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2편은 아주 유별나 보인다. 이 땅의 재판장 역할을 하는 신들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불의한 자들을 편들기 위해 약자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했기 때문이다. 위경에 속하는 에녹서는 천상의 존재들을 인간의 삶 여러 부분에 책임이 있는 존재로 말한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하나님이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신들의 모임 가운데. 신들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시 82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의회를 소집하시고 천상의 존재들에게 법적 선고를 내린다는 것이다. 목소리 높여 유일신을 외치는 구약성서에서 이제 무슨 일인지?

 

다신론을 배경으로 하는 주변 서아시아 신화에서는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구약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유일신 사상을 믿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약성서에도 여러 신들을 인정하는 흔적이 곳곳에 남겨져 있기는 하다. 시 82편의 신들도 그 흔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구약성서의 틀 안에서는 천사 같은 천상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서 신들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로힘’도 신들뿐만 아니라 천상의 존재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 신들을 심판하는 이유가 궁금한데, 그들이 세상을 관리하면서 불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대들은 옳지 않게 심판하고, 그릇된 사람들의 얼굴을 봐주려고 하는가? 그대들은 심판하라, 기댈 곳 없는 사람과 부모 없는 아이를 위해서.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찾아 주어라. 그대들은 건져 내 주어라, 기댈 곳 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그릇된 사람들의 손에서 빼내 주어라”(시 82:2-4). 결국 신들에게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다. “가장 높은 신의 아들들이야, 그대들은 모두. 그런데도 사람처럼 죽고 높은 관리들 가운데 하나처럼 쓰러질 게야”(시 82:6-7; 새한글성경).

 

죽음은 천상이 아닌 이 땅의 유한한 존재(mortal)에게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고대 서아시아의 신화들을 보면 전쟁이나 싸움 가운데 신들이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법정이 열리고 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처형하는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마리에서 발견된 한 예언 문헌을 보면, 어느 천상 의회에서 티쉬파크라는 신에게 위 시편과 유사한 선고가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너의 날은 지났다. 너는 마치 에칼라툼과 같은 날을 맞게 될 것이다.”1)

 

 

주변 신화와는 다르게 구약성서는 하늘의 세계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신화는 천상 존재들의 사건 사고와 희로애락을 일일 연속극 드라마처럼 소상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이에 소극적이고 신비로 감추고 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그 주요 내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 82편은 아주 유별나 보인다. 이 땅의 재판장 역할을 하는 신들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그들의 죄목은 불의한 자들을 편들기 위해 약자와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했기 때문이다. 위경에 속하는 에녹서는 천상의 존재들을 인간의 삶 여러 부분에 책임이 있는 존재로 말한다. 살인과 타락, 특히 불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시 82편과 유사한 선고를 타락한 천상의 존재들에게 내린다. “모든 쾌락의 영혼과 감찰 천사들(Watchers)의 자손을 멸절하여라.…모든 악행은 사라질 것이며 의와 진리의 나무가 생겨나리니 기쁨이 심어질 것이다”(에녹1서 10:15-16).

 

이 주제는 넓게 보자면 고대 서아시아에 편재한 타락한 천상의 존재와 그들의 반역이라는 주제와 함께한다.2) 시 82편은 신적 존재들의 타락이 창조의 근간인 정의를 무너뜨렸으며, 정의가 회복되려면 이 불의한 신적 존재들이 멸절되어야 한다고 말한다.3) 이 주제를 더 넓게 보면 ‘혼돈에서 질서로’라는 주제 안에서도 그 의미를 갖는다.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혼돈을 타파하고 질서를 도래케 하는 것이 곧 창조 역사였다. 에누마 엘리시에는 공포를 조장하는 티아마트와 킹구를 죽여서 혼돈을 타파하고, 킹구의 시신에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우가리트의 신화에도 모트-샤르라는 신이 죽고 나서 샤하르와 샬림이라는 쌍둥이 신이 태어나게 되었다. 주(Zu) 신화도 혼돈을 타파해야 질서가 창조된다는 주제를 명료하게 표현한다. “도망자 주를 잡아라. 그래서 그의 처소를 혼돈에 빠트리는 동안, 내가 창조한 이 땅에 평화가 오도록 하라.”4)

