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나는 『홈』을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신앙 교육의 한 가지 사례로 읽었다. 신앙인 부모가 신앙 안에서 실시하는 가정 교육을 자녀가 불편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으로 읽은 것이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홈』은 메릴린 로빈슨의 대표작 『길리아드』의 자매 소설이다. 『홈』에는 『길리아드』에서 존 에임스 목사의 평온한 만년을 긴장과 의혹과 갈등으로 흔들어놓았던 잭 보턴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 있던 잭 보턴이 집에 돌아와 보낸 시간, 즉 『길리아드』 후반부의 상황을 보턴 가의 입장에서 (막내딸 글로리를 화자로 삼아) 잭을 중심으로 펼쳐놓는다.

 

이번에 나는 『홈』을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신앙 교육의 한 가지 사례로 읽었다. 신앙인 부모가 신앙 안에서 실시하는 가정 교육을 자녀가 불편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으로 읽은 것이다.

 

중년이 되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신앙인 부모들의 고민도 덩달아 커진다. 어릴 때는 뜻대로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다니고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따라 자녀를 교육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랑비에 옷 젖듯’ 신앙이 아이들에게 ‘스며들기’를 기대했다. 감사하게도, 기대대로 그렇게 신앙 안에서 잘 자라난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진 후, 부모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 대해 신앙인 부모는 어떻게 할 것인가?

 

Ⅰ. 아버지가 알았던 아들

 

[집에서 불편해한다]

 

잭은 아버지 보턴 목사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아들이다. 일곱 명의 자녀 중에서 여섯 명은 반듯하게 자랐지만 잭만은 예외였다. 어릴 때부터 그럴 기미가 보였다. 일단 잭은 집에서 안식하지 못했고 불편해했으며 겉돌았다. 잭 이외의 다른 아이들은 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교육에 순응하고 그 가운데서 기쁨과 안정을 누렸다. 그러나 잭은 달랐다.

 

형제들은 “다들 붙잡고 끌어안고 난장판을 벌이고 서로 거칠게 다뤘지만” 잭에게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잭 앞에서는 엄마도 아버지도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에게선 외로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잭은 “늘 가족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채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조차 슬프고 힘겹게 보였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그의 미소에는 “진한 소외감이 배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잭은 원래부터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잭을 이해할 여지가 없어지고, 독자는 그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을 터.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기로 하자. 보턴 목사의 가정 교육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잭은 신앙 교육이 순순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다른 형제들처럼 고분고분 받들고 따라가면 긴장과 갈등도 없고 편할 텐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불신자들 사이에서 신자가 불편하고 거북하고 외로운 것처럼, 신자들 사이에서 불신자 잭은 외로움과 소외감에 시달렸다. 그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집안이, 신앙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여러 활동들이 거북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잭은 슬프고 힘겨웠던 것 같다.

 

이걸 흔히 신자 부모들은 자녀의 순종/불순종의 문제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것을 자녀가 자신의 불신앙을 인정하는 정직한 태도로 볼 수는 없을까. 잠든 척하는 사람을 깨울 수 없는 것처럼, 믿는 척하는 사람이 회개하긴 어려울 테니까. 어떤 사람에게 신앙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신앙은 인격적 순복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부모는 자신이 너무나 귀하게 여기는 신앙을 중심으로 한 가정 교육을 명백히 거부하는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 자녀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 말이다. “내가 엄마 아빠가 가르치는 내용, 믿는 바를 받아들일 수 없어도, 그래도 날 사랑할 수 있겠어요?”

 

연락을 완전히 끊고 지내다 20년 만에 돌아온 아들 잭에게 보턴 목사는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아들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네가 나한테서 필요로 하는 게 있는데, 그게 무언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고 대답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주 좋은 아버지였다고 늘 생각했다고, 황송할 정도로 그랬다고 대답한다.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다.

 

아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렴. 너는 늘 어딘가로 도망치고 있었다. 항상 어딘가에 숨어 있었지. 아마 너도 네가 왜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내게 설명해줄 말이 있을 게야.

 

그러나 아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나쁜 놈이라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죄송하다고 대답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설명한다.

 

내 말은, 네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한 것 같다는 뜻이다. 행복이라는 걸 별로 누려 보지 못한 것 같아서….

