신 “이성적인 어떤 존재”에게로 존과 미덕을 이끌었다. 『순례자의 귀향』은 갈망, 도덕, 이성의 삼겹줄로 인간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지주의 역사(役事)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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