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현장에 공공신학을 접목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공공선을 추구함에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개인적이지 않으며, 개인의 사적인 목적과 이익에 봉사는 수단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네 이웃’은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포함합니다. (본문 중)
김승환(공공신학 아카데미 대표)1)
코로나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영향력 감소는 물론 기존 성도들의 이탈로 교회의 생존까지도 우려해야 할 정도입니다. 지난가을에 있었던 각 교단 총회의 교세 통계표를 보면, 정점에서 약 15~20% 정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최근 2~3년간 교인 감소 폭이 눈에 띄게 커졌습니다.2)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교인들의 상당수가 현장 예배로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과, 청소년과 청년층의 복음화율이 3% 아래인 것까지 감안하면 앞으로 교회의 상황은 정말 심각할 것입니다.3) 다음 세대는 아마도 종교가 필요하지 않은, 아니 무종교 또는 탈종교화 된 사회에 익숙할 것입니다. 마치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탈교회(post-church) 현상을 보입니다. 서구 사회에서 일어났던 탈교회 현상과 달리,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지 않는 교회 배타적인 태도가 우세합니다. 탈교회의 현상을 가장 먼저 포착한 영국의 사회학자 그레이스 데이비(Grace Davie)는 이를 ‘소속감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1970-80년대 영국 기독교에 나타난 변화 중 하나로서, 제도적인 교회, 교리와 전통에 갇힌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 출석을 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들의 등장을 말합니다. 이들은 교회를 떠나기는 했지만, 교회를 반대하거나 기독교 신념을 혐오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지향하면서 종교보다 영성을 더욱 추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탈교회 현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정치·사회·문화적 분위기와 연결됩니다. 목회자의 성 윤리 문제, 교회 세습, 소수자 배타주의, 극우 보수주의 개신교의 광장 정치는 교회를 향한 염려와 비판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교회 내부적으로 더욱 심각한 원인이 있습니다. 성장지상주의, 개교회주의, 번영신앙과 기복주의, 성직(목사)주의 등은 한국교회의 주된 병폐로 꼽히는 것들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이고, 목회의 위기입니다. 또한 사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교회와 신앙인이 양산되는 근원에는, 문제에 대응할 수 없는 신학의 빈곤과, 빈곤한 신학을 절대화하여 가르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왜곡된 신학과 신앙의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패러다임이 무엇일까요? 목회 현장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대안을 세울 수 있는 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연 공공신학입니다. 교회 안으로만 향하던 방향성을 교회 밖으로 돌리고, 내세 지향적 축복을 추구하던 믿음에서 현실 참여적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절대적인 신앙으로 타자를 배제하던 태도에서 돌아서서, 상대편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함께하려는 연대를 지향해야 합니다. 혐오적인 언어가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한 포용적인 공적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공공신학은 목회 현장과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열린 관점을 제공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의 공공신학자인 존 드 그루시(John de Gruchy)는 신학의 목표는 학문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습득한 신학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을 배우는 것(reading theology)이 아니라 ‘실천’(doing theology)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신학함 또는 신학의 실천은 기독교 사상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학적 해석이 사회적 상황의 분석을 통해 성서를 조명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4)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성경과 교회 전통에 바탕하여 응답하려는 우리 믿음의 행위가 곧 우리의 신학함입니다. 공공신학을 목회 현장에 접목하는 일은, 현 사회의 위기를 올바르게 진단하고 교회가 서야 할 자리를 제대로 찾아가는 회복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실천을 공공성의 관점으로 점검하면서, 교회 내부를 향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평평하게 수평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신학의 방향 전환은 목회의 관점과 해석의 전환인 동시에 실천의 전환이 될 것입니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적 교회로 전환하라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번영』에서, 종교를 세계 종교와 지역 종교로 구분하면서 그 차이를 몇 가지 서술합니다. 세계 종교는 현실을 초월과 내재라는 “두 세계”로 설명하면서 모든 인류와 창조 세계를 포함한 보편적인 진리를 주장합니다. 동시에 일상적 번영(flourishing)을 능가하는 궁극적인 선에 관심을 둡니다. 반면, 지역 종교는 자신들의 신과 영적인 세계 안에서 부족주의적인 집단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개인과 마을의 번영에 관심을 둡니다. 보편성보다는 지역성을 강조하면서 길흉화복과 같은 현세적 삶을 중요시합니다. 볼프에게 공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를 펼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잘 풀리는 인생에 대한 추구, 즉 창조 세계 모두의 번영(flourishing)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볼프가 제안하는 번영은 세속의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지구적 번영, 바로 지구적 공공선(common good)입니다.5)
세계 종교는 사람들을 초월적인 영역과 연결해 주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는 삶, 기쁨에 찬 만족과 연대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종교는 보편적 선을 추구하면서 현실을 성찰하고, 개인들이 자신 안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은 사회와 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공적 종교의 역할입니다.