 

아닌 게 아니라, 소설의 뒷부분에서 잭은 남동생 테디에게 자신도 신앙이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이라고 말한다. “내게 신앙이 있었다면 일이 좀 쉬워졌을지도 몰라. 적어도 그럴 가능성은 있었을 거야.” 그러나 집안에서 편의를 위해 신앙을 가장하지 않았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원하는 것을 얻고자 신앙을 가장하지 않았다. 위선만은 범하지 않았다. 불신앙으로 인한 고난을 감수했다고 할까.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이런 태도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있지만, 어린 잭에게 이 태도는 두 가지 부정적 결과를 낳았다. 갖가지 말썽과 툭하면 집을 빠져나가는 습관이었다.

 

[말썽을 부린다]

 

잭은 ‘고결한 불신자’가 아니었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말썽을 많이 부렸다. 읍장 아들의 사냥용 라이플을 집 헛간에 갖다 놓았다가 들키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일주일간 읍사무소 층계 청소라는 벌을 받기로 했지만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로 가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절친 에임스 목사의 서재에서 책들을 빼다가 여기저기 엉뚱한 데 갖다 놓아서 책 주인을 골탕 먹이기도 했다. 에임스 목사가 잭의 이런저런 잘못에 대해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잭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20년 후 본인의 고백에 따르면) 낡은 글러브를 훔쳤지만 그 글러브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훔쳤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신앙 교육에 순복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부모와 중요한 어른에게 사랑받는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없었던 잭이, 그 신앙 교육과 직결된 도덕적 계율, 양심적이고 분별 있는 행동의 기준을 어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 것 아니었을까? 이래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냐고.

 

아버지 보턴 목사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단, 잭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도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잭에게 한 번도 손찌검을 하지 않았고 언성을 높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물을 뿐이었다. 네가 한 짓이 잘못이라는 건 알고 있느냐고. 아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좀 더 양심적이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느냐?”는 아버지의 권고에 아들은 부정적으로 대응한다. 당장 듣기 좋으라고 안 될 것 같은 말을 하지 않는 태도. 위선 사절, 등장이다. 아버지는 그 대답에 “그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마”라고 대답하고, 아들은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보턴 목사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보턴 목사에게 적대적인 이웃이 잭을 보고 “꼬마 도둑에 술주정뱅이 머슴애”라고 부르며 “네 애비라는 작자는 점잔을 떨면서 사람들에게 이래저래 살라고 설교”하느냐고 비아냥대며 “너한테 딱 어울리는 애비로구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잭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 부인이 그렇게 말하디? 정말 친절한 분이로구나. 내 반드시 그분한테 고맙다고 해야겠구나. 잭, 나는 너한테 어울리는 아버지이고 싶단다.”

 

좀 더 엄하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보턴 목사는 사람들이 늘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엄하게 하세요! 야단을 치세요! 그 애를 위해서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서 늘 슬픔이나 우울함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몰라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께서는 늘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러니까, 저보다 더 형편없는 인생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으셨다면 제 삶은 더 나빠졌을 거예요.” 잭이 웃으면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슬그머니 집을 나간다]

 

늘 청개구리처럼 부모의 바람과 정반대로만 행동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딱 한 가지. 그는 “아들을 잃지만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그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소망”이었다.

 

잭은 툭 하면 집을 슬그머니 빠져나가 행방이 묘연해져서 부모의 속을 태웠다. 그런데 온 가족이 잭을 찾으러 다니다가 못 찾고 돌아오면, 잭은 어느새 집에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는 어딘가 비밀스럽고 냉소적이고 다가가기 쉽지 않은 아들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늘 언행에 조심했다.

 

한번은 잭이 보턴 목사의 절친 에임스 목사 댁 우편함을 폭발시켰다. 그날 이후로 부모는 잭에게 밤늦게 나가지 못하게 했고, 잭은 창문으로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가 울타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부모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부모는 창문 아래 현관 지붕이 있는 방으로 옮겨주었다. 창문으로 나가다가 떨어져 죽을까 봐.

 

잭은 부모가 자신이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조처를 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의 주 관심사는 잭의 안전이었다. 그들은 잭에게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그냥 문으로 나가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나가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다 마침내 아들을 향한 부모의 단 하나의 소망마저 날려버리는 일이 터진다.

 

『홈』표지, ⓒ랜덤하우스

 

[결정적 사건]

 

20년 전, 잭이 집을 떠났던 것은 빈민촌의 어느 소녀와의 관계로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외면한 채 대학으로 달아나버렸다. 잭이라고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다. 그는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음을 알았다. 그는 집에서 늙은 아버지를 보살피는 막내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말씀도 하셨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내가 아버지한테 엄청난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니 너무 두려웠어.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정말 겁이 났단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던 시절, 미국 남부의 마을에서 목사 아들이 사고를 쳤다. 안 그래도 말썽꾸러기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사고였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행동으로 두려움과 절망감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짐을 벗어 버린 기분이기도 했어.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면서 그 기분을 즐겼어.

