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우 마을은 거의 매일 전투가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민중방위군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테러리스트 군대의 군인들은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공포에 휩싸인 동네 젊은 남녀들은 집과 노인들만 남겨놓은 채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본문 중)

자스민(가명)1)

 

강가우는 미얀마 중북부 마궤-도(Division)의 강가우-지구(District)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2021년 2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매우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와 두 딸도 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쿠데타 이후 테러군에 맞서 싸우는 시민방위군(CDF-Civilian Defence Forces)인 친(Chin) 방위군이 결성되면서 친-주(Chin State)와 가까운 강가우 인근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시민방위군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테러리스트 군대와 싸우기 위해 미얀마 전역에서 지역별 민중방위군(PDF-People Defence Forces)이 결성되었습니다. 민중방위군의 대부분은 마궤-도 및 북부 사가잉-도에 있습니다.

 

강가우 마을은 거의 매일 전투가 일어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민중방위군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테러리스트 군대의 군인들은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공포에 휩싸인 동네 젊은 남녀들은 집과 노인들만 남겨놓은 채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달아나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테러리스트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 중 민중방위군에게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바로 사살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강가우 마을에서의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고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거의 매일, 총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달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쿠데타 이후로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한 1년을 포함하면 벌써 3년째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두 아이들은, 물론 이곳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만, 미래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 양곤이나 만달레이와 같은 대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대도시에 집이 없기 때문에 강가우 마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항상 하나님께 내 아이들의 교육과 그들의 미래를 위해 우리를 강가우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편이 두 아이와 함께 한국에 오도록 초청장을 보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뻤고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즉시 양곤으로 갈 준비를 하고 우리 가족 셋의 버스표를 예매했습니다. 그러나 양곤으로 가는 버스는 전투로 인해 단 한 편밖에 없었고 그나마 언제 출발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일주일 후, 저는 버스 기사로부터 출발 시각에 대한 연락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전투 중에 양곤으로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출발 첫날, 4시간 30분의 운행 끝에 버스는 아주 작고 가난해 보이는 마을의 조그마한 노점 앞에 멈췄습니다. 점심시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버스는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진 심각한 전투 때문에 멈춘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상황은 심각했고 우리는 전투 지역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버스가 밀려 서 있었고 승객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추후 공지할 때까지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승객들은 모두 머물고 잘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밤사이 모기에 물릴 것을 생각하니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자야 할지, 어디로 잘 곳을 찾으러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고 집들도 너무 작아서 승객들 모두가 머물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집은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찼고 머물 곳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야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오, 하나님, 한 여성의 도움으로 우리는 감사하게도 숙소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강가우를 떠날 때부터 비가 오고 있었고, 우리는 전투 상황에서 길을 떠났기 때문에 옷과 담요를 여유 있게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옷과 담요는 없었지만 저와 두 아이는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온 첫째 날에는, 먹을 것을 작은 판에 담아 들고 다니는 행상에게서 먹을거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2일 차부터 4일 차까지 지내는 동안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서 대기하는 나흘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식량을 은혜롭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셋째 날, 그 지역의 민중방위군 지도자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우리가 전투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안전하게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날 아침, 드디어 민중방위군 병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민중방위군 군인들은 우리를 잘 보호하며 존중해 주었습니다. 버스는 큰 도로로 갈 수 없었고 이상하고 험하고 바위가 많은 숲길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테러리스트 군인들이 큰 도로에 지뢰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버스가 통과한 대부분의 마을은 테러리스트 군대에 의해 불탔고 심지어 많은 시체를 보았습니다. 이번 양곤 여행은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6시간여의 버스 운행 끝에, 작은 천막들이 쳐 있고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있는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안내해 주던 민중방위군 리더는, 우리 앞에 테러리스트 군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몇몇 민중방위군 병사들이 다섯 구의 시신을 운반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경험은 “한밤중, 시신을 화장하는 깊은 숲속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숲속 추위에 따뜻한 불도 담요도 없이, 달려드는 모기와 싸우며 잠을 계속 청하다 날을 맞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 민중방위군 리더는 우리에게 출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버스는 테러리스트 군대가 출몰하는 지역을 피해 마을과 마을, 숲과 숲을 통과하며 하루 종일 달려갔습니다. 그 저녁 늦게, 우리는 파코쿠(Pakokku)로 가는 예사교(Yesagyo) 교차로에 무사히 도착했고 민중방위군 관할 지역의 끝인 그곳에서 병사들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마궤 도 및 사가잉 도의 민중방위군 병사들은 모두 테러리스트 군대에 맞서 싸우는 젊은 영웅들입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삶과 미래, 가족 등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저도 그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테러리스트 군대가 통행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밤에는 버스가 운행할 수 없어 저희들은 파코쿠에서 야영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6일째 되는 다음 날, 밝기를 기다려 양곤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양곤 가는 길엔 통과해야 할 검문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검문소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고, 의심되면 아무 질문 없이 총을 쏘거나 체포했습니다. 우리는 6일째 되는 날 저녁, 양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강가우에서 양곤까지의 여정은 하루(약 20시간)면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꼬박 6일이 걸렸습니다. 너무 무섭고 생명의 위협까지도 계속 느꼈던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축복과 보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두 자녀는 9월 30일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였고 그리워하던 남편을 3년 만에 만나 지금 부평의 한 방에서 온 가족이 평화로이 머물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여정과 같은 상황을 통과해 고향 강가우로 다시 돌아가라 한다면, 솔직히 못 갈 것 같습니다. 가족의 안전과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에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전쟁이 그치고 속히 평화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1) 자스민(가명) 씨는 횃불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중인 민뚜 목사의 아내로서 군부 쿠데타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 3년간 남편을 만나지 못하다가 이번에 두 딸과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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