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를 통해 두려움, 복수, 신앙의 증거, 이 3가지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여기서 이 문제들에 대한 완결된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리즈에서 각 문제를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좋은 문학을 읽을 때 따라오는 보너스와 같은 것이었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아이는 <해리 포터> 시리즈와 유년기의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덕분에 나도 함께 책을 읽고 영화도 같이 보면서 호그와트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다. 오늘은 이 시리즈에서 내가 답변의 단초, 또는 희미한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질문을 이야기하려 한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 스포일러가 많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혹시 <해리 포터> 시리즈를 나중에 보려고 아껴두고 계신 분이라면 책이나 영화를 보신 다음에 이 글을 읽으실 것을 당부한다.

 

두려워하는 자?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는 최종적 심판을 받는 자들의 명단이 등장한다.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숭배자, 거짓말하는 자.

여기에 뜻밖의 사람이 들어 있다. 그것도 명단 제일 앞에. 두려워하는 자. 왜 그럴까? 믿음이 없는 자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가는 곳이라 했으니, 믿음이 없는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다. 흉악한 자, 살인자 등등도 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는 자가 지옥에 갈까? 그것도 일등으로!

이상하다. 불편하다. 아마도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흉악한 자, 살인자 같은 사람은 남을 괴롭히고 죽이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자가 왜 여기 나와 있을까. 두려워하는 자는 약한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불쌍히 여겨 주고 격려하고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발견했다. 내게 온몸으로 답을 제시한 인물은 웜테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악당, 피터 페티그루다. 웜테일은 원래 해리 포터의 아버지와 친구였으나, 악당 볼드모트의 부하가 되어 해리의 부모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나중에 볼드모트가 다시 힘을 얻게 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자다. 공로만 놓고 보자면 웜테일은 볼드모트의 오른팔이라도 되어야 할 듯하지만, 실제로 그는 볼드모트 추종자들에게 계속 무시당하고 볼드모트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도 웜테일은 별다른 요구를 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왜 그럴까? 웜테일이 원하는 건 뭐였을까?

볼드모트가 웜테일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말한 대로, 웜테일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웜테일은 볼드모트가 무서워서,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그를 위해 몸 바쳐 일했다. 볼드모트가 두려워서 친구들을 배신했고, 십 년 가까이 쥐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숨어 지내는 처지도 감수했다. 볼드모트가 원하는 어떤 배신과 악행도 거침없이 저질렀다.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정도, 신의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두려움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에 대한 단서를 웜테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본문에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자인지가 나와 있지 않다. 두려움의 ‘대상’이 빠져 있다. 그러니까 본문에다 목적어를 집어넣어 이렇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엉뚱한 것을 두려워하는 자, 그에게 화 있을진저.”

 

복수는 나의 것?

 

살아오면서 나름 소소하게 억울하고 분한 일은 있었지만, 뉴스에 나고 소설의 소재로 등장할 만한 그런 흉악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가정하고 복수에 대한 성경의 지침을 떠올리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복수에 대한 성경의 지침은 간단명료하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천명하신 것이다. 어떤 것이 진짜 제대로 원수를 갚는 방식이 될지, 어떻게 해야 정의가 설지 내가 가장 잘 아니 내게 맡겨라. 내가 일할 자리를 남겨놓으라. 이런 말씀이겠다. 이 말씀대로라면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일이 된다.

어떻게 하면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을 믿음으로 받고 그에 준해서 대처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원수 갚으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것이 어느 정도라도 머리에 그려진다면 복수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일2)이 좀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 이 문제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격적 신뢰와 믿음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친히 하실 복수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마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서도 <해리 포터>의 도움을 받아 보자.

 

영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스틸컷.

 

해리는 볼드모트에게 부모의 은신처를 알려 주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장본인이 부모의 친구였던 웜테일이었음을 알게 된다(3권). 그리고 역시 부모의 친구였던 늑대인간 루핀 교수와 시리우스 블랙을 통해 그를 처치할 기회를 얻는다. 두 사람은 웜테일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해리는 부모의 원수, 친구를 배신해 죽게 만든 짐승 같은 자, 죽어 마땅한 자인 그를 직접 처단하는 사적 복수의 길을 거절한다. 참으로 용기 있는 선택이다.

그러나 웜테일은 이후 벌어진 혼란을 틈타 탈출한다. 그리고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가 부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4권). 역시 기회가 있을 때 제거했어야 했어, 독자는 그렇게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7권에 가면 모든 것이 뒤집힌다. 7권 중반부에서 해리와 친구들은 볼드모트의 부하들에게 붙잡힌다. 절체절명의 순간, 해리 일행은 웜테일이 자기를 살려 준 해리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틈을 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해리가 살려 준 웜테일이 이후 저자가 적절한 시점에 가서 그려내는 이야기 전체의 큰 구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웜테일은 볼드모트의 부활을 위해 희생했다가 마법으로 되돌려 받은 손에 목이 졸려 죽는다. 저자 조앤 롤링은 ‘해리가 웜테일을 살려 주었기 때문에’(!) 그가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적절한 시기에 그를 위기에서 구해 내는 중요한 도구로 웜테일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의 악행에 걸맞은 방식으로 복수를 해줄 수 있었다.

