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랜 기간 우울에 대한 기독교 내부의 반응은 합리적이거나 긍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기도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해서, 사탄의 영향으로, 등등 여러 편견에 빠진 이름을 붙여서 우울증을 겪는 성도들을 더욱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022년이 된 지금, 교회는 우울증을 어떻게 바라볼까? 상담과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우울증을 마치 ‘마음의 감기’처럼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은 경험하는, 보편적으로 만연한 현상으로 보는 인식도 생겨났다. (본문 중)
곽은진1)
그때는 하나님이 안 보였다. 하나님께 돌아올 힘이 있을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믿음이나 신앙을 강요했다면 나는 하나님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자포자기했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고 약을 먹으면서 조금씩 나아지니 하나님이 보였다. 이게 믿음의 문제인지 성향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바라봐 주고 기다려 주니 오히려 다시 돌아올 힘도 생겼다. 그때는 이 상황에 대해 나 스스로 더 정죄하고 판단했기에, 서 있을 힘조차 없는 내게 와서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고 뭔가를 강요했다면 나는 못 일어났을 것 같다. 누군가 나와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바라봐 주고, 기다려 주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지켜봐 주면 좋겠다.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 것, 자책, 비난, 이런 것들만으로도 신앙인으로서 이미 힘들다.
최근에 의사와 합의하여 우울증 치료약을 중단한 40대 초반의 남성과 잠시 대화를 했다. 그는 애착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오랜 기간 불안과 우울을 경험했다. 어느 날 증상이 심해지면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감사하게도, 이제는 치료를 잘 마치고 약 없이 일상에 적응 중이었다. 나는 이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변에서 어떻게 해주면 좋을지, 혹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고, 이분은 주저함 없이 기도와 함께 조용히 지켜봐 달라고 답변했다.
인간이 경험하는 내면의 모든 감정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인간을 유익하도록 돕거나 보호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매순간 느끼는 감정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을 거라는 진화론적 감정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감정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알려주는 내면의 중요한 신호임은 분명하다. 분노로 화를 내든지, 불안으로 긴장하고 우유부단하든지, 우울로 슬프고 무기력하든지,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나의 상태를 알려주고 이에 대한 대처나 행동을 촉발하도록 이끈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감정 중 하나가 우울일 것이다. 코로나 블루라는 명칭이 생길 만큼, 우울을 별로 경험한 적이 없던 사람들조차 우울감을 호소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는, 일상이 자유롭지 못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즐거움을 상실하고 불안과 고립을 경험했다. 즐거움의 상실, 불안과 염려, 근심, 답답함, 자유의 제한이나 관계의 단절이 주는 에너지 상실 등은 우울감을 일으킬 수 있는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우울감이나 어떤 불편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울감과 우울증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명화 이후 대표적인 정서 장애 혹은 감정으로 알려진 우울은, 인간에게는 적과의 동침처럼 원하지 않지만 자주 함께 하는 부정적 감정이 되었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은 주로 우울감이다. 우울감은 슬픔을 동반한 근심, 걱정 등이 답답함과 함께 경험되는 활력이 없는 일시적 상태이며,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을 갖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반면, 우울증은 우울감이 지속되어 불면이나 과다 수면, 체중의 변화, 긴장과 불안, 집중력 저하, 현저한 즐거움의 저하, 피로감이나 활력 상실, 무가치감이나 부적절한 죄책감, 더 나아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생각들이 거의 매일 2주 이상 진행되어 나타나는 병리적 증상을 동반하는 상태이다. 일시적 우울감은 때로 우리를 보호하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신호로서 작동하지만, 우울증이 되면 이 신호가 왜곡되어 더 이상 긍정적 기능으로 작동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을 더 어렵게 만드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 주요 우울 증상이 2년 이상 만성화되면 지속성 우울장애로 이어져 삶이 더 힘들게 된다.
우울증에 대한 이러한 정보나 글은 이 글이 아니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다. 그만큼 우울증은 우리 주위에 흔한데, 그리스도인들 역시 우울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오랜 기간 우울에 대한 기독교 내부의 반응은 합리적이거나 긍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기도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해서, 사탄의 영향으로, 등등 여러 편견에 빠진 이름을 붙여서 우울증을 겪는 성도들을 더욱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2022년이 된 지금, 교회는 우울증을 어떻게 바라볼까? 상담과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우울증을 마치 ‘마음의 감기’처럼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은 경험하는, 보편적으로 만연한 현상으로 보는 인식도 생겨났다. 더 이상 사탄의 역사라고 단순히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도하세요’라던 말에서 ‘병원 가세요’ ‘약 드세요’라는 말로 바뀌며,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반대쪽 끝자락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나는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거나 이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은, 뇌의 신경 전달 물질이나 유전과 관련된 생물학적인 문제, 정서나 성격 등과 관련된 심리적인 문제, 트라우마 같은 충격적 사건이나 사고 등의 사회적인 문제,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문제 등으로 다양하다. 어떤 사건 때문에 우울을 경험할 수도 있고, 우울로 인해 어떤 사건이나 고통을 경험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가장 좋은 길은, 다른 모든 질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울증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자신을 돌보는 예방이다. 그럼에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면, 약물 치료와 함께 다음을 한번 점검해 보기를 권한다.
먼저, 우울을 통해 내가 얻는 유익을 찾아보자. 심리학에서 이것을 도구적 정서라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통해 이득이나 유익을 얻고자, 혹은 타인을 통제하고자, 도구로 사용하는 감정을 말한다. 흔히 부부 싸움에서 아내들이 우울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우울해 하거나 아픈 것으로 상황에 대처하면서 상황 회피 방법으로 우울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집안에 유전적 소인이 있는지 찾아보자. 가족력은 중요하다. 우울로 인한 유전적 성향은 가족력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모에게서 자녀로 이어지는 우울은 불행감을 전해 주는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유전적 소인이 있다면 미리 예방하고 삶을 건강하게 살기 위해 대비를 해야 한다. 우울증도 다른 질병과 동일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혈압 가족력이 있는 사람이 고혈압에 걸리지 않기 위해 미리 주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째, 유전이나 도구적 사용이 아니라면, 심리적 접근을 할 준비를 하자. 치료자와 함께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했는지, 이유 없이 오래전부터 경험한 것인지, 일시적으로 갑자기 경험하는 것인지 등을 이야기해 보자. 넷째, 우울은 나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자신을 돌보는 계기로 삼아 보자. 다섯째, 상담은 단순히 증상 해결보다는 내적인 원인을 살피는 데 초점을 두고 자신과 만나는 시간으로 이해해 보자.
우울은 나를 돕고자 나에게 보내오는 신호 중 하나이다. 나의 상처를 감싸고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은 일을 벌이지 말고 소극적으로 행동하여 고통을 크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내면의 메시지인 것이다. 우울함을 느낄 때,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말고 내면에 귀를 기울여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돌봐주면 좋겠어. 관심과 위로도 필요해. 내가 지금 많이 지쳐서 힘들어….”
“그렇구나. 지금 너에게 뭐가 필요할까? 무엇을 해주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까? 내가 뭐든 할 수 있는 것을 해 줄게.”
주님은 나와 또 다른 이들의 힘든 마음을 공감과 위로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런 눈으로 우울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정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려는 공감적 태도가 필요하다. 특히, 편안한 기질이나 안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을 겪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마음의 감기는, 때로는 혼자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을 수도 있으므로 은혜가 필요하다. 때로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그들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족할 수 있다.
1)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상담학 교수, 기윤실청년상담센터WITH 공동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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