 

잭이 짊어졌던 짐은 무엇이었을까? 목사 아들로서 가정과 교회, 마을에서 받는 기대였을 것이다. 장로교 목사 보턴은 신앙과 생활의 본이 되고자 했고 자녀들을 가르쳐 그 길로 이끌고자 했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잭은 그에 따른 부담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그런데 소녀와 아이에 대한 책임에서 달아나면서 그 부담마저 벗어버린 기분을 느낀다.

 

잭의 생각대로 아버지는 그 일로 커다란 고통을 겪었고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들을 용서하고자 발버둥 쳤지만, 이번만큼은 그 일이 참 힘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들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아버지로서 감당하려 했다. 그 소녀와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고 아이는 오래 살지 못했다.

 

잭은 그 일에 대해서만은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다. 그렇다면 아들은 집을 떠나는 것으로 스스로를 꾸짖고 벌한 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버지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아들의 행동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고,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그리워했다. 아들의 행동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과 이어지고 싶어 했다. 아버지에게 잭을 용서하는 일은 “습관보다 뿌리 깊은 습성”이었다. 아들이 떠나버린 후, 이제 물리적 대상을 잃어버린 그의 용서와 사랑은 어떻게 표현될까? 이제 그 얘기를 해보자.

 

[잃어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다]

 

아들이 결국 그렇게 떠나고 아버지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짝사랑은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큰 괴로움을 안겨주는 법. 아버지는 사랑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균형 감각을 갖추리라 생각하고 마음을 모질게 먹어 본다.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으려고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문도 외어 봤다. ‘그 녀석은 우리한테 손톱만큼도 관심 없어. 그저 이따금 돈이나 좀 필요로 할 뿐이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사랑은 일방적인 내리사랑이었으니까.

 

특별한 일이 생기면 어떨까?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소식을 전하면서 그래도 엄마 장례식 때는 집에 올 줄 알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잭이 와주었다면 아주 큰 위로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오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기대였다고, 도대체 왜 그런 기대를 했을까, 자문한다.

 

그렇게 집을 나가 연락도 없이 지내던 잭이 20년 만에 마침내 집에 오겠다는 연락을 보낸다. 아버지는 설렌다. 잭이 오겠다는 시간이 자꾸 밀리다가 이제 안 오나보다 싶어졌을 무렵, 잭은 집에 도착한다. 그동안 보턴 목사의 마음에는 아들 걱정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돌아온 아들에게 “만일 네 얼굴을 못 보고 죽었다면, 나는 주님이 선하심을 의심했을 거다”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돌아온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오른다.

 

아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번에는 왜 돌아온 건지 모르지만 묻지 않는다. 그것이 아들을 밀어내는 일이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턴 목사는 집에 머물며 자신을 돌봐 주는 막내딸 글로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잭이 어디 있느냐? 안 떠났느냐? 어디 있는지 알아보렴. 잭을 불러다 주렴. 목소리가 듣고 싶다. 잭에게는 피아노를 쳐 달라고 거듭 부탁한다. 아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들이 곧 떠날 것만 같아 집에 있으면서도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Ⅱ. 아버지가 몰랐던 아들

 

[변화]

 

보턴 목사는 몰랐지만 잭은 변했고 변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뭔가 아쉬운 게 있어서 집에 돌아온 것이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하고자 집을 다시 찾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자존심과 불편함을 누르고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고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너무 늙어 있어서 놀랐다.

 

20년 전, 탕자를 사랑한 목사 아버지는 아들이 벌인 일을 책임지고자 했다. 20년 후, 아버지는 같은 일이 재현되고 있다고 지레짐작하고 이번에도 아들이 벌인 일을 책임지고자 한다. “쇠약한 와중에도 여전히 씩씩하게 다시 한 번 슬픔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또 한 번 무거운 짐을 질 채비를 마”치고 아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잭은 상황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제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있다면 제가 해결할 겁니다.” 잭은 이번에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에 막막한 상황에서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막연히 아버지의 도움을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가 있다는 의미에서 잭의 상황이 20년 전과 비슷해 보여도, 잭의 상황 대처 방식은 달랐다. 20년 전에는 달아나는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했지만, 이제 그는 문제 해결을 모색하며 돌아온 것이었다.

