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에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은 좀 괜찮은지”를 확인했다. 희생자 중 꼭 직접적으로 아는 지인이 없더라도, 중고등학교 동창생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대학생들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 4·16 참사, 즉,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들은 말 중에 유독 가슴을 쳤던 한 마디가 있었다. “이제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본문 중)

신하영(세명대 교양대학 교수)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지난 10·29 참사1)는 전 국민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다. 한국만이 아니었다. 외신들은 앞다투어 ‘축제였어야 할 핼러윈에 벌어진 참사’를 보도했고, 전 세계가 참사 후의 수습과 처리와 관련해 한국 정부를 주시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무엇 하나 시원스러운 해명도, 사과도 정부의 책임 있는 혹은 권력을 가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크게 상처받은 이들이 누굴까. 나는 단연코, 그때 그 좁고 어두운 골목에 또래 친구가 있었고, 자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고 느끼는 청년 세대라고 생각한다.

 

2022년 2학기에는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가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강의를 대면 강의로 전환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얼굴을 보지 못했던 학생들의 얼굴을 마주 보니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학생들과 대면 수업을 이어가던 중, 10·29 참사 소식을 들었다. 모든 희생자의 생명이 소중하기에 가슴 아픈 소식이었지만, 특히나 더 슬펐던 것은 우리 대학의 학우 중에서도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 그 주간에는 모든 수업을 희생된 학우와 모든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묵념으로 시작했다.

 

그즈음에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은 좀 괜찮은지”를 확인했다. 희생자 중 꼭 직접적으로 아는 지인이 없더라도, 중고등학교 동창생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대학생들은,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 4·16 참사, 즉,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들은 말 중에 유독 가슴을 쳤던 한 마디가 있었다. “이제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어요.”

 

 

불안과 혼돈의 시대, 국가도 사랑도 없다

 

어린 시절, 가라앉는 세월호를 TV와 스마트폰으로 지켜보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다. 성인이 되었고 자기 결정권과 투표권이 생겼지만, 여전히 개인은 국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것은 국민의 권리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이 당연한 것이 ‘진실에 가까운 사실’이 되지 못한다.

 

미국의 정론지 「포린 폴리시」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들을 배반하는 국가를 믿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성세대로 이루어진 한국 정부가 당파적 정치와 희생양 만들기에 사로잡혀서 진정한 위험, 즉 국가 청년과의 단절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많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반복되는 국가 트라우마 또는 방치의 경험은 한국 정부가 국가의 미래보다 당파적 승리에 더 관심이 있다는, 불신의 씨앗을 심어주었다고 평했다.3)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보통 한편으로는 무력감과 우울에 빠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빠르게 체념한 이후 각자도생의 소위 ‘전투 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국가도, 사회적 합의도, 견고해 보이던 가치 체계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언제든 나를 방치하거나 공격하는 위험 요소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힘쓰고, 밑천은 없어도 코인과 주식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도태될 것 같은 기분으로 쫓기며 살아간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어도, 경제적 안전망은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이 싹틔운 이 믿음은, 쉽게 ‘나만 아니면 되는’ 이기주의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변질된다.

 

 

가장 혼란스러울 때, 다정함을 보여줘야 할 때

 

사실, 지금의 극도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가 2030 세대만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기성세대라고 하는 중장년층에게는 또 다른 억울함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기술 주도 성장과 사회 변화가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국가다. 그만큼 ‘기성세대=기득권’의 공식이 적용되기 어려운 사회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청소년 자살률이 OECD 1위지만, 동시에 노인 빈곤율도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청년 세대만큼이나 기성세대도, 기대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따라주지 않는 노후 대비, 디지털 기술이 주도하는 노동 시장에서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청년 세대와 기성세대 간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이미 생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청년 세대 중에 2016년 가을과 겨울의 촛불 집회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고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처럼, 지금의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에서 <안전한 생활>이라는 과목이 생기고 학기마다 따로 안전 교육을 받으며 자란 청년 세대가 ‘노란 리본’을 바라볼 때의 그 감정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혼란스럽고,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고 느낄 때야말로, 다정함이 필요할 때다. 완전한 이해가 없어도 사랑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이는 2천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유대인 30대 청년이었다. 올가을에 개봉된 쉽게 잊히지 않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대사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내가 아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서로 다정해야 한다는 것.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1) 정부와 언론은 참사에 특정 지명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이 명칭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2) 조영석, “이태원 핼러윈 참사 사망자, 제천 세명대 중국인 유학생 포함”, 「파이낸셜 뉴스」, 2022. 10. 31.

3) “Consumed with partisan politicking and scapegoating, the South Korean government is losing sight of the real risk: a severed connection with the nation’s youth…For many South Korean youth, repeated experiences of state trauma or neglect have hardened the belief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cares more about partisan victories than the nation’s future, seeding oppositional national stories…Youth who have lost a deeper identity connection to their democracy are also worrisome because they tend to seek a sense of political belonging elsewhere. They may turn away from traditional forms of political engagement entirely. They are also vulnerable to aspiring demagogues who promise to champion their interests against “the establishment,” which is the most common form of contemporary democratic backsliding.” Aram Hur, “Young South Koreans Don’t Trust a State That Betrays Them”, <Foreign Policy>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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