목회 현장에 공공신학을 접목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공공선을 추구함에 맞추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개인적이지 않으며, 개인의 사적인 목적과 이익에 봉사는 수단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네 이웃’은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포함합니다. 디지털 매체의 활용으로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이웃을 물리적인 경계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과 전도 세미나, 제자훈련, 소그룹 전략을 가르치는 강의들이 넘쳐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려는 목회자와 리더들의 헌신은 이해하지만, 교회 내부 활동에 집중하는 동안 한편으로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목회의 주요한 한 축인 공공의 영역으로부터 교회는 스스로 고립되어 갑니다.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향한 상승의 추구와 다시 하나님에게서 창조 세계로 향하는 회귀의 선순환에서 장애가 발생했음을 비판합니다. 초월적인 세계를 향한 갈망은 다시 현실 세계를 향한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둘 사이를 연결하는 데 실패합니다. 초월적 시선으로 자신뿐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해석하며 참여적 신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 갇힌 교회는 집단 이기주의와 배타주의에 머물 수 있습니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공신학이 목회 현장에 접목될 때, 목회자들의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이 달라질 것입니다. 설교는 공적인 진리를 선포할 것이고, 예배를 통하여 모든 이들을 향한 축복과 중보기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 공부와 소그룹 모임은 자기 자랑에 가까운 간증을 나누는 것을 넘어 지역의 상황과 이웃들을 고민하며 사랑으로 품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들이 잘해왔던 사회봉사는 교인 수 증가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연약한 이들과 함께하는 몸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공공신학은 교회와 사회의 공공성을 회복한다
교회가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공적인 봉사와 참여를 좀 더 열심히 하자는 뜻만은 아닙니다. 교회가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대화가 가능한 태도, 개방된 사고, 모두의 이익에 참여하고 봉사하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회가 교회를 바라볼 때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집단이라고 오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 좋은 이웃이자 파트너가 되기 위해 먼저 스스로를 공적인 존재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이는 구원의 방주,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론은 외부를 향한 배타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는, 지역 사회의 한 구성원이자 사회적 책임을 갖는 공적인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공공신학은 교회의 인식과 태도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또, 사회 참여의 방식에서도 다른 접근을 시도하여, 복음의 특수성을 인식하면서도 복음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유연한 태도와 열린 사고를 갖게 합니다.
그렇다면 공공성이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발현되어야 할까요? 사이토 준이치는 『민주적 공공성』에서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비교 분석하면서 공공성을 4가지로 정리합니다. 바로 ‘합의 형성을 위한 공공성’, ‘복수성’, ‘생명 지향성’, ‘친밀성’입니다.6)
첫째, ‘합의 형성을 위한 공공성’은 각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비판적 담론의 공간을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문법과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논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대화의 상대자를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공공신학은 열린 대화를 지향합니다. 공공신학의 실천 방법론에서 가장 핵심이 바로 ‘공적 대화’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앞세워 자신의 주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사안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공공 목회에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둘째, ‘복수성’(사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공공성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대화에서 다양한 관점이 인정되는 다수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주의가 지배했던 나치주의 사회에서처럼 인간이 자유롭게 사고하지 못하고 국가 권력으로부터 통제를 받는 상황은 인간 존재의 소외를 야기할 뿐입니다. 공공의 영역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기에 한두 사람이 지배할 수 없습니다. 공공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면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합니다.
