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기나긴 논리적 정당화의 역사를 자랑한다. 개인의 폭력 중 정당방위는 정당화 논리의 대표적 사례다. 집단적 폭력도 사회 변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폭력은 빠르게 정당화된다. 구체제를 파괴하고 그것보다 나아 보이는 현 체제를 세우는 데 기여한 폭력인 경우, 그 폭력이 ‘선’(good)으로 추앙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확실히 짧다. (본문 중)
이인미(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원)
폭력은 논리적 정당화를 추구한다
폭력은 짐승 같은 것이거나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거듭 강조했듯, 공격 혹은 파괴를 부르는 폭력은 동물적이기는커녕 매우 인간적인 것이며(프롬, 1989, 285), 그렇기에 논리적 정당화를 추구한다. 핑계 없이, 핑계 대지 않고 나타나는 폭력은 몹시 드물다.
폭력은 기나긴 논리적 정당화의 역사를 자랑한다. 개인의 폭력 중 정당방위는 정당화 논리의 대표적 사례다. 집단적 폭력도 사회 변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폭력은 빠르게 정당화된다. 구체제를 파괴하고 그것보다 나아 보이는 현 체제를 세우는 데 기여한 폭력인 경우, 그 폭력이 ‘선’(good)으로 추앙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확실히 짧다. 1969년 6월 <뉴욕타임스>에 힘(force)과 폭력(violence)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을 때라면 사회적 통제력과 설득력의 성공적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게재됐다(Arendt, 1970, 19). 폭력이 대중적 지지를 힘입어 정당화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있다. 1980년대 민주화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학생 운동이 간혹 돌, 화염병을 사용하는 폭력 시위를 벌였는데, 당대 시민들이 돌과 화염병보다는 경찰의 최루탄 사용을 더 비난했다(홍석률, 2007, 81). 그러고 보니 사람의 목을 베어 창끝에 꿰고 길거리를 행진한 18세기 말 프랑스인들도 ‘구체제를 강력하게 거부하는 의미였다’는 식으로 정당화 논리를 얻은 바 있다.
폭력은 종종 찬미받았다
폭력은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정당화를 넘어 종종 찬미받곤 했지만, 여성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폭력론』에서 지적했듯, 뜻밖에도 마르크스(Karl Marx)는 폭력을 찬미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총구에서 권력이 자란다’고 말했지만, 그건 마오의 의견이지 마르크스의 의견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폭력의 역할을 경계하고, 그것이 잘해봤자 부차적 역할을 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폭력이 구체제의 종말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구체제에 붙어있는 모순 자체가 구체제의 종말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오히려 다른 이들, 소렐(Georges Sorel),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파농(Frantz Fanon),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등이 역사 발전 단계에서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정당화했으며 나아가 찬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생을 촉진하는 힘으로 폭력을 예시했으며, 베르그송(Henri Bergson) 또한 폭력적 변혁을 인생의 창조성으로, 나아가 최고의 선으로 이야기했다. 아렌트의 작은 책 『폭력론』을 보면 ‘폭력의 논리적 정당화’ 부분에서, 마르크스보다 착하다(?)고 이름을 드높인 지식인들의 긴 명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폭력론』은 폭력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다’라는 흔한 오해를 거론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비폭력이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의 반의어가 될 수 없음을, 바브라 데밍(Barbara Deming)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비폭력적 방해는 힘(force)을 개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심지어 오직 물리적인(신체적인) 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의존한다. (Arendt, 1970, 71)
비폭력 인권 운동을 주장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1964년, 본인의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 속에서 비폭력을 무기(weapon)로 지칭했다. 비폭력은 전쟁 무기 못지않게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비폭력을 폭력에 비교하면 (아렌트에 따르면) 굳이 반대되기보다는 다만 조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비폭력을 포함해 여러 종류의 힘을 인간관계 현실에서 경험하곤 하는데, 아렌트는 그것들을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아렌트의 폭력론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기로 하자.
강성, 힘, 권위, 권력은 폭력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다
다섯 가지 힘 개념의 한국어 번역은, 국내 아렌트 연구가 김선욱을 따르면 순서대로 이렇게 된다. 강성(strength), 힘(force), 권위(authority), 폭력(violence), 그리고 권력(power)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다섯 용어들에 대해 굳이 구별이 필요한 이유는 당트레브(d’Entrves)가 말했듯 논리적 문법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을 위해서다(Arendt, 1970, 43).