물론, 복잡다단한 세상을 다 담아내기에는 미약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내가 조앤 롤링보다 훨씬 절묘하고 믿음직하게 그분 고유의 일, 복수를 완수하실 역사의 저자의 필력을 믿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반박 불가한 논리적 증명?

 

믿음이 ‘자, 이런 거다’ 하며 내놓을 수 있는, 모두의 눈에 보이는 명명백백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 자신이 신앙의 회의를 겪을 때 간절했던 생각이자, 지금도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아쉬움이다. 초자연계가 정말 자연계를 떠받치고 있고 자연계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진정한 현실’이라면, 그 사실이 왜 좀 더 분명하지 않을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 증거로는 기적과 신실한 증인의 존재, 논리적 증명을 떠올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주로 관심을 갖고 찾기를 바랐던 것은 반박 불가한 논리적 증명이었다. 그런 증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리 포터 이야기에 기대어 보자.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매력은 많지만 양파 껍질처럼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펼쳐 가는 이야기의 흡인력과 반전의 재미를 빠뜨릴 수 없다. 시리즈 전체를 볼 때도 가장 큰 반전은 역시 스네이프 교수의 정체일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에 해리의 아버지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어서인지 아버지와 빼닮은 해리 포터를 지독히 싫어했다. 사악한 마법사 ‘볼드모트’의 추종 세력인 ‘죽음을 먹는 자’의 일원이었다가 돌아선 그였지만, 급기야 볼드모트에 맞서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덤블도어 교수를 죽이고 볼드모트 밑으로 돌아간다. 그가 제공한 결정적인 정보 때문에 해리 포터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선량한 마법사들 몇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마지막 7권의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스네이프 교수는 덤블도어의 신의를 배신한 최악의 변절자요 볼드모트보다 더 지독한 비호감 악당이었다.

그러나 스네이프 교수가 볼드모트의 공격을 받고 죽어가며 해리 포터에게 남긴 기억을 통해 충격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진실은 정반대였다. 스네이프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소유자, 선량한 동료 마법사들에게 한결같이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볼드모트의 최측근으로 머물며 해리 포터와 학생들을 몰래 도운 진정한 영웅이었다.

스네이프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를 끝까지 믿어 준 사람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덤블도어 한 사람뿐이었다. 나중에는 죽음의 주문으로 덤블도어를 죽인 일까지도 덤블도어의 사전 부탁에 따른 것이었음이 밝혀지지만, 해리 포터가 스네이프의 기억을 보기 전까지, 그러니까 7권 후반부도 한참 지나서까지 그가 사실은 선량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었다. 스네이프를 믿었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였던 덤블도어의 전폭적인 신뢰만이 스네이프를 선량한 인물로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일부러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대목에 이르기 전까지 그의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던 플롯 상의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주어지지 않고 믿음과 의심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혹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무지 반박할 수 없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논리를 바란 적이 있는가. 나는 그랬다. 실제로 신자들은 그런 논리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고, 덕분에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들도 거두었다. 그러나 논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절대적 확실성을 갖춘 논리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 원래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정보가 다 주어져 있지 않고, 설령 그런 엄청난 정보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처리할 능력이 없다. 주어져 있는 퍼즐 조각 일부를 가지고 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할까. 자신이 속한 이야기가 어느 대목에 이르렀는지 모르는 등장인물과 같다고 할까. <해리 포터> 시리즈는 내게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그림을 제시했다.

 

<해리 포터>를 통해 두려움, 복수, 신앙의 증거, 이 3가지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여기서 이 문제들에 대한 완결된 답변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리즈에서 각 문제를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좋은 문학을 읽을 때 따라오는 보너스와 같은 것이었다. 교훈이나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학 작품 자체를 즐기면서 그 안에서 놀다 보니 내가 갖고 있던 기존의 의문 및 생각들과 닿는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이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문득, “위대한 책들은 세상에 베풀어진 아주 큰 자비”라고 했다는 리처드 백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1) 로마서 12:19

2) 물론 대개의 경우 이것은 그냥 손 놓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죄지은 자는 법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하고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적 보복이 아니라 사법 제도를 통해 공적으로 정의가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무한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과 인간 능력의 한계로 인해 법 제도와 집행의 현실은 정의와 공정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너무나 많다. 당연히 지속적인 보완과 개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당연한’ 얘기를 배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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