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한 사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가? 여기서는 어떤 포괄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 철학의 본령에 해당하는 작업, 곧 물음을 던지는 작업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신자는 동일자, 동일한 진리에 익숙하다. (본문 중)
김동규(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타자(das Andere, Autre, Other). 프랑스어권에서 20세기 초반부터 꽤 오랫동안 널리 읽혔던 철학 개념어 사전을 쓴 앙드레 랄랑드는 타자 개념의 설명에서 “사유의 근본 개념 중 하나”이지만 “정의하기에는 불가능한, 동일자(Même)에 대립하는 것”이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Laland 1926; 2006, 104). 이는 해당 개념을 정의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 서양철학이 대체로 동일자 중심의 사유를 해왔음을 가르쳐 준다. 타자라는 개념이 동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라면, 우선 서양에서 어떤 것이 동일자의 역할을 담당했는지 우선 알아보아야 한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존재와 실체다. 존재와 실체에 대해서도 여러 정의가 가능하지만, 적어도 고대와 중세, 근대의 철학에서 존재와 실체는 감각 가능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시간상에서 변함없이 지속하는 지속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타자는 존재가 아니며, 그런 존재의 동일자에 이르지 못한 채, 동일자 바깥에 머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과연 있는가? 혹자는 서양 철학에서 타자를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를 헤겔로 본다. 헤겔은 그의 주저 『정신현상학』에서 타자를 의식에 독립해 있는 존재 또는 대상으로 설정한다. 정신의 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말처럼, 정신이 역사와 현실 속에서 완전하게 현실화되는 과정을 그리는 일종의 서사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은 소박한 단계의 감각이나 지성에서 자기의식의 단계로 이행하는데, 이 단계에서 자기의식은 자기 아닌 대상을 마주한다. 그리고 헤겔은 이 자기 아닌 대상을 자기에 대한 부정성으로서의 타자로 다룬다. 헤겔의 관점에서 이렇게 나의 의식이 아닌 것으로서의 타자가 지식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의식과의 연관 아래 놓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타자는 언제나 나의 자기의식의 경험 안에 놓이는 타자이며, 이러한 이성적 의식 바깥에 놓여 있는 타자는 적어도 헤겔에게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나의 자기의식 바깥에 놓이는 대상이며, 이것은 결국 어떤 과정−헤겔에게는 변증법적 사유−을 거쳐 나의 의식 경험 안에 놓여야만 사유 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헤겔의 타자 이론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그런 식의 사유 구도에서 타자는, 이것이 동물이건, 인간이건, 자연이건 간에, 이성적 자기의식의 사유 과정 안에서만 그 존재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므로, 타자 그 자체의 존립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장 잘 구현한 철학자 중 하나로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나’라는 동일자가 먼저 정립되어야만 자유와 행복의 삶이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자기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은 나의 이기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이 이기주의에 도전하는 게 타자라고 보았다. 레비나스가 주로 사용하는 현상학적 분석의 예를 들자면, 나는 나의 집을 짓고, 거기에 머물게 됨으로써 자신만의 경제와 삶을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집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집 바깥에 나가 노동하고, 생산하고, 소유물을 창출하여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삶을 반복한다. 하지만 타자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 집의 문을 두드릴 때는 다른 소유물과 달리 나의 지배력으로 가둘 수 없다. 타자는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며, 나에게 저항한다. 만일 내가 타자를 나의 지배력 아래 끊임없이 묶어두려고 한다면, 결국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에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타자는 그런 폭력에 그 자체로 저항하는 자다.
