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상의 엄청난 정서적 충격을 직접 겪는 이들이나 이들을 돕기 위해 일하다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한다’ ‘서양 마귀 놀음에 갔다가 벌을 받은 것이다’ 등등의 판단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진 모습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이런 판단과 정죄에 앞서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사람’ 자체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파괴됨에 함께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먼저이다. (본문 중)

곽은진1)

 

최근 우리는 세월호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참사를 겪으며 뭐라 형용하기조차 힘든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똑같은 상처를 또 입은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망연자실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는 부모와 자식, 친구를 잃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상실을 보면서 아물어 가던 과거의 아픈 기억 속으로 돌아가는, 연쇄적 상실이 일어나는 슬픈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도, 희생자들의 죽음에 조의를 품고 애도하기에 앞서 섣부른 판단과 평가로 희생자들을 비하했던 일부의 발언들은 우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성경에는, 낯설지만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에게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어 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눅 10:30-37).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돌봐 준 사람이, 비록 강도를 만나 위험에 처하기는 했지만, 도적인지 살인자인지 아니면 도망친 노예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생명이 위독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그리고 그는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사용한다. 이 성경 말씀이 단순히 잘 알려져 익숙한 교과서 속 예화 정도로만 다가온다면 이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의 범위를 넘어서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시며, 우리도 또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계산하지 말고 자비와 친절을 베풀도록 신앙 양육을 받아 왔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우리 안에 항변하는 이유가 참으로 많은 것을 보면,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세상이 그만큼 강퍅해진 것인지, 강퍅해진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도 이기적인 생존 전략만 남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의 실천을 가로막는 원인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닐까 싶다.

 

이분법적 사고란 쉽게 말하면 흑백논리이다. 기독교 교리 안에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죄와 의, 선함과 악함, 천사와 악마 등 대립하는 범주들이 존재한다. 이런 범주들을 언급하는 성경 말씀들은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해석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면, 결국 사람과 세상을 선과 악, 네 편과 내 편 둘로 나누어 단순화해 버린다. 그런 단순한 사고는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고 창조 세계의 다양성을 볼 수 없게 만들며 결국 그 사람의 창조적 정신을 파괴한다. 정교하게 기능하던 살아있는 인간의 마음이 점점 단순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결국 죄에도 무딘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모든 일에 정죄와 판단이 우선되는 태도나 풍조는 우리의 정신이 이미 피폐화된 상태임을 말해 준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 사람도 사랑도 없는 마음에는 하나님도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전, 참사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한 구급 대원의 트라우마 상담을 진행했다. 그는 이번 구조 활동이 잔인한 범죄 현장에서 피를 보는 것보다 더 힘든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끔찍한 죽음이 일어난 현장에서는 적절한 뒤처리를 하고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그다지 잔상이 남지 않았지만, 이번 참사 현장에서는 한쪽에서는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고 다른 한쪽에는 도로 위에 늘어놓아진 주검이 보였는데, 이게 현실인지 영화의 한 장면인지 헷갈릴 정도로 지각과 감각의 혼란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에게는 일상생활 중 플래시백이라고도 하는 충격적 사건의 재경험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고, 수면의 어려움과 긴장, 짜증, 정서적 민감함 등의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도 있었다. 상실을 직접 경험한 사상자나 그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것만으로도 그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과 부상의 엄청난 정서적 충격을 직접 겪는 이들이나 이들을 돕기 위해 일하다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여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한다’ ‘서양 마귀 놀음에 갔다가 벌을 받은 것이다’ 등등의 판단이 과연 적절한 것일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진 모습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이런 판단과 정죄에 앞서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사람’ 자체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파괴됨에 함께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이 먼저이다.

 

트라우마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 우울이나 불안, 대인 기피, 수면 장애, 나아가 알코올 중독과 같은 증상을 가져와 삶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는 ‘내가 벌을 받았나?’라는 자책과 죄책감이 더해져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거절감과 소외감을 느끼며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번 참사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신앙이 없던 일반인들보다 더욱 힘들게 이 아픔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아픔과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만 하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위로를 받아야만 하는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회가 그들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위로하는 성숙한 사랑을 보여야 할 때이다.

 


1)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상담학 교수, 기윤실청년상담센터WITH 공동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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