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의 시간은 돌봄 받지 못한다. 장애인의 시간 또한 비장애인의 시간만큼 귀하건만, 사회는 그들의 시간을 무례하게 소모시킨다. 하지만 장애인 운동가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동료 시민들의 시간을 돌본다. 앞을 막아서는 경찰과 지하철공사 직원, 그리고 걸음을 서두르는 노동자들 앞에서 오늘도 시민들의 필요를 말함으로써, 현재의 시간이, 건강하고 젊고 장애가 없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모두의 시간이 귀히 여김받도록 ‘평탄케 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본문 중)

박은영(작가)1)

 

자본주의 사회의 시간은 늘 진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연이나 반복은 있을 수 없으며, 시간과 공력을 투자하면 즉각적으로 성과가 나타나야만 한다. 끊임없는 전진을 통해 생산된 것들만 ‘성취’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진보와 성취를 이뤄내는 시민을 키워 내는 시간은, 일은 반복적이고 성과는 비가시적인, 돌봄 노동으로 이루어진 시간이다.2)

 

사람을 돌보는 일뿐 아니다. 노동자들이 진보와 전진을 위해 노동하는 공간을 돌보는 청소와 정리도 반복적이며, 그 성과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돌봄으로 키워진 노동자들이 돌봄으로 유지되는 공간에서 일함으로써 돌아가지만, 돌봄 노동에는 도무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직접적 성취가 아닌, 반복적이면서도 돌봄받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돌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3)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은 항상 직선으로만 흐른다고, 직선으로 달리지 않는 시간은 모두 낭비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모두에게 주입한다. 그 직선을 떠받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부스스 일어나 토스트 한 쪽을 입에 욱여넣고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도시 지하철은 시민의 발이 되어 그들을 돌본다고 선전하며, 노동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터로 운송한다. 지하철은 붐비고 앉을 자리가 없어도,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안전하고 감미로운 공간이다.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서 있기만 해도 노동자들은 이 도시에서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다. 출근 지하철에 올라 잠시 눈을 감거나 음악을 듣는 그들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가장 빠른 지름길로 출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신속한 출근길의 망중지한을 담보해 주는 신성한 아침 지하철을 ‘지연시키는’ 아찔한 반역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지하철을 지연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비장애인 시민들처럼 출근길 지하철을 타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신속하고 매끈하다는 지하철은 휠체어 이용자에겐 전혀 매끈하지 못했다. 거대한 지하철은 휠체어 바퀴 하나 안전하게 통과시키지 못했다.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는 게 전 세계적 상식인데, 전차 이용객의 5%도 안 되는 장애인 승객조차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속도 면에서도 공간 면에서도 ‘발 빠른 대중교통’의 지위를 잃을 것 같아지자, 최근에는 장애인 시민들의 탑승을 완전히 막음으로써 아예 ‘대중’교통이길 포기하고 있다.

 

그동안 일부 사람들은 지하철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는 대신, 지하철을 ‘지연시키는’ 장애인들을 원망했다. 감히 ‘신성한’ 출근길을 방해하다니. 하긴, 피곤이 풀리기도 전에 간신히 일어나서 출근 시간을 맞추려고 다급히 나와 간신히 지하철에 올라 잠깐 눈 좀 감고 있으려는데 지하철의 감미로운 리듬이 덜컥 잘려버리니, 출근도 하기 전에 피로가 쌓이는 것 같다.

 

 

이에 그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고, “몇 사람이 피해를 보는 거냐”고, “직장을 못 가게 하면 어떡하냐”고4). 그들은 자본주의가 승인하고 독려하는 성취의 시간을 멈춰 세우는 걸 ‘용인’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옆 사람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시가 급한 자본주의의 시간은, 시민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더러워지고 끊임없이 배가 고픈 그들을 돌보고 키운 반복적이고 지겨운 시간을 빨리 잊기를 바란다. 잊을 뿐 아니라 그 지리멸렬함을 잠시도 참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위협하고 닦달한다.

 

사실 장애인도 출근 시간에 달리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장애인 운동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출근길 지하철 타기 투쟁을 하면서 매일 아침 시민들에게 출근길에 불편을 드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시작한다. 근데 그거 아는가? 내 직장이 있는 역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나는 다시 정거장으로 내려가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더 간 다음 지상으로 올라와 휠체어를 타고 다시 한 정거장을 돌아간다. 하지만 내 출근 시간 지연에 대해서는 아무도 사과한 적이 없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비장애인들이 스스로 돌봄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스스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느낄 만큼, 섬세하게 그들을 살피고 있다. 반대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보다 갑자기 뚝 끊기고 반복되는 시간에 익숙하다.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직선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는 온 사회가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장애인들은 다른 이들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그들의 시간을 돌볼 수 있는 자원과 시스템, 관계망에서 배제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비장애인의 시간을 금과 같이 여기며 수백 수천 가지 시스템과 기술로써 그것을 보호하고 아껴준다. 하지만 장애인의 시간에는 아무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시설에 갇혀 아무것도 못 하고 방에서 하루를 보내거나, 탈 수 있는 대중교통이 없어서 시간을 지체하거나, 각종 사회 인프라에 접근하지 못해 수년씩 헤매고 다녀도 거기에 대해서는 미안함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장애인들의 시간은 돌봄 받지 못한다. 장애인의 시간 또한 비장애인의 시간만큼 귀하건만, 사회는 그들의 시간을 무례하게 소모시킨다. 하지만 장애인 운동가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동료 시민들의 시간을 돌본다. 앞을 막아서는 경찰과 지하철공사 직원, 그리고 걸음을 서두르는 노동자들 앞에서 오늘도 시민들의 필요를 말함으로써, 현재의 시간이, 건강하고 젊고 장애가 없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모두의 시간이 귀히 여김받도록 ‘평탄케 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2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외치는 그들 뒤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가 내린다. 장애인들이 20여 년간 반복적으로 말하고 투쟁해 만든 엘리베이터다. 그동안 수많은 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겼지만 장애인 운동가들의 성취는 망각되고, 지긋지긋하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제도 말했고 오늘도 말하며 내일도 말할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욕설을 들었지만, 내일도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의 인권은 유보될 수 있는 성질의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 온 것이 비장애인들에게는 작아 보일지라도, 장애인들의 시간은 무능하지 않다. 그들이 성취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직선의 시간은 그냥 그어지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20여 년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원으로 시민 한 명 한 명을, 우리 사회를 수십 번 수백 번씩 감싸면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나선을 한 땀 한 땀 그려 왔다. 그들은 비장애인 노동자들을 포획해 버린 자본주의적 시간을 존중하는 대신, 사람을 존중한다. 시간이 금이라면,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시간이 귀한 것은 장애 유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한정된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해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혹시 교통수단을 선택하거나 유용한 기술이나 서비스를 이용하여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면, 당신은 섬세하게 돌봄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에겐 한 번도 제공된 적 없는 돌봄, 누군가 20년 넘게 싸워 얻고자 하는 그 돌봄을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건지도.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2) 메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반비, 2022), 83-85쪽.

3) 앞의 책, 87-88쪽.

4) 복건우, “[승강장일기]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시간, 3”, 「비마이너」,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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