이 묘사가 암시하듯이, 레비나스의 타자는 인간 타자를 뜻한다. 다른 소유물은 내가 내 삶을 향유하려는 목적, 곧 먹고, 마시고, 놀고, 휴식을 취하는 일 등으로 소비될 수 있지만, 인간 타자는 그렇게 소비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이렇게 주체와 다르고, 주체로부터 분리된 타인의 절대적 타자성에 대해 섬세한 이해를 내놓았지만, 이후 오늘날의 철학에서 타자 개념은 훨씬 다양해지고 다변화된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성을 가진 정상인에 대립하는 광기를 가진 미친 사람, 인간이라는 동일자와는 전적으로 다른 동물이나 환경 세계, 한때 (혹은 지금도) 서양어권에서 인간을 지칭할 때 당연하게 쓰이던 Man, Homme, Mann−이를테면 하이데거는 일상 세계에 속한 인간을 das Mann이라고 칭한다−의 범주에 끼어들지 못하는, 인간 개념에서도 소외된, 여성을 타자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처럼 타자는 존재, 실체, 주체, 나와 같이 변함없이, 또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유지되는 동일자에 대립하거나 소외되는 어떤 것을 지칭할 때 쓰이는 서양 철학의 고유한 개념이다.
그럼 이러한 타자에 대한 사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가? 여기서는 어떤 포괄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 철학의 본령에 해당하는 작업, 곧 물음을 던지는 작업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신자는 동일자, 동일한 진리에 익숙하다. 변함없는 불변의 진리, 변하지 않는 하나님, 변하지 않는 믿음과 같은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이렇게 지속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불변하는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이런 불변하는 동일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것의 희생이 필요하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나의 신앙은 불변한다. 그런데 이때 진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무오 또는 무류의 성서 등을 말하는가?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당연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보통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 매우 많은 것을 포괄한다. 어떤 그리스도교 교파는 교회의 목사와 같은 지도자로 남성 사역자만을 그 범주에 넣으며,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부적격한 장애를 입은 이들은 그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교 교파에 속한 이들은 이러한 진리의 내용까지 암묵적으로나 명목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이러한 진리 체제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어떤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소외의 대상은 어떤 경우에 여성, 또 어떤 경우에 장애인으로 나타날 수 있다.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이긴 하나, 특정한 진리의 내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진리 체계에 속하지 못하는 타자가 생겨날 수 있음을 그리스도인은 얼마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더 나아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을 최고의 계명으로 삼는다. 그런데 여기서 이웃은 무엇을, 또 누구를 말하는가? 이를테면 교회와 진리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특정한 존재를 교회의 타자나 진리의 타자로 둘 수 있다. 성소수자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웃인가? 이웃이라면 어떤 이웃인가? 만일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는 인간 존재라면 성소수자는 다른 존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그리스도교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에 상반되는 존재로 설정할 경우, 이 존재는 그리스도교라는 불변의 진리를 그 내용으로 삼는 동일자의 타자가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소수자를 완전성이나 특정한 동일성의 내용을 공유하지 못하는 결핍의 존재로 보는 게 되지 않는가?
신자에게 그리스도인이 아닌 존재는, 신자와 같지 않은, 신앙을 부정하는 자로서의 타자일까? 만일 그렇다면 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는 어떠한가?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교라는 동일자의 기준을 설정한다면 타자의 지위를 가진다. 물론 이런 구별이 그 자체로 나쁘거나 악한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교라는 범주를 설정한 경우 자연스럽게 대두될 수밖에 없는 구별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다른 자로서 동일자에 대립하는, 혹은 동일자가 아닌 자로서의 타자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자들과 타종교의 신자라면, 이 존재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신앙을 결핍한 어떤 존재로 보는 게 아닐까? 이렇게 다른 이를 무언가를 결핍한, 더 구체적으로는 진리를 결핍한 자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동일자의 시선에서 타자를 보는, 어떻게 보면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자가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자를 바라보는, 일종의 비대칭성을 견지하는 게 아닐까? 이런 시선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시 이러한 시선 자체가 윤리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왜곡되고 그릇된 견해인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타자를 포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타자를 배제하는 시선을 함양하는 게 아닐까?
바로 이런 난점들이 타자와 타자성에 대한 현대적 논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의문이고 물음이다. 아마도 이 물음을 두고 진지하게 성찰하고, 씨름하는 게 그리스도인들의 사유의 과제일 것이다.
참고 도서
André Laland, Vocabulaire technique et critique de la philosoph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2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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