 

성서에서도 ‘혼돈에서 질서’라는 주제는 의미심장하게 발현된다. 특히 ‘물’은 이 혼돈과 공포를 자주 상징한다. 창세기의 첫 이야기도 창조라는 질서가 물과 흙이 뒤범벅이 된 혼돈을 타파하고 도래하는 것을 말한다(창 1:2, 6-10). 히브리 노예들이 노예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라는 새 질서를 창출할 때, 홍해라는 물에서 공포와 혼돈을 타파하고 나서였다.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방랑자 신분을 벗어나 정착민의 질서에 참여하게 된 것도 요단강이라는 물을 건너고 나서였다.5)

 

뭐든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려면 한바탕 혼돈과 고난을 겪어야 하나 보다. 한번 흔들어 줘야 뭐든 고르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나 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건설적인 새 창조는 먼저 뽑고 허물어야 도래한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어둠 가운데서 살아간다. 땅의 기초가 모조리 흔들린다”(시 82:5). 세상의 공의에 책임 있는 자들이 무지하다. 자신의 지위와 역할에 무책임하기 때문에 무지한 것이다. 이 땅의 정의를 관리해야 할 책임자들이 어둡기 때문에 땅의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제거한다. 혼돈을 겪는 아픈 일이지만 그래야만 이 땅의 정의는 다시 굳건하게 설 수 있다.

 

시 82편에 대한 해석은 사실 무궁무진하다.6) 해석의 결론을 쉽게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시가 전해주는 충격은 쉽게 전달된다. 신들도 인간처럼 죽는다. 더욱이 책임 있는 위치에서 불의를 눈감고 약자를 유린하면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파적 행정이 약자에게 미치는 해악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고 어둠 속에 눈이 감겨 있다. 사회의 공의는 신들의 목숨마저 위협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그러나 혼돈 상황은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성서는 창조적 질서가 혼돈의 타파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 82편은 빨리 하나님이 그 혼돈을 종결하여 주시길 부르짖으며 끝맺는다.

 

“일어나십시오, 오, 하나님, 심판해 주십시오, 세상을! 주님이 모든 민족의 임자이시니까요” (시 82:8).

 


1) Archives royales de Mari (26권, 1988년), 196쪽. 이 문장은 기원전 18세기경, 고대 아모리의 작은 도시 국가인 에칼라툼의 왕 샤마쉬-아다드 1세가 바빌론으로 쫓겨 갔던 사건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적 존재에게 그 교만을 지적하고 인간처럼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선고를 내리는 주제는 다음을 참고하라. 메소포타미아의 에누마 엘리시 I. 29-54; 우가리트의 바알 신화 KTU 1.15.ii; 히타이트의 ‘Ritual before Battle’ (ANET 354-55); 이스라엘의 에스겔서 28:2과 에녹 1서 15:4, 6.

2) 구약성서의 경우 다음 참조. 창 6:1-4; 사 14; 겔 28:1-10; 겔 28:11-19; 욥 38; 단 11-12.

3) 참조. 시 96:10; 사 24.21-23. 신적 존재가 세상을 관리한다는 구약성서의 언급은 다음을 참조. 하늘의 정찰단과 고소자는 욥 1:6-7; 천사장 미가엘은 단 10:12-13, 21; 12:1 (살전 4:16; 유 1:9); 천사장 가브리엘은 단 8:16; 9:21.

4) J.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3rd ed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111쪽. 구약성경의 다음도 참조: 사 27:1; 51:9; 시 74:13-14; 욥 26:12-13.

5) 기민석 “삶의 축복된 시간은 혼돈을 극복한 아픔 후에 찾아온다”, <한국일보>, 2022. 11. 20.

6) 필자의 한 견해는 다음 참조. 기민석, “시 82편: 우가릿의 목소리, 이스라엘의 노래”, <구약논단>(15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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