 

[아들에게 보낸 돈의 나비 효과]

 

아내가 죽었을 때, 보턴 목사는 잭에게 편지를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동봉해서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교도소를 나왔던 잭은 그 돈으로 양복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술을 마셨다. 교인들을 다시 만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양복을 입으면 아무래도 목사처럼 보여서 나중에는 그 옷마저 팔아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그 양복으로 인해 그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당시의 법 때문에 결혼할 수 없는 상대였지만 실질적인 아내가 된 사람, 델라였다.

 

델라가 잭을 만난 건 어느 비 오는 오후였다. 잭이 막 교도소에서 나온 때로 새 양복을 입고 있었다.…어쨌거나 그날 그는 그 양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이제 영원히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바라본 세상은 두렵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했다. 그때 그의 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숙녀가 나타났다. 그가 우산을 씌워 주자 그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온화한 눈길에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그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상냥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기쁨을 잊고 살아온 터였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은 목사가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그녀가 용서할 거라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든 다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자신이 아들에게 보낸 돈. 그냥 아들이 술이나 사 먹고 말았나보다 생각했던 그 돈이 어떤 나비 효과를 낳았는지. 아버지가 모르는 가운데, 그의 그리움과 관심과 사랑은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결실을 낳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가 보낸 그 돈은 잭이 델라를 만날 준비를 시켜준 셈이었다. 델라는 따뜻한 사랑과 용서와 보살핌으로 “잭을 안전하게 지켜 준 사람”이고, 덕분에 잭은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번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준 봉화 광산 생존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막막한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파 작업 소리 덕분이었다고 한다. 바깥에서는 광산 내의 사정을 몰랐지만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했고, 그것이 광산 생존자에게 희망의 끈이 되어준 것이다.

 

부모가 하는 일에 당장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무엇이 어떻게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결과를 확인할 수 없으면 또 어떤가, 낙심하지 말자’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열매를 당장 확인할 수 없어도 된다고, 뿌린 씨앗이 어디로 날아서 어디서 결실할지 우리는 모른다고, 그저 묵묵히 사랑의 씨를 뿌리라고.

 

[생각보다 가까이]

 

잭이 다시 떠나기 얼마 전, 글로리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집에 돌아온 오빠가 보이지 않아서 가슴 졸였던 시간들, 오빠를 찾아 집 안팎을 뒤지다 걱정에 빠졌던 대부분의 순간에 잭은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헛간 다락을 아지트로 꾸며 놓고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밖에서 돌아다니다 괜히 보턴 가의 평판을 떨어뜨릴까 봐 우려한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그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한 뜻밖의 인물을 통해 잭이 어릴 때도 비슷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잭이 없어졌다고 온 가족이 걱정하며 동네를 뒤지고 다닐 때도, 정작 잭은 집 옆의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나무에 걸려 있었던 그넷줄을 타고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 거기 숨어 있었다. 그는 집에서 편안하지 않았고 가족과 섞여 들지는 못했지만, 가족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집에 대한 추억은 ‘놀랍게도’ 잭에게도 소중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글로리에게 집을 물려주겠다고 했을 때, 잭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집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글로리에게 명확하게 전달한다. 그 집은 그가 아내와 아이에게 수없이 이야기한 소중한 추억의 장소로 이미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방식과 정도는 달랐지만, 집은 잭에게도 특별한 곳이었다. 잭의 반응이 시원찮거나 실망스러웠을 때도 변함없이 사랑을 쏟았던 부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Ⅲ. 보턴 목사가 고전하는 신앙인 부모에게

 

정리해보자. 잭이 제멋대로 집을 떠났다가 20년 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것은 물론이고, 힘닿는 한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의 한결같고 아낌없는 사랑은 그의 귀향을 가능하게 만든 근본 조건이었다.

 

잭은 아버지뿐 아니라 에임스 목사, 형제들에 대해서도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호의를 품고 있다. 그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주변에 있던 그들이 부족하나마 꾸준히 호의와 사랑의 본을 보여준 덕분이다.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는 신앙인들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과 신앙인에 대한 잭의 태도에 흔적을 남겼다.

 

잭은 기독교 신앙이 믿어지지 않아서 불신자로 남았을 뿐, 신앙에 환멸을 느끼거나 신앙인들이 위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잭이 정직한 불신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신자들의 진지하고 정직한 모습을 본 까닭이리라. 그래서 저들 같은 믿음이 없으면서 믿는 척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불신자 잭의 상황이 나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자 부모의 순전한 신앙과 진실한 사랑은 잭의 내면을 채우고 주위를 감쌌다. 거기서부터 잭이 어디까지 더 나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보턴 목사와 잭의 이야기가 오늘날을 사는 (자녀의 신앙교육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신앙인 부모들에게도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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