셋째, ‘생명 지향성’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논의를 한다고 해서 모두 선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한 것처럼, 각 개인은 선한 의도를 지닌다 해도, 집단이 선한 조직이 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각자의 욕구와 권리가 실현될 때 그 합이 보편적 진리와 선을 향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공공신학이 목표로 하는 공공선은 모두의 생명을 더욱 번성(flourishing)하게 하는 보편적 선을 의미합니다. 교회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창조 세계 전체가 창조주의 본래 목적과 뜻을 따라 각자의 존속과 행복을 향해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친밀성’입니다. 파편적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동반자로서 살아가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동체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려는 협력의 태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공공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사랑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고, 타자를 수용하고,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합니다.
공공신학은 교회의 전반적인 관점과 태도를 전환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공적인 태도와 대화를 강조하면서 교회를 넘어선 공동의 선을 회복하는 데 참여합니다. 목회는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회 현장이 교회를 포함한 공공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될 때 다양한 상상과 실천이 가능합니다. 앞에 언급한 네 가지의 특징들을 고려하면서 공적인 참여를 시도할 때, 교회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할 뿐 아니라 공공의 중요한 파트너로서 인식될 것입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모두의 신학이 필요하다
던칸 포레스터는 “신학은 사회를 향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라고 말합니다.7) 신학은 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물론 신학이 교회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교리와 실천 등을 연구하면서 교회에 봉사하지만, 동시에 교회가 속한 사회를 위한 섬김과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가는 개인들을 연결하고 그들의 삶에 중요한 가치와 신념을 제공해주는 한편, 공적인 이슈에 있어서 합리적 이성 너머의 통찰과 혜안을 제공하여 더 나은 사회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포스트 코로나의 한국 사회에서 더욱 종교의 건강한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명제를 받은 우리는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운행하도록 돌봐야 할 것입니다.
탈교회 시대는 교회의 몰락과 쇠퇴의 계기가 아니라, 교회가 내부만 바라보았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모두를 위한 신학적 상상과 실천으로 나아갈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탈진리 시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이 될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연결하며, 급속한 사회 변화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들에게 건강한 방향성과 안정감을 제공해야 합니다. 교회는, 쾌락적 욕망을 장려하고 불의를 존속시키는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며, 모두를 위한 정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북돋워야 합니다. 또한, 창조 세계 전체의 아픔을 치유하고, 참된 공동체성을 이루어 시민들의 결속과 연대를 도와야 합니다.8)
이를 위해 우리에게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이 필요합니다. 공공신학은 다양한 공공의 영역에서 불합리한 기득권에 도전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평하고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신학입니다. 생산적 토의가 가능한 민주주의 체제에 맞는, 열린 대화가 가능한 신학이며, 신학 고유의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으며, 이론과 실천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신학 모델을 지향합니다.
1)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와문화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같은 대학교의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공공신학과 도시신학을 전공했으며, 『도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새물결플러스), 『공공성과 공동체성』(CLC),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1, 2』(공저, 도서출판 100), 『혐오와 한국교회』(공저),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공저, 이상 삼인) 등을 저술하였다. 기윤실 교회윤리연구소, 도시공동체 연구소, 인문학&신학 에라스무스, KTTN 등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2) 송주열, “통계로 본 장로교단, 교인 수 감소 브레이크가 없다”, 「노컷뉴스」, 2022. 9. 27..
3) 최기영, “청소년 복음화율 3%… 점점 내리막, 10대들의 소통 구조부터 이해해야”, 「국민일보」, 2022. 3. 1.
4) John de Gruchy, “The Nature, Necessity and Task of Theology,” in John de Gruchy and C. Villa-Vicencio(eds.), Doing Theology in Context: South African Perspectives, (Maryknoll, Orbis Books, 1994), 2-14. 김창환, 『공공신학과 교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1), 19에서 재인용.
5) 미로슬라브 볼프, 양혜원, 『인간의 번영』(서울: IVP, 2017), 100-101.
6) 사이토 준이치, 윤대석 외 역, 『민주적 공공성』 (서울: 이음, 2018).
7) Duncan B. Forrester, Beliefs, Values and Policies (Oxford Univ Press, 1990), 36.
8) 미로슬라브 볼프, 양혜원, 『인간의 번영』 (서울: IVP, 2017),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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