먼저 힘과 권위는 인간관계 안에서 복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힘은 압박으로 복종을 일으키는 반면 권위는 압박 없이 복종을 일으킨다. 일례로 교회와 대학은 힘이 아니라 권위로 복종을 유도한다. 사람들은 교회와 대학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다가 때때로 그 권위에 저항하는데, 그때 저항 방법으로 채택되는 것은 웃음이다.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 권위는 흔들린다. 한편 복종을 강제하거나 반대로 굳센 저항을 야기하기도 하는, 힘은 일상에서 폭력처럼 인식되곤 한다. 압박이라는 요인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할 자유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폭력이다.
강성과 권력도 서로 비슷하되 다르며, 둘 다 폭력과 크게 대비된다. 아렌트는 우선, 강성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권력은 집단(공동체)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분간한다. 강성은 이를테면 개인적 실체가 소유한 자산(property) 같은 것이다. 허구의 인물들이지만 예컨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은 강성을 갖춘 이들로서 폭력적 상황을 중단하기 위해 자신들의 강성과 무력을 사용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개인적 힘(강성)을 발휘하거나 과시해 그걸 해결하고자 한다. 끝으로, 권력과 폭력을 대비해보면, 권력이 약할 때 폭력이 기승을 부린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런 예를 우리는 익히 경험한 바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권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폭력 사용 빈도와 강도를 올렸다. 유신 시대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10년이 지난 뒤 시작되었다.
폭력의 매력은 전체주의의 매력과 비슷하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기에 폭력으로 점철됐던 공포 정치는, 혁명을 이끌었던 지성인이자 박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들이었던 이들의 작품(?)이었다. 법률가 겸 작가였던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는 폭력을 쓰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또, 완벽한 권력이 자리 잡는 것을 보고 싶어 했던 극작가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전체주의적 폭력에서 매력을 느꼈다(베르네르, 2012, 41). 브레히트뿐 아니다. 20세기 중후반 많은 지식인들은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는 스탈린 체제의 잔혹한 폭력에 대해 우호적이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배울 만큼 배운 사상가, 예술가, 지식인들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자기들의 이상(ideal)과 정의(justice)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구성한 이상과 정의가 100%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인간은 완벽한 걸 내놓을 수 있다)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이론가 아렌트는 나치 체제나 스탈린 체제 같은 전체주의의 진짜 위험성이, 이른바 우파나 좌파를 막론하고 인간이 절대적 정의를 제시할 수 있으며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인간 전능에 대한 진지한 믿음에 있다고 보았다(Arendt, 1968, 387). 지배자가 그 진지한 믿음을 가지면, 완벽하고 전능한 지도자로 자신을 입증하겠다는 결심으로 폭력을 사용하게 되고, 피지배자가 그 진지한 믿음을 가지면 연령ㆍ인종ㆍ성별ㆍ학력을 불문하고 자신이 완벽하고 전능한 지도자를 목격하고 있다는 착각에 취해 폭력을 허용(묵인)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이상과 정의가 절대화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어김없이 폭력이 일어났다. 다만 폭력이 일어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전체주의적으로 정당화되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자들의 진지한 믿음은 소위 좌와 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만약 지금 우리 사회가 언제고 폭력 정당화에 착수할 수 있는 곳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상대화를 해보겠다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발표하는 이상과 정의가 매력적이고 훌륭해 보일지라도, 일단 상대화하는 거다. 그러려면 ‘절대자는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고전1:25). 그러나 이것은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가 해답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도움받은 글
에리히 프롬(1989). 유기성 옮김. 『파괴란 무엇인가』. 서울: 기린원.
에릭 베르네르(2012). 변광배 옮김.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카뮈와 사르트르의 정치사상, 서울: ㈜그린비출판사.
홍석률(2007). “최루탄과 화염병, 1980년대 학생운동”. 「내일을여는역사」 제28권.
Hannah Arendt (1968).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A Harvest Book/Harcourt, Inc.
_______________ (1970). On Violence. New York: A Harvest/HBJ Book.
http://nobelprize.org (